첫째로, 애들이 어른들 보기에 못마땅한 행동을 할 때에 어른들은 ‘너 지금 그러면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못 된다.’ 한다. 말의 뜻을 보면 지금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면 그 행동이 너의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를 결정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어리거나 젊은 시기가 어른이나 기성세대를 위한 준비기라는 발상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청소년기는 어른을 위한 준비기가 아니다. 인생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 어느 시기도 준비기가 될 수 없는 실제 인생의 한 때인 것이다. 열다섯은 열다섯이고, 스물은 스물이며, 마흔은 마흔이지 어떻게 열다섯이 마흔을 위한 준비기가 될 수 있는지, 마흔을 위해 열심히 유보한 열다섯이 행여 그 과정 안에서 죽기라도 한다면 마흔을 위해 절제되고 유보되었던 열다섯을 그 누구도 보상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의미로 인생에 오픈 게임은 없다. ‘지금 그러면 안된다’라는 말은 애들 앞에 좋은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어른들이 자기들의 못된 점을 따라 하는 애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어른들의 궁여지책일 경우가 많다.
둘째, ‘나중에 커서 뭔가 줄 수 있고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언뜻 들으면 이 말은 참 좋은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 말은 무서운 말이 될 수도 있다. 애들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 때문에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가지려고 든다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준다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낫고 좋다고 생각을 하는데 이는 커다란 잘못일 수 있다. 주는 것은 받아주는 상대방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 의미로 준다는 것과 받는다는 것은 동격이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손을 맞잡을만한 거리에 상대방이 존재하며, 내가 주는 것을 상대방이 기쁜 마음으로 받아 줄 때에만 나는 누군가에게 뭔가를 줄 수 있게 된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의 주는 행위를 통해 내가 얻는 무엇이 있어야만 되고, 상대방이 얻는 무엇이 있어야만 옳다. 그런 의미로 슬기로운 어른들은 뭔가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 대신에, 누군가와 뭔가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서 이웃과 자신을 나누는 나눔의 모범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셋째, 어른들은 애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이는 대개 학교 공부나 책으로 하는 공부를 뜻한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어른들을 만날 때마다 애들을 만나 기껏 그런 말밖에 할 말이 없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이런 말은 오로지 책으로 하는 공부만이 출세의 지름길이었던 시대를 살았던 어른들이 흔히 쓰는 말이다. 축구 선수가 될 수도 있고, 게이머가 될 수도 있으며, 만화를 그리는 작가가 될 수도 있고, 요리사가 될 수도 있으며, 발레리나가 될 수도 있고, 피아니스트가 될 수도 있으며, 등등. 요즘은 성적을 따져야 하는 공부 말고도 공부의 길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대이다. 애들더러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어른들은 그 누구도 애들이 소위 학교 공부를 해야만 되는 이유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고, 심지어 학교를 다녀야 되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재간이 없다. 사실 살아오면서 만나게 된 수많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상호 간에 얼마나 학교 공부를 잘했는지 따지고서 맺게 된 인간관계는 어쩌면 전무하다. 언제 어디에서 누가 발명했는지는 모르지만, 수우미양가나 가나다, 혹은 1,2,3이나 ABC라는 등급 매기기의 발명 혹은 발견은 참으로 위대하다. 이 온 세상을 그렇게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내는 그런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등급 매기기에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가련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한탄하면서, 또 인생이란 것이 그렇게 몇 점의 점수로 간단히 정리되거나 순차적이지는 않는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우리는 우리보다는 훨씬 멋지게 이 지구라는 별 위를 살아갈 우리 뒤의 신세대들에게 점수와 등급이 그렇게 중요하다면서 그 점수와 등급을 오늘 이 순간에도 강요하고 있다.(20061027, 경향신문*이미지 출처-영문 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