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벨로 주교와 함께 묵상하는 성모님

십자가의 길(제13처) by Sieger Köder

몽포르의 성 루도비코 성인(1673~1716년)은 교회 안에서 성모님 공경에 관한 올바른 기초를 놓으신 분이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흐른 뒤 돈 보스코(1815~1888년) 성인은 루도비코 성인의 성모님 공경에 관한 책이 출간되기도 전에 이미 성모님의 현존을 몸으로 체험하고 실제의 어머니로 모시며 살아 그 어머니의 도우심 아래 자신의 소명을 시작했으며, 청소년들의 아버지와 스승, 그리고 친구로서 수많은 젊은이와 살레시안들에게 성모님의 도우심을 빌며 살아가도록 했다. 그런가 하면 가경자 안토니오 벨로(1935~1993년) 주교는 현대 세계 안에서 성경에 기초를 두면서도 풍부한 영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성모님을 우리 곁에 가까이 모시도록 인도한 목자 중 한 분이다.

다음은 안토니오 벨로 주교의 저서 <Maria Donna dei Nostri Giorni(오늘날의 성모님)>의 우리말 번역인 <성모님과 함께하는 31일 기도(최경선 옮김, 바오로딸, 2018년)>의 부분 발췌이다. 관련 성경 구절의 수록과 같은 약간의 보충과 함께 임의적인 편집이 있다.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책을 읽는 것이 좋다. 괄호 안 숫자는 책의 인용 쪽을 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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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범한 여인: 성모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사시는 동안 가정을 돌보며 일에 파묻혀 지내셨다.(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4항) … 마리아는 높은 하늘에 사신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 사셨다. 마리아의 생각은 허황된 것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구체적인 일상 가운데 활동하셨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환희 가득한 체험을 하게 하셨을지도 모르지만, 마리아는 여전히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었다. 마리아는 어렵고 곤란한 상황에서도 인내롭게 가정을 꾸려간 평범한 아낙네였다. 어디 그뿐인가. 마리아는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가까운 이웃과 똑같이 생활하셨다. 같은 우물물을 길어 마셨으며 같은 절구에서 밀을 빻았다. 또 같은 뜰에 앉아 선선한 바람을 쐬기도 했다. 여느 사람들처럼 하루종일 밭에서 이삭을 줍다가 저녁이 되면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어느 날 누군가 “마리아, 흰머리가 늘어가네요.” 하고 말하면, 마리아는 샘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곤 사라져 가는 젊음에 상심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마리아 역시 우리처럼 ‘가정을 돌보며 일에 파묻혀 지내셨다’는 사실을 보면 마리아가 일에서 비롯되는 노고를 알고 계셨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고달픈 일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마리아 역시 건강·인간관계·변화와 같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마리아가 얼마나 자주 두통을 느끼며 빨래터에서 돌아왔는지, 요셉의 일터에 손님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며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무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올리브를 추수하여 기름을 짜는 계절에 예수의 일자리를 찾아 얼마나 많은 집 문을 두드렸을까? 이미 낡은 요셉의 외투를 뒤집어 아들에게 망토를 만들어 입히느라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을까? 여느 아낙네들처럼 마리아 역시 남편과의 관계에서 위기를 느낄 때도 있었으리라. 요셉이 천성적으로 과묵하기는 했지만 언제나 마리아의 침묵을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리아는 다른 어머니처럼 십대를 벗어나 청년으로 성장하는 아들을 지켜보며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졌으리라. 또한 다른 여인과 마찬가지로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 때로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에게서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괴로움을 겪었으리라. 어쩌면 그들을 실망시키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한없는 외로움으로 괴로워하며 눈물 흘리다 가족이 모여 함께 기도드릴 때 비로소 신비로운 친교를 나누며 기뻐했으리라.(13-15)

2. 기다림의 여인: 기다린다는 것은 삶의 멋을 느끼는 것이다. 갈망의 깊이는 우리가 얼마나 거룩해지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맞는 말일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마리아는 피조물 가운데 가장 거룩한 존재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마리아의 삶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느끼는 흥에 겨운 리듬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25)

성경이 마리아를 언급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마리아는 기다리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곳, 최후의 만찬이 있던 다락방에서 마리아는 제자들과 함께 성령을 기다렸다. 마리아는 성령의 스치는 날갯짓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거룩한 도유의 향기로 가득한 그날, 성령께서는 교회에 내려오시어 구원의 사명을 명하셨다. 마리아는 처음부터 기다리는 동정녀였으며, 또 끝까지 기다린 어머니였다. 인간적이면서도 신성을 담은 이 두 가지 경이로운 사건이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마리아는 한없는 희망을 맛보았다.

마리아는 예수를 품고 아홉 달을 기다렸다. 가난을 봉헌하며 기뻐하는 친척들과 함께 율법이 완성되는 날을 기다렸다. 마리아는 미루고만 싶었지만, 아들이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게 될 그날도 기다렸다. 마리아는 풍성한 은총이 하느님 백성의 식탁에 흘러넘치게 될 ‘때’를 기다렸다. 십자가에 못 박힌 외아들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무덤 앞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며 사흗날이 되길 기다렸다. ‘기다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의 또 다른 면이다. 마리아에게 기다린다는 것은 언제나 사랑한다는 것을 뜻했다.

… 오늘 저희가 기다리는 법을 깨치지 못한 것은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샘이 말라버렸습니다. 깊은 갈망으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수많은 대용품으로 흡족해하며 이제 그 무엇도 기다리려 하지 않습니다.(25-27)

3. 사랑에 빠진 여인: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벗어나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내어주며 사려 깊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인내롭게 견디며 이기심의 저울을 흔들어 떨어트리고 상대방의 필요를 첫 자리에 두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고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며 흘려보내야 할 때가 오면 자유로이 사라지는 것을 뜻합니다.(35)

4. 잉태한 여인: 하늘은 하느님을 담아낼 수 없었지만, 당신은 하느님을 감싸는 부드러운 그릇이 되었나이다. 당신이 하느님께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지만, 당신은 하느님이 당신의 심장 아래 뛰노는 것을 느꼈나이다. 어쩌면 당신은 그때 이렇게 자문했는지 모릅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심장을 뛰게 하는지, 하느님이 당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지. 당신은 불안한 꿈 때문에 깨어 있었지요. 실타래가 빙빙 도는 베틀에 앉아 빠른 손놀림으로 기저귀와 고요한 자궁 속에 있는 그분을 감쌀 옷감을 짰지요. 어느 날 험상궂은 군인이 와서는 그 옷을 찢어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얼마나 자주 느꼈던가요? 슬픔에 찬 고통이 당신을 스치면 당신은 이내 웃음 지으며 나자렛 여인들이 갓 태어난 아기를 보러와 “어머, 엄마를 쏙 빼닮았네”라고 말하리라 생각했지요. 영원한 언덕 너머에서 흘러내리는 생명의 물이 솟아 나오는 샘이신 마리아, 모든 이를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소서.

… 성모님, 아홉 달 동안 태중에 예수를 품고 계시면서 저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도 함께 품으셨으니 감사드립니다.(39-41)

5. 받아들임의 여인: 마리아한테서 누구나 피난처를 발견했다. 그중에는 나자렛의 막역한 친구와 이웃들, 요셉의 친척과 예수님의 또래 친구들, 그 지역에 사는 가난한 이들과 잠시 머물다 가는 순례자들, 예수님을 배반한 후 눈물 흘린 베드로와 두려움에 도망쳐서 숨어버린 제자들이 있다.(45)

성모님, 형제자매들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소서. 이 힘든 시대에 자칫하면 곤란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리는 문에 빗장을 지르고 그것도 모자라 안전장치까지 하고 삽니다. 이제 더 이상 서로를 믿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나 함정이 보입니다.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먼저 의심을 품습니다. 배반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음속에 있는 일치를 향한 열망을 앞섭니다. 이웃 앞에 선 우리 마음은 이미 조각나 있습니다.

저희 마음에서 불신을 없애 주소서. 집단 이기주의라는 참호에서 벗어나고 그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게 도와주소서. 마음을 열어 우리와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지역의 경계보다 먼저 문화의 경계를 치우게 하소서. 지역의 경계는 이주민의 폭주로 무너지고 있지만 때로 문화의 경계선을 수용하기를 거부합니다. 저희가 사는 도시에 외국인을 받아들여야 할 때 우리 사회가 마음으로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님의 몸을 받아 안은 성광聖光이신 마리아, 저희가 목숨을 다할 때 안아주소서. 예수님이 어머니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평안히 잠든 것처럼 저희도 당신 품 안에서 죽게 하소서. 저희의 온 삶은 당신 마음에 품었던 것처럼 잠시라도 당신 무릎에 쉬게 하소서. 마지막 당신 팔에 안아 영원한 그분께 데려가 주소서. 당신이 저희와 함께 계시면 저희는 자비를 얻게 되나이다.(47-49)

6. 먼저 걸음을 내디딘 여인: 첫걸음의 여인이요 희망 속에 하느님의 은총을 전하는 온유한 사신이신 성모님, 다시 한번 서둘러 ‘일어나’ 저희를 도와주소서. 저희에게는 당신이 필요하오니 애원할 때까지 기다리지 마소서. 자비를 구하는 저희 외침을 들어주시고 저희가 시작하는 모든 일을 이끌어주소서.

죄에 넘어져 삶이 온통 마비될 때 회개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시고 도움을 청하기 전에 와주셔서. 빨리 오시어 잘못을 저지른 저희에게 희망을 불러일으켜 주소서. 제때에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진흙 구덩이에 빠질 것입니다. 저희 마음에 회개의 샘을 열어주지 않으면 하느님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성모님, 당신은 이 세상에 사실 때 항상 먼저 용서하심으로써 사람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이웃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당신이 먼저 ‘일어나’ 문을 두드려 걱정거리를 들어주고 감싸주며 마음을 써 주셨습니다. 아들 예수가 배반당한 날 밤에도 깊은 애정으로 ‘일어나’ 쓰디쓴 눈물을 흘리는 베드로를 망토로 감싸주었습니다. 유다가 배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스런 마음으로 ‘일어나’ 찾아가 용서하며 희망을 주시고 십자가에서 예수를 내린 후 당신은 유다를 찾아가 나무에서 끌어내려 시신을 평온히 감싸주셨으리라 여겨집니다.

비오니 저희가 용서해야 할 때 먼저 다가설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당신처럼 첫걸음을 내딛는 전문가가 되게 하소서. 오늘 저희가 누릴 수 있는 평화를 내일로 미루지 않게 하시고 우유부단하지 않게 하소서. 다른 이가 먼저 행동하기를 바라는 좁은 마음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이번엔 네가 움직일 차례야!’라고 비웃으면서 상대방을 빨갛게 타오르는 장작더미에 올려놓는 일이 없게 하소서.

먼저 움직이는 데 익숙한 여인이신 성모님, 심판 때에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움직여 주소서. 저희가 언젠가 그분 앞에 서게 될 때 당신이 먼저 말씀해주소서. 영화로운 옥좌에서 다시 한번 ‘일어나’ 저희를 맞으러 오소서.

저희 손을 잡고 당신 망토로 감싸주소서. 당신 눈에 자비의 등불을 켜시어 하느님의 자애로운 판결로 용서받게 하소서. 하느님의 가장 큰 행복은 당신의 결정을 승인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53-56)

*루카 1,39 “마리아는 (일어나서)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ναστσα δὲ Μαριὰμ ἐν ταῖς ἡμέραις ταύταις ἐπορεύθη εἰς τὴν ὀρεινὴν μετσπουδς εἰς πόλιν Ἰούδα,)”라는 문장이 있다. 여기서 루카 복음사가는 ‘마리아는 … 갔다’라는 사실을 묘사하면서 ‘아나스타사(Ἀναστᾶσα)’라는 말을 문장 서두에 놓는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일어나다, 일어서다(자동사)’ 혹은 ‘일으키다, 세우다(타동사)’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신학적으로는 ‘부활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루카 1,39에 보이는 Ἀναστᾶσα라는 말은 시간적 부사 분사로서 문장 마지막의 ‘갔다’에 선행하는 마리아의 동작을 보충한다. 새겨보자면, 마리아가 가긴 갔는데, ‘지체하지 않고 의지적으로 결단을 내려 일어나 행동으로 옮겨서’ ‘갔다’라는 것이다. 뒤에 나오는 “서둘러”와 함께 마리아가 자의적이고 능동적인 모습으로 행동에 옮겨 이동한 마리아의 마음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성경 번역에 이러한 마리아의 마음을 담아 “마리아는 (일어나서)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라고 ‘일어나서’를 추가하여 번역해도 의미상 큰 무리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루카 1,39;4,29.38;5,28;6,8;8,54;9,33;10,25;15,18.20;17,19;22,45;24,12.33에서도 Ἀναστᾶσα라는 말의 용례들을 살펴볼 수 있다.

7. 처음으로 하느님을 바라본 여인: 성모 마리아님, 아기를 바라보며 저희 모두를 소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당신은 처음으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바라보았나이다. 저희는 당신과 함께 첫 결실을 맛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바라본 첫 피조물입니다. 그 특권을 당신과 나누고 싶어 당신 옷자락에 매달립니다.

… 저희가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다른 얼굴을 찾거나 다른 모습을 쫓아갈 때 용서해주소서. 저희 영혼 깊은 곳에 당신을 향한 눈길, 당신과 그분 눈길에 대한 갈망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알아주소서.

자비로운 성모님, 저희를 바라보소서. 특히 저희를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 외에는 아무도 없음을 알게 될 때 저희를 어여삐 여기소서.(76-77)

8. 빵을 구워 식탁을 차린 여인: 당신은 살림이 넉넉해서가 아니라 피땀 어린 노고로 빵을 마련하셨나이다. (그 빵을 위해 요셉도) 오랜 시간을 목공소에서 열심히 일했나이다. … 당신은 생계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처럼 고생하셨나이다. 저희가 가난한 이들이 겪는 고통을 느끼게 하소서.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가난한 이들의 어려움에 민감하게 하시고, 이미 말라버린 어머니의 젖가슴에 매달려 비참하게 죽어가는 젖먹이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게 하소서. 먹다 남은 빵 조각을 바라보며,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는 오늘의 경제 체제에 의문을 갖게 하소서. 정든 조국을 떠나야만 하는 가난한 자의 눈물을 닦아주소서. 외로움을 달래주시고 거부당하고 상처 입은 그들을 지켜주소서. 실직자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시고 진수성찬을 부족함 없이 맛본 이들의 이기심에 재갈을 물려주소서. 사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은 부족하지 않나이다. 다만 서로 나누려는 열망이 필요할 뿐입니다.(82-84)

9. 경계선에 있는(이주하는) 여인: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마태 2,13)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용감한 마리아가 다른 문화의 분기점에 서 있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오늘날 새로운 관습과 언어에 적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모습은 강력한 표상이 된다. … 최후의 만찬 다락방에서 성령이 새로 탄생한 교회 구성원 각자에게 내려와 “땅끝에 이르기까지 증인이”(사도 1,8) 되게 하셨을 때 마리아도 거기 함께 있었다.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령강림 때 마리아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묵시 7,9) 이들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더욱 강력한 순간, 곧 십자가 밑에서 마리아는 고귀한 모습의 이주하는 여인으로 부각된다. 십자 나무는 유다인과 이방인을 분열시킨 장벽을 헐어버리고 두 백성을 하나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류가 하느님과 화해하게 했다.(참조. 에페 2,14) 십자가는 하늘과 땅의 마지막 경계선이요, 시간과 영원이 펼쳐진 국경과 같다. 이처럼 대단한 국경에서 인간의 역사는 하느님의 구원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마리아는 국경에 서서 그 땅을 눈물로 적신다.(87-88)

당신이 구원의 역사에서 국경선, 경계선상에 서 계신 것은 대립하는 여러 나라의 일치를 위함입니다. 당신은 두 계약의 갈림길에 서 계신 분, 샛별이며 정의의 태양에 앞서 오는 새벽이요 밤의 마지막 흔적과 어슴푸레 떠오르는 아침을 이어주는 지평선입니다. … 성모님,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서 계심에 감사드립니다. 일상을 벗어난 세상 위에 우뚝 선 십자가는 역사를 한데 모으며 세상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그 죽음은 또한 희망으로 가득한 미래가 현재로 바뀌는 경계입니다. 저희에게는 그 평화가 필요합니다. 이 격동의 시대를 사는 저희 편이 되어 주소서. 지금 세상은 문명의 경계에서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갈림길에 서 있는 저희, 획기적인 전환기의 주인공으로 살아야 하는 저희를 돌보소서. 서로 다른 문화의 경계선에서 저희는 지금까지 저희를 지켜준 국경의 이정표를 버려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습니다.

가난하고 억압받으며 피신하는 수많은 이들을 사로잡는 ‘새로운 일들이’ 저희를 놀라게 합니다. 이주민이 없기를 바라는 저희는 내 것을 지키려고 보안 조치를 강화하고, 마음을 활짝 열기보다 국경을 폐쇄하려 듭니다. 언제나 희망으로 가득 차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저희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성모 마리아님, 오래전부터 우리는 당신을 이 땅의 마지막 경계에 계시는 분, ‘하늘의 문’이라 불러왔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처럼 저희가 죽을 때에도 저희 곁에 머무르소서. 괴로워하는 저희를 지켜주시어 떠나지 마소서. 조국과 타국을 구분하는 최후의 경계선에서 당신 손을 펼쳐주소서. 당신이 구원의 문 앞에서 맞아주시면 경계선을 무사히 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89-91)

10. 두려워하지 않는(용감한) 여인: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루카 1,30)라는 말을 천사에게서 들으신 마리아. 마리아는 몰이해에 대한 두려움, 인간의 악의에 대한 두려움, 요셉의 건강에 대한 두려움, 예수님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 혼자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다. … 누구나 두려움에 직면한다. 내일에 대한 두려움, 오랫동안 쌓아온 사랑이 어느 날 갑자기 끝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허송세월하다 서른을 넘긴 아들에 대한 걱정,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도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막내딸에 대한 걱정이 있다. 갈수록 쇠약해지는 건강, 등 뒤로 바짝 쫓아오는 노년기, 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직면하기도 한다. … 마리아는 두려움을 느끼신 성모님일지는 몰라도 포기하신 성모님이 아니다. … 성모님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렇게 말했을 때 자신을 내어놓았다. 주님의 종으로 봉헌한 것이다. 그때부터 마리아는 세상 풍조를 거슬러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언제나 놀라운 결단을 내려 응답했다.

마구간에서 예수를 낳자마자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떠나야 했고, 시메온의 무서운 예언을 들었으며, 30년이라는 침묵의 세우러 속에 가난한 삶을 살아내야 했고, 목공소 문을 닫고 떠나는 예수를 말없이 바라보아야 했다. 아들의 소문을 듣고 괴로워한 마리아는 갈바리아까지 따라가 군인들의 폭력과 군중의 조롱고 못 들은 척 십자가 옆에서 용감히 자리를 지셨다. 마리아는 죽어가는 아들과 함께 하느님의 침묵 앞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이것은 때때로 성 금요일에 노래하는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여, 살펴보고 또 뵈오. 당신의 격렬한 진노의 날에 주님께서 고통을 내리시어 내가 겪는 이 내 아픔 같은 것이 또 있는지”(애가 1,12)라는 화답송이 표현해 준다.(92-94)

십자가 밑에서 세 시간 동안 고통을 견디며 이 땅의 모든 어머니가 겪는 아픔을 받아 안으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에게도 그 힘을 주십시오. … 절망의 유혹에서 건져 주시고 하느님 친히 우리 손을 잡아주신다는 믿음으로 일상의 시련을 지게 하소서.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절망감을 느낄 때 저희 곁에 계셔주소서. 황량한 길을 걸어갈 때 저희 곁에 오시어 희망 가득한 말을 들려주소서. … “거룩한 하느님의 어머니, 당신의 보호 아래 피난처를 구하나이다. 영화롭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가 도움을 청할 때 물리치지 마시고 모든 위험에서 구해주소서. 아멘!”(96-97)

11. 늘 움직이는 여인: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루카 1,39) 최고의 보행자? 늘 걷느라 발이 부르트고 굳은 살이 박혔을 여인

베들레헴으로, 이집트로, 아기 예수를 봉헌하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유다로 갔다가 다시 나자렛으로, 예루살렘 성지 순례에서 예수를 찾으러 되짚어 예루살렘으로, 군중 속에서 예수를 따라 갈릴래아 곳곳으로, 십자가 밑에까지로, 첫 기적의 혼인집으로, 잔치 후 카파르나움으로(참조. 요한 2,12), 사도들과 함께 다락방으로 …

저희도 당신처럼 영원한 삶을 향해 늘 움직이고 싶습니다. 저희도 당신처럼 순례자가 되어 이 길을 걸어갑니다. …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는데, 어디인지를 모르게 막막합니다. 길이 눈앞에 있는데도 목표를 잃은 듯하고 바퀴는 같은 자리를 겉돕니다.

저희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소서. 이 여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머니, 대답해주소서. 저희의 무거운 바퀴 아래에서 더 이상 꽃들이 피어나지 않는다면 적어도 저희의 성급한 걸음을 늦추어 꽃향기를 맡으며 그 아름다움을 감탄이라도 하게 하소서. 성모님, 다른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며 걷게 하시고 스스로 고립하여 자신을 가두는 일이 없게 하소서. … 저희 걸음이 빠를 땐 뒤처진 이들을 기다려 함께 가게 하소서. 바쁘다고 앞서가면 시간을 얻을지는 몰라도 함께 여행하는 벗을 잃어버릴 수 있나이다. 서두르면 빨리 갈지는 몰라도 나날을 사랑으로 채우지는 못합니다. 사랑을 나누는 맛도, 진정한 만남의 기쁨도 얻지 못합니다.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교회 헌장 68)인 성모 마리아님, 지도가 아니라 역사의 땅을 순례하는 여행자로서 길을 찾아야 함을 알게 하소서. 이러한 영적 여정 가운데 신앙이 커가리다. … 거룩한 곳을 향한 저희 발걸음을 이끄시어 시시때때로 변하는 모래 위에서 영원의 흔적을 발견하게 하소서. 목적 없는 여행자처럼 갈팡질팡하지 말며 내면을 추구하는 맛을 들이게 하소서.(98-104)

12. 과묵(침묵)의 여인: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루카 1,34)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38) 마리아의 노래(루카 1,46-55)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예수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마태 12,46)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 ”(루카 2,48)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없구나.’ 하였다.”(요한 2,3) “(제자)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성모님, 저희 삶에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성경 말씀이나 교부들의 말씀, 영성이나 전례, 교회나 예술에 있기보다 나자렛 집에 스며 있습니다. 냄비와 베틀, 눈물과 기도, 양모 실타래와 성경 두루마리 사이에서 공손한 여성의 모습으로 회한 없는 기쁨, 절망 없는 슬픔, 기약 없는 이별을 체험하신 당신의 소박한 가정에 있습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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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는 침묵의 여인이다.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네 번 말한다. 성모영보 때,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마니피캇을 노래할 때,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을 때, 그리고 갈릴래아 지방 카나에서 혼인 잔치에서 시중드는 일꾼들에게 … 그리고 영영 입을 다문다.

마리아의 침묵은 단지 말을 하지 않거나 덜 야단스러운 것을 뜻하지 않는다. 침묵은 엄숙한 고행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침묵은 하느님의 현존을 신학적으로 감싼 덮개요, 충만함을 둘러싼 껍질이며 말씀을 품고 있는 자궁이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마지막 단락의 한 구절을 마리아의 침묵을 해석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로마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오랜 세월 감추어두셨던 신비의 계시”(로마 16,25)가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침묵에 싸여 감추어진 신비다.

침묵은 영원의 자궁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둘러싸고 있다. 역사의 자궁 속으로 들어간 그는 침묵 외에 그 어느 것도 걸치지 않는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으로 그 침묵을 품었다. 그리하여 지상에 숨겨진 천국의 침묵을 연장하며 사랑의 비결을 간직하는 법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모두 소음에 방해받고 있으나 마리아는 말씀은 담은 침묵의 금고가 되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침묵의 여인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평화의 샘으로 데려가 주소서. 사람들이 내뱉는 말, 특히 언어의 홍수 속에서 구해주소서. 소음의 자식인 저희는 마구 떠들다 보면 불안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잠잠해질 때야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끊임없는 소음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텔레비전 소리를 높일수록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시끄러울수록 그분은 잠잠하시고 우리가 침묵할 때 비로소 하느님이 말슴을 깨닫게 하소서.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라는 지혜서(18,14-15) 말씀의 깊은 의미를 설명해 주소서. 청하오니 베들레헴 구유의 꿈 같은 경이로움을 주시어 그 ‘고요한 밤’에 대한 그리움을 저희 마음에 일으켜 주소서.

…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당신 학교에 받아주소서. 귀가 멍하도록 와글거리는 시장터에서 저희를 지켜주소서.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는 대수롭지 않은 호기심에서 저희를 구해주소서. 소란한 대도시 속에서도 침묵하며 관상하게 하소서, 삶의 중요한 것들, 곡 회심·사랑·희생·죽음은 침묵 속에서만 커갈 수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사랑하는 어머니,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청하고 싶은 것은 당신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침묵을 체험하셨으니 저희의 시련에도 함께하소서. 태양이 빛을 잃고 울부짖어도 아무 응답이 없이 공허한 발걸음 소리만 들릴 때, 버림받는다는 두려움으로 절망하지 않게 저희 곁에 머무소서. 침묵을 깨고 사랑의 말을 건네주신다면 죽음의 고통 중에서도 부활의 기쁨이 가득할 것입니다.(117-124)

13. 주님의 종이신 여인: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 마리아 스스로 이 명칭을 자신에게 적용했는데도 이 이름이 마리아를 찬미하는 호칭기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서조차 봉사한다는 말이 복종의 의미만을 부각하여 하느님의 어머니가 지닌 특권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까닭은 어쩌면 우리가 마리아의 모범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주님의 종이신 성모 마리아님, … 하늘 나라의 종으로서 기꺼이 봉사하신 어머니, … 청하오니 영원한 섬김의 학교에 저희를 받아들이소서.

저희는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지존하신 하느님께 조건 없이 내어 맡길 때 모든 봉사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주님의 손길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마치 도박을 하는 것만 같고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이 쌍방 계약이라기보다 주종관계를 맺는 것처럼 느낍니다. … 그분께 온전히 충실할 수 있게 하소서. 한밤중에 주님께서 돌아오실 때 깨어 기다리는 종이 되도록 축복을 내려주소서. 그러면 그분께서 저희에게 손수 상을 차려 주시리이다.(참조. 루카 12,37)

(엘리사벳에게 시중을 들어주기 위하여 설레임 속에 서둘러 길을 떠난) 성모님, 당신의 발걸음을 이끌었던 그 설레임을 저희에게 주소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이웃을 섬기도록 도와주소서. … 당신은 몸소 가난한 이의 고난을 겪으셨으니 저희도 침묵 가운데 선행을 베풀며 다른 이를 위해 섬기게 하소서. … 갈릴래아 지방 카나에서 당신이 하신 것처럼 저희도 사랑과 희망으로 눈을 크게 뜨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게 하소서.(130-135)

14. 성 토요일의 여인: 오늘 밤 알렐루야가 울려 퍼질 때 나무들은 무엇을 하게 될까? 교회가 파스카 찬송Exultet을 노래할 때 숲속 동물들은 연주회를 하듯 부르짖지 않을까? 모래톱에 부서지는 바다는 부활을 선포하는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보름달이 드리울 때 저 너머 공동묘지에 있는 무덤이 흔들리지 않을까?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산이 골짜기 주변에서 기쁨에 겨워 춤을 추지 않을까?

성 토요일이라는 현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흔들리며 움직이는 것만 같다. 그것은 성 토요일의 절대적인 주인공이 마리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무덤에 모신 마리아는 아들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골고타에 부는 바람이 모든 등불을 꺼버렸지만, 마리아의 등불만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다. 마리아는 유일한 빛으로서 지난날의 격렬한 불꽃과 장차 타오를 불꽃을 간직한 등대가 된다. 그날 마리아는 손에 등불을 들고 세상 곳곳을 돌아다닌다. 한쪽을 향해 등불을 들어 올리면 오랜 어둠 속에서 거룩함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또 다른 쪽을 향해 들어 올리면 영원한 집에서 장차 만나게 될 새로운 모습이 떠오른다.

성 토요일의 여인 성모 마리아님, 오늘 온 교회는 믿음으로 한곳에 모였나이다. 당신은 하늘과 만나는 마지막 지점. 은총이 사라진 슬픈 세상을 구해줍니다. 저희의 손을 잡아 부활의 원천에서 퍼져 나오는 빛의 문으로 인도하소서. 저희 영혼에 좋은 기억을 담아주시어 가장 좋은 모습을 걷게 하소서. 미래의 표징이 마음을 움직여 새롭게 되려는 열망과 희망으로 역사에 뛰어들게 하소서.

성모 마리아님, 성 금요일에 드리운 뿌연 안개와 부활을 기다리는 우리네 인생이 성 토요일을 닮게 하소서. 눈물과 피에 찌든 천을 빨아 제대보로 사용하기 위해 봄볕에 말릴 때 성 토요일은 희망의 날로 떠오릅니다. 말씀하소서. 인간은 누구나 십자가에서 내려오기 마련이라는 것을. 인간이 겪는 쓰라린 고통은 웃음으로 풀어지고 모든 죄는 구원 받으며 상복은 기쁨의 옷으로 바뀐다는 것을. 가장 비극적인 서사시는 춤을 추게 하며 장송곡은 알렐루야를 노래하는 축제의 분위기를 담고 있음을 알게 하소서.

성 토요일의 여인 성모 마리아님, 동틀 무렵 부활하신 아드님을 만나기 위해 어떻게 준비했는지 들려주소서. 어떤 옷을 입으셨고, 어떤 신을 신고 풀밭으로 뛰어가셨나이까? 긴 머리는 어떻게 늘어뜨리셨나요? 당신 앞에 아드님이 나타나면 들려주려고 속으로 되뇌던 사랑의 말은 무엇인가요? … (154-157)

15. 사흗날의 여인: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마태 16,21;17,23;20,19;1코린 15,4)라고 한다. 마리아는 (부활하여) 영화롭게 된 아들을 바라본 첫 여인이었다. … 마치 아들의 파스카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확인하여 주려는 듯 복음서는 두 곳에서 마리아와 관련하여 ‘사흗날’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표현은 부활을 암시할 수 있다. 성 루카는 열두 살 난 예수를 성전에서 잃은 후 ‘사흘 뒤에야’ 다시 찾았다고 묘사한다. 몇몇 학자들은 이 일화를, 지상의 삶을 마치고 아버지께 돌아가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맞이하는 파스카 사건에 대한 감추어진 예언으로 해석한다. 어린 예수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는 이야기는 성인 예수가 돌무덤 뒤로 사라졌다가 사흘 만에 영광에 사여 다시 나타나게 됨을 비유적으로 암시한다.

성 요한은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서 “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 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에 계셨다.”(요한 2,1)라며 ‘사흗날’을 언급한다. 예수의 ‘때’를 예감한 마리아의 중재는 인간이 베푸는 잔치에 새로운 파스카 계약의 포도주를 소개하며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맛보게 한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사흗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이 일화를 소개한다. 이처럼 마리아는 ‘사흗날’에 깊이 관련되어 있어 부활날 처음 태어난 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 부활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사흗날의 여인이신 성모 마리아님, 바위처럼 단단히 잠든 저희를 깨워주소서. 저희에게 오시어 밤이 깊을 때 부활의 여명이 새벽처럼 떠올랐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소서.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아낙네들이 향유를 들고 올 때까지 기다리지 마소서. 부활하신 분이 떠오르면 어서 오시어 당신의 증언을 들려주소서. … 성모 마리아, ‘사흗날’의 여인이시여,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저희에게 죽음이 더는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리라 믿나이다. 사람들이 겪는 불의는 끝이 보이고, 전쟁의 화염은 황혼 속으로 사라지며,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멈추리라 믿나이다. 폭력과 고통으로 신음하는 모든 희생자의 눈물이 봄볕의 햇살 아래 이슬처럼 어서 말라버리게 하소서.(160-164)

16. 다락방의 여인: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성안에 들어간 그들(사도들)은 자기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아, 필립보와 토마스, 바르톨로메오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혈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1.13-14)

사도행전의 내용은 성모님이 결정적으로 무대에서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성경 장면이다. 마리아는 이층 다락방에 있다. 이는 마치 모든 그리스도인이 나아가야 하는 영적 수준을 가리키는 것 같다. 마리아의 온 삶은 높은 단계를 향해 점점 성장해갔다.

그렇다고 마리아가 가난한 사람을 멸시한 것은 아니다. … 마리아가 스스로를 우월하게 여겼다는 사실은 찾아볼 수 없다. … 마리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초자연적 운명을 알고 있었지만 보통 사람들과 동떨어져 살기를 바라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존경받으며 자신을 영화롭게 한 적이 없다. 다만 보통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기쁨을 느꼈을 뿐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높은 곳에 망루를 마련하여, 인간 활동의 궁극 의미와 한없이 자비로운 하느님의 손길을 관상했다.

이층 다락방 … 높은 산이 있는 산악 지방 … 해골산 …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루카 1,32) 보통 사람들 사이에서 평범하셨으면서도 항상 높은 이상과 신분을 잃지 않으신 성모님

다락방의 여인 성모 마리아님, 교회의 사목자들이 성령이 머무는 높은 곳에 살게 하소서. 그러면 더 쉽게 인간의 약점을 용서해주고 너그럽게 헤아리며 더욱 굳센 마음으로 부활의 희망을 신뢰하게 되리이다. 당신과 함께 드높은 곳에 이르도록 그들을 초대하소서. … 멀리 내다보는 혜안을 허락하시고 하늘 나라 전망대에서 역사를 바라보게 하소서. 가장 멀리까지 볼 수 있는 망루에서 내려다보는 연습을 한다면 온 누리를 새롭게 하는 성령과 함께 일하게 되리이다.(173-177)

17. 임종의 여인: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임종의 여인 성모 마리아님, 다시 오지 않을 저녁 땅거미가 질 때 저희 곁에 오시어 그 밤을 지켜주소서. 당신 아들 예수께서 졸아가시던 날, 태양이 빛을 잃고 거대한 어둠이 온 세상을 뒤덮었을 그때 당신은 이미 그 밤을 체험하셨나이다. 저희 죽을 때에도 곁에 머무소서. 저희 십자가 밑에 계시어 어둠의 순간 저희를 지켜보소서. 심연의 공포에서 해방하여 주시고 태양도 빛을 잃은 그때 희망의 빛을 비추어주소서. 죽음에서 다시 살게 하소서! 당신이 도와주시면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나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맞이할 죽음을 빛으로 충만한 대성전의 입구로, 타오르는 등불을 들고 기나긴 순례를 마치는 순간으로 체험하게 하소서. 성전에선 더 이상 길을 비추는 신앙의 빛이 필요하지 않을 테니 등불을 끄겠나이다. 주님의 영광이 저희를 비추는 빛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묵시 21,23 참조) 비오니 저희를 도우시어 죽음을 살게 하소서.

성모 마리아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둘 때 고개를 떨어뜨리셨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화가들이 묘사한 것처럼 예수님을 분명 졸음에 겨운 아기처럼 당신을 향해 내어 맡기듯 고개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 어쩌면 돌 받침대 위에 서 계신 당신은 임종하는 이의 베게가 되었나이다. 저희를 성부께 내어 맡길 시간이 다가와 가장 사랑하는 이조차 채워주지 못하는 고독으로 떨어지는 순간 누구도 저희 간청에 응답할 수 없을 때 당신을 마지막 베게로 삼게 하소서.(20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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