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희망의 지도를 그리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집은 총 5개의 장(개막 메시지, 헌장, 교령, 선언, 폐막 메시지)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선언’에는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교육의 중대성」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우리 시대」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인간 존엄성」 3편이 있는데, 이중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교육의 중대성」 반포 60주년을 맞이하여 교황 레오 14세께서 사도(사목) 서한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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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4세의 사도 서한

새로운 희망의 지도를 그리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1965년 10월 28일 공포된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Gravissimum educationis)> 반포 60주년을 맞이하여

1. 서문

1.1. 2025년 10월 28일은 공의회를 통해 공포된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Gravissimum educationis)」 반포 6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문헌은 인간의 삶 안에서 교육이 지닌 막대한 중요성과 시대적 의미를 천명한 문서였습니다. 이 선언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에 교육이 부수적인 활동이 아니라 복음화 자체와 직결되어 있음을 상기시켰습니다: 교육은 복음이 구체적인 행위, 관계, 문화로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빠르게 변화하며 갈피를 못 잡는 불확실성 속에서 살고 있지만, 교육이라는 우리의 유산은 여전히 놀라운 생명력을 지닌 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인도받는 교육 공동체는 물러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벽을 쌓는 대신 다리를 놓고 있습니다. 창조적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며, 학교와 대학, 직업 교육과 시민 교육, 청소년과 학교 사목, 연구의 장에서 지식과 의미의 전달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늙지 않습니다. 오히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하신 말씀처럼, 모든 시대의 복음은 늘 새롭게 듣는 자를 일으켜 세우며 새 생명을 낳습니다. 모든 세대는 복음에 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으며, 그 복음의 씨앗과 열매를 맺는 힘을 새롭게 발견할 사명을 지닙니다.

1.2. 오늘 우리는 복잡하고 단편적이며 디지털화된 교육 환경 속에 살아갑니다. 바로 그렇기에, 잠시 멈추어 ‘그리스도교적 파이데이아(paideia, 고대 그리스어 ‘παιδεία’에서 유래한 단어로, 교육, 양육, 훈련을 의미-역자 주)의 우주론’을 되새기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는 세기를 거치며 스스로 새로워지고, 교육의 다면적 현실 전체를 풍요롭게 이끌어온 비전입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수많은 “교육 별자리들”을 낳았습니다. 이는 작지만 강한 체험들로, 시대의 징표를 읽고, 신앙과 이성, 사유와 삶, 지식과 정의 사이의 일치를 지켜왔습니다. 그 별자리들이 폭풍 속에서는 구원의 닻이 되었고, 평온한 바다 위에서는 돛을 펼친 배가 되었으며, 밤의 항해를 인도하는 등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1.3.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은 그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 문헌을 받아들이면서 이 문헌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교육 여정에 길잡이가 되었고, 학교와 대학, 운동과 기관, 평신도 단체와 수도회, 그리고 국가적·국제적 네트워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업이나 카리스마의 별 무리가 태어났습니다. 이처럼 살아 있는 실체가 21세기를 건너는 영적·교육적 유산을 형성해왔습니다. 이러한 교육적 유산은 굳어 있지 않습니다. 여전히 나침반처럼 방향을 제시하며, 교육 여정의 아름다움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상황은, 60년 전 교회가 직면했던 현실보다 전혀 만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크고 복잡해졌습니다. 전 세계 수많은 어린이가 아직도 기초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쟁과 이주, 불평등과 다양한 형태의 빈곤이 초래한 ‘교육 비상사태’의 비극적 상황들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헌신을 새롭게 해야 할 시급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육은 제가 「나는 너를 사랑하였다(Dilexi te)」에서 상기시켰듯이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가장 고귀한 표현 중 하나”(68항) 입니다. 오늘의 세상은 바로 이러한 형태의 희망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2. 역동적인 역사

2.1. 가톨릭 교육의 역사는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역사입니다. “어머니요 스승”(참조. 교황 요한 23세, 회칙 「어머니요 스승」)인 교회라는 이름은 우월함 때문이 아니라 섬김을 위한 이름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을 신앙 안에서 낳고, 자유의 성숙으로 인도하며, 모든 이가 “생명을 얻고 또 그것을 풍성히 얻게 하려는”(요한 10,10) 신적 스승의 사명을 이어받습니다. 시대를 거듭하여 발전해온 교육의 다양한 양식들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며, 진리와 선을 향해 부름을 받았다는 인간관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르심에 봉사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의 다원성을 보여줍니다. 교육의 카리스마는 결코 고정된 공식이 아닙니다. 각 시대의 필요에 대한 독창적인 응답이며, 하느님께서 매 세대의 역사 속에서 새롭게 불어넣으시는 성령의 창조적 숨결입니다.

2.2. 초기 세기에 사막의 교부들은 비유와 금언(格言)으로 지혜를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언어의 절제와 마음의 경계를 통해 본질로 향하는 길을 다시 발견했고, 세상 어디에서나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는 시선의 교육학을 전수하였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성경의 지혜를 그리스·로마 전통 안에 접목하면서, 참된 스승이 진리에 대한 열망을 일으키는 이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유를 가르쳐 징표를 해석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수도승 운동(Monachesimo)으로 이어졌습니다. 수도자들은 가장 험한 곳에서도 수십 년 동안 고전을 연구하고, 주석하며, 가르쳤습니다. 문화에 봉사한 이 침묵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수많은 걸작이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마음”으로부터 최초의 대학교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은 그 시작부터 “인류의 선을 위해 창의성과 지식의 빛을 발산하는 비길 데 없는 중심지”(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가톨릭 대학교에 대한 교황령(Ex Corde Ecclesiae·1990)」가 되었습니다. 대학의 강의실 안에서 이루어진 사변적(思辨的) 사유가 탁발 수도회들의 중재를 통해 견고한 구조를 갖추게 되었고, 학문의 경계를 향해 뻗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많은 수도회가 이러한 학문의 장(場)에서 첫걸음을 내디뎠으며, 교육을 새로운 교육학적 통찰과 사회적 비전으로 풍요롭게 했습니다.

2.3. 가톨릭 교육의 전통은 여러 형태로 표현되었습니다. ‘학업 지침서(Ratio Studiorum)’ 안에서는, 풍부한 학교 전통이 이냐시오 영성과 융합하면서 체계적이면서도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실험적 탐구에 열려 있는 교육 과정이 마련되었습니다. 17세기 로마에서 성 요셉 칼라상시오(San Giuseppe Calasanzio)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상 학교를 세웠으며, 읽고 쓰며 셈하기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 존엄의 표현임을 통찰하였습니다. 프랑스에서 성 요한 바티스타 드 라 살(San Giovanni Battista de La Salle)은 “노동자와 농부의 자녀들이 교육 체계에서 배제됨으로써 초래된 불의”(교황 레오 14세, Dilexi te, 69항)를 깨닫고, 그리스도 학교 수사회를 창립하였습니다.

19세기 초, 역시 프랑스의 성 마르셀리노 샴파냐(San Marcellino Champagnat)는 “교육이 여전히 소수의 특권으로 남아 있던 시대에, 온 마음을 다해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을 교육하고 복음화하는 사명에 헌신하였습니다.”(같은 문헌, 70항) 이와 마찬가지로 성 요한 보스코(San Giovanni Bosco)는 그의 ‘예방 교육법’(metodo preventivo)을 통해 규율을 이성적 설득과 친밀함의 관계로 변화시켰습니다. 또한 비첸차 마리아 로페스 이 비쿠냐(Vicenza María López y Vicuña), 프란체스카 카브리니(Francesca Cabrini), 주세피나 바키타(Giuseppina Bakhita), 마리아 몬테소리(Maria Montessori), 캐서린 드렉셀(Katharine Drexel), 엘리자베스 앤 시튼(Elizabeth Ann Seton) 등 용감한 여성들은 소녀들, 이민자들, 가장 약한 이들을 위해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제가 「Dilexi te」에서 분명히 밝힌 바를 다시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따를 때 가난한 이들의 교육은 그리스도교의 호의가 아니라 의무입니다.”(72항) 교회 안에서 이어진 이러한 구체적인 역사적 계보에 비추어 교육학은 결코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살과 피, 열정, 그리고 역사 그 자체임을 우리는 증언합니다.

3. 살아있는 전통

3.1. 그리스도교 교육은 함께 마음을 모아 이루는 마음의 일입니다. 조화를 이루는 공동의 작품입니다. 누구도 혼자서 교육하지 않습니다. 교육 공동체란 곧 “우리”이며, 그 안에는 교사와 학생, 가정, 행정 및 봉사 인원, 목자들, 그리고 시민사회가 함께 모여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내는 협력의 장을 이룹니다.(가톨릭 문화 교육부, 대화의 문화를 위한 가톨릭 학교의 신원에 대한 지침Istruzione “L’identità della scuola cattolica per una cultura del dialogo”, 32항)

이 “우리”라는 공동체적 주체가 바로, 늘 하던 방식에 안주하여 “항상 그래 왔다”는 습관의 늪 속에 물이 고이지 않도록 막아 주며, 그 물이 흐르고, 생명을 기르고, 땅을 적시도록 새롭게 움직이게 합니다. 그 토대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참조. 창세 1,26)이며, 진리와 관계의 능력을 지닌 존재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이성의 관계 문제는 부차적 항목이 아니라, 교육의 본질에 속합니다. “종교적 진리는 단지 지식의 일부가 아니라, 모든 인식의 조건이 됩니다.”(성 요한 헨리 뉴만, 대학의 이상 L’idea di Università, 2005, 76쪽)

이 말은, 이번 ‘세계 교육 희년’을 맞아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더불어 교회 교육 사명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선포된 성 요한 헨리 뉴만의 가르침입니다. 그분의 말은, 지성적으로 책임 있고 엄밀하며 동시에 깊이 인간적인 지식을 추구하려는 새로운 헌신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신앙(fides)이 이성(ratio)과만 짝을 이루는 계몽주의적 편향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날 인간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을 더 깊이 알아가려는 공감적 시선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가르침을 풍성히 하고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에서 욕망과 마음을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인간을 두 동강 내는 것이 됩니다. 가톨릭 학교와 대학교는 질문이 침묵 당하지 않는 곳이며, 의심이 금지되지 않고 동반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마음이 마음과 대화합니다. 교육의 방법은 타인을 위협이 아닌 선으로 인식하는 경청의 방식입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말한다(Cor ad cor loquitur)”가 성 요한 헨리 뉴만 추기경의 표어였습니다. 이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한 서간에서 영감을 얻은 말로,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풍성한 말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다.”

3.2. 교육은 희망의 행위이자,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열정입니다. 이는 인류의 미래 안에서 우리가 보는 약속의 표징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가톨릭 문화 교육부, 위 문헌 서문) 교육 행위의 고유성, 깊이, 그리고 폭넓음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30a–b)에 나오는 “존재를 꽃 피우는 일, 곧 영혼을 보살피는 일”이라는 말에서 신비로우면서도 실제적인 사명으로 잘 드러납니다.

교육은 전문적인 “약속의 과업”입니다. 교육 안에서 우리는 시간을 약속하고, 신뢰와 전문성을 약속하며, 정의와 자비를 약속하고, 진리의 용기와 위로의 향유(香油)를 약속합니다. 교육은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사랑의 과업입니다. 교육은 끊어진 관계의 실타래를 다시 잇고, 말에 약속의 중요성을 되돌려 줍니다. “모든 사람은 진리를 향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타인의 도움과 함께 걸어갈 때 훨씬 더 견디기 쉽습니다.”(로버트 프레보스트, 산토 토리비오 가톨릭 대학 강론, 2018년) 진리는 공동체 안에서 탐구됩니다.

4.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이라는 나침반

4.1. 공의회의 선언문 「Gravissimum educationis」는 모든 이가 교육받을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며, 가정이야말로 인류애의 첫 번째 학교임을 명시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신앙과 문화를 통합하고, 모든 이의 존엄성을 존중하며, 사회와의 대화 속에 살아 있는 교육 환경을 지탱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문헌은 교육을 단순히 기능적 훈련이나 경제적 도구로 축소시키려는 경향에 대해 경고합니다. 인간은 “스펙의 누적체(역량의 프로파일, profile of competences)”가 아니며, 예측 가능한 알고리즘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얼굴이며, 한 편의 이야기이고,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소명 자체입니다.

4.2. 그리스도교 교육은 인간 전체를 포괄합니다. 즉, 영적·지적·정서적·사회적·육체적 차원 모두를 아우릅니다. 그 안에서는 실기(實技)와 이론, 과학과 인문학, 기술과 양심이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문성은 윤리 안에 머물러야 하며, 윤리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매일의 실천이어야 합니다. 교육의 가치는 효율성의 축에서만 평가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존엄, 정의, 그리고 공동선을 위한 봉사의 능력 위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통합적 인간관이야말로 가톨릭 교육학의 중심축으로 남아야 합니다. 이는 성 요한 헨리 뉴만의 사상에 따라, 오늘날 교육을 기능성과 실용성의 관점으로만 재단하는 상업주의적 접근에 맞서는 길이기도 합니다.(참조. 헨리 뉴만, 대학에 관한 글, 2001년)

4.3. 이러한 원칙들은 과거의 추억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변함없는 별, 다시 말해 길을 잃지 않게 하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그 원칙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진리는 함께 찾는 것이며, 자유는 제 멋대로의 방종이 아니라 응답이고, 권위는 지배가 아니라 봉사라는 것을.

교육이라는 맥락 안에서 우리는 “문제에 대한 분석이나 해결책의 소유를 자랑하는 깃발을 높이 들어서는 안 됩니다.”(교황 레오 14세, 교황청 백 주년 기념 재단 관계자들과의 만남, 2025.05.17)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서둘러 답하려 하기보다, 가까이 다가설 줄 아는 법을 배우는 것”(바로 위 연설)입니다. 교육의 목적은, 매 세대가 새롭고, 새로운 도전과 꿈, 질문을 지닌 존재임을 기억하면서, 각기 다른 문제들을 함께 마주할 수 있는 법을 배우는 데 있습니다. 가톨릭 교육은 갈등과 두려움으로 상처 입은 세상 속에서 신뢰를 회복하려는 과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아가 아니라 자녀임을 기억하는 것, 바로 그 의식으로부터 형제애가 태어납니다.

5. 인간 중심

5.1. ‘인간을 중심에 둔다’는 것은, “하늘을 쳐다보아라.”(창세 15,5) 하였던 것처럼 멀리 보는 아브라함의 시선으로 교육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인간이 삶의 의미, 양도할 수 없는 존엄, 그리고 타인에 대한 책임을 발견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행위가 아니라, 덕의 수련(修鍊)입니다. 교육은 봉사할 줄 아는 시민, 증언할 줄 아는 신앙인, 그리고 더 자유롭고, 덜 고립된 인간을 길러냅니다. 그러한 양성은 결코 즉흥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칙라요(Chiclayo) 교구에서 지냈던 시절을 기쁘게 기억합니다. 그곳의 산 토리비오 데 모그로베호 가톨릭 대학교를 방문하며 대학 공동체에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전문가는 태어나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대학의 여정은 한 걸음 한 걸음, 한 권의 책에 또 한 권의 책, 한 해 한 해, 그리고 한 번의 희생 뒤에 또 다른 희생을 통해 세워지는 것입니다.”(2018년 해당 대학교에서 행한 강론)

5.2. 가톨릭 학교는 신앙과 문화와 삶이 서로 얽혀 있는 공간입니다. 이는 단순한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관점이 모든 학문과 관계를 스며들게 하는 살아 있는 환경입니다. 교육자는 단순히 고용계약에 따른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삶으로 보여주는 증언은 그가 전하는 강의만큼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교육자의 양성, 즉, 과학적·교육학적·문화적·영적 양성은 결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공동의 교육 사명을 나누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교육적 도전을 읽어내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공동의 양성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는 초기 양성과 지속적 양성, 그리고 지식의 확장과 학습에 대한 개방성, 방법론의 쇄신과 갱신, 나아가 영적·종교적 성숙과 공동체적 나눔을 포함합니다.(가톨릭 교육수사회, 가톨릭 학교에서 함께 교육하기 회람 서한, 2007년, 20항) 하지만 단순한 기술적 연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들을 줄 아는 마음, 격려할 줄 아는 시선, 분별할 줄 아는 지성을 간직하는 일입니다.

5.3. 첫 번째 교육의 장소는 여전히 가정입니다. 가톨릭 학교는 부모를 대신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육, 특히 신앙교육의 의무는 다른 누구보다 먼저 부모에게 속하기”(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48항) 때문입니다. 이러한 학교와 가정이 이루는 교육이라는 동맹은 의도적 노력, 경청, 그리고 공동책임을 필요로 합니다. 이는 함께 세워 가는 과정이며, 공유된 도구와 점검을 통한 협력의 길입니다. 이 일은 수고로우면서도 은총이 깃든 일입니다. 그 동맹이 잘 작동할 때는 신뢰를 낳지만, 그것이 무너질 때는 모든 것이 쉽게 흔들리고 약해집니다.

6. 정체성과 보조성

6.1.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은 이미 ‘보조성의 원리’의 중요성과, 각 지역 교회의 맥락에 따라 교육 여건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교육의 권리와 그 기초 원리들이 보편적으로 유효함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공의회는 부모와 국가 모두에게 부여된 책임을 강조하면서, 학생들이 바른 양심으로 도덕적 가치를 분별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의 제공을 “거룩한 권리”로 규정하였습니다.(해당 문헌 제1항) 따라서 공의회는 세속 권위가 이 권리를 존중해야 함을 요구하였습니다. 또한 공의회는 교육이 노동시장에의 종속이나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금융 논리에 종속되는 위험을 경계하였습니다. 교육은 결코 경제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 존엄과 자유를 위한 봉사여야 함을 주지한 것입니다.

6.2. 그리스도교 교육은 하나의 ‘코레오그래피(조화로운 안무按舞, 춤)’와 같습니다. 저의 사랑하올 전임자이신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리스본 세계청년대회에서 대학생들에게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을 중심에 두는 새로운 안무의 주역이 되십시오. 삶의 춤을 만들어가는 안무가가 되십시오.”(교황 프란치스코, 세계 청년 대회 연설, 2023.08.03) ‘온전한 인간’을 형성한다는 것은, 인간을 여러 조각난 부분으로 나누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단지 교육의 한 “과목”이 아니라, 모든 학문과 지식을 숨 쉬게 하는 산소입니다. 이와 같이 가톨릭 교육은 인간 공동체 안에서 누룩처럼 작용합니다. 상호성을 낳고, 편협한 시야를 넘어, 사회적 책임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시대의 질문들 속을 살아가면서도 그 근원(원천源泉)을 잃지 않는, ‘통합적 인본주의’를 과감히 실천하는 것입니다.

7. 창조 관상

7.1. 그리스도교적 인간학은 존중과 개별적 동반, 식별, 그리고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의 성장을 촉진하는 교육적 삶의 방식이라는 기초 위에 놓여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서 결코 부차적인 것이 아닌 한 가지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영적 호흡, 즉 창조 세계를 관상함으로써 이루어지고 강화되는 영성적 차원입니다. 이 주제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철학과 신학의 전통 안에서, 자연에 대한 연구는 언제나 이 세상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흔적( vestigia Dei)을 발견하려는 시도와 함께 이루어져 왔습니다. 바뇨레조의 성 보나벤투라는 「창조 6일에 관한 강론집(Collationes in Hexaemeron)」에서 다음과 같이 씁니다: “세상 전체는 그림자이며, 길이며, 자취이다. 그것은 ‘눈으로 보는 두루마리’(참조. 에제 2,9)이다. 모든 피조물 안에는 신적 본형(本形)의 반영이 있으나, 그것은 어둠과 뒤섞여 있다. 그러므로 세상은 빛과 어둠이 섞인 길과 같으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길’이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한 줄기 빛이 각기 다른 유리의 색에 따라 다르게 물드는 것처럼, 신적 광선도 각 피조물 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반사되어, 다양한 특성을 지닌다.”(성 보나벤투라, 창조 6일에 관한 강론집, 제12권)

이와 같은 관점은 각 사람의 성격과 재능에 맞게 조율된 교육의 유연성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그 모든 다양성은 결국 창조의 아름다움과 그 보전의 소명으로 수렴됩니다. 이러한 교육은 또한 “지혜와 창의성으로 실천되는 학문적 경계를 넘나드는 학제간, 그리고 학문적 경계를 뛰어넘는 초학제적 접근”을 필요로 합니다.(참조. 교황 프란치스코, 진리의 기쁨, 2017년, 제4항)

7.2. 우리의 공동 인간성을 잊어버린 결과, 세상은 깊은 분열과 폭력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땅이 고통받을 때, 가난한 이들이 가장 먼저, 가장 깊이 고통을 받습니다. 가톨릭 교육은 이 사실 앞에서 침묵할 수 없습니다. 가톨릭 교육은 사회 정의와 생태 정의를 결합하고, 절제와 지속 가능한 삶의 방식을 촉진하며, 편리함이 아니라 정의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양심을 길러야 합니다. 낭비를 피하고, 책임 있는 소비를 선택하며, 공동선을 수호하는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이미 문화적‧도덕적 문해(文解)의 행위이자, 인간 존엄을 배우는 길이 됩니다.

7.3. 생태적 책임은 단순히 기술적 지식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머리와 마음, 그리고 손이 함께 참여하는 교육, 곧 새로운 습관과 공동체적 삶의 방식, 그리고 덕스러운 실천이 필요합니다.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것은 폭력을 거부하는 온유한 힘입니다. 따라서 평화에 대한 교육은 “무장하지 않고, 또 무장을 풀게 하는 교육”(교황 레오 14세, 피선 뒤 행한 연설, 2025.05.08)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교육은 공격적인 말과 판단하는 시선의 무기를 내려놓고, 대신 자비와 화해한 정의의 언어를 배우도록 이끕니다. 그곳에서 사람은 서로를 적이 아닌 형제로 바라보는 눈을 배우게 됩니다.

8. 교육이라는 별자리

8.1. “별자리”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가톨릭 교육의 세계가 살아 있고 다채로운 하나의 그물망이기 때문입니다. 본당 학교와 기숙학교, 대학교와 고등 교육 기관, 직업 교육 센터, 여러 운동 단체들, 디지털 플랫폼, 봉사학습과 학교·대학·문화 사목의 다양한 활동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각 “별”은 저마다 고유한 빛을 발하지만, 이 모든 별이 함께 하나의 항로를 그려냅니다. 과거에 경쟁이 있던 곳에서도, 이제 우리는 모든 교육 기관이 서로 협력하도록 요청합니다. 일치는 우리의 가장 예언적인 힘이기 때문입니다.

8.2. 방법과 구조의 차이는 부담이 아니라 자원이요, 은총입니다. 다양한 카리스마가 잘 조율될 때, 그것은 일관되고 풍성한 하나의 전체를 이룹니다. 서로 긴밀히 연결된 오늘의 세계에서, 우리는 지역적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두 무대에서 활동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교사와 학생 간의 교류, 대륙 간 공동 프로젝트, 모범 사례의 상호 인정, 선교적·학문적 협력 등이 필요합니다. 미래는 우리에게 더 많이 협력하고, 함께 성장하라고 요구합니다.

8.3. 별자리는 그 빛을 무한한 우주 속에 반사합니다. 만약 그것을 만화경처럼 본다면, 색들이 서로 얽혀 새로운 빛깔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 교육 기관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시민 사회, 정치적·행정적 권위, 산업과 노동 분야의 대표들과의 만남과 경청을 통해 더 넓은 대화의 장으로 열려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주체들과 더욱 적극적으로 협력함으로써, 이론이 실제 경험과 실천으로 뒷받침되는 교육 여정을 함께 나누고 개선해야 합니다.

또한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가톨릭 교육 기관들은 비신자나 다른 종교를 가진 학생과 가정도 기꺼이 받아들여 왔으며, 그들 또한 “진정으로 인간적인 교육”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여러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듯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참여적 교육 공동체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 안에서 평신도, 수도자, 가정, 학생들이 공적·사적 기관들과 함께 교육 사명에 대한 공동책임을 나누어야 합니다.

9. 새로운 공간을 항해하며

9.1. 60년 전, 「Gravissimum educationis」는 새로운 신뢰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 문헌은 교육 방법과 언어의 쇄신을 장려했습니다. 오늘날, 그 신뢰는 디지털 환경이라는 새로운 도전 속에서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기술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해야 하며, 학습 과정을 풍요롭게 해야지 관계와 공동체를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비전이 없는 가톨릭 학교와 대학은 영혼 없는 효율주의에 빠지고, 획일화된 지식으로 인해 결국 영적 빈곤에 이르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9.2. 이러한 새로운 공간 속에서 살아가려면 사목적 창의성이 필요합니다. 교사들의 디지털 역량을 강화하고, 참여적 교수법을 중시하며, 봉사 학습(service-learning)과 책임 있는 시민 의식을 증진해야 합니다. 동시에 기술에 대한 두려움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기술 발전은 본질적으로 하느님 창조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신앙 교리와 문화교육부, 「옛것과 새것」, 2025.01.28.) 그러나 우리는 교육 설계, 평가 방식, 플랫폼 선택, 데이터 보호, 공정한 접근성 등과 관련하여 깊은 식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 어떤 알고리즘도 결코 인간 교육의 본질 – 시와 유머, 사랑과 예술, 상상력, 발견의 기쁨, 그리고 심지어는 실수를 통한 성장의 배움 – 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9.3. 결정적인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사용 방식입니다. 인공지능과 디지털 환경은 인간의 존엄, 정의, 노동의 보호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들은 공공 윤리와 참여의 기준으로 관리되어야 하며, 이에 걸맞은 신학적·철학적 성찰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가톨릭 대학들은 여기서 특별한 사명을 지닙니다. 그것은 바로 ‘문화의 나눔(diaconia della cultura)’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더 많은 강의석보다, 사람들이 함께 앉아 대화할 공동의 테이블을 마련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위계가 아닌, 역사의 상처를 손으로 어루만지고, 성령 안에서 민중의 삶에서 솟아나는 지혜를 함께 탐구하는 자리여야 합니다.

10. 교육 협약이라는 북극성

10.1. 우리의 여정을 이끄는 별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세계 교육 협약(Patto Educativo Globale)’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예언적 유산을 감사히 이어받습니다. 그것은 보편적 형제애를 위한 교육의 연대와 협력을 요청하는 초대입니다. 이 협약이 제시한 일곱 가지 여정은 여전히 우리의 기반으로 남아 있습니다: 인간을 중심에 두기, 어린이와 젊은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여성의 존엄과 온전한 참여 증진, 가정을 첫 번째 교육자로 인정하기, 환대와 포용의 정신으로 마음 열기, 인간을 위한 경제와 정치를 새롭게 하기, 공동의 집(지구)을 돌보기. 이러한 “별들”은 전 세계의 학교, 대학, 교육 공동체에 영감을 주어, 구체적인 인간화의 과정을 낳고 있습니다.

10.2. 「Gravissimum educationis」 반포 60년 후, 그리고 세계 교육 협약이 제정된 지 5년이 지난 오늘, 역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긴박함으로 말을 걸고 있습니다. 급격하고 깊은 변화들은 어린이, 청소년, 젊은이들을 그 어느 때보다 취약한 현실로 내몰고 있습니다. 단순히 보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 이제는 새로운 출발이 필요합니다. 저는 모든 교육 공동체에 요청합니다. 지식과 의미, 역량과 책임, 믿음과 삶을 다시 하나로 엮어, 새로운 세대의 마음에 다가가는 시대의 교육을 시작합시다. 이 협약은 더 큰 틀의 ‘세계적 교육 별자리’의 일부입니다. 다양한 카리스마와 제도들이 비록 서로 다를지라도, 하나의 빛나는 도안을 이루며 오늘의 어둠 속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빛이 됩니다.

10.3. 이 일곱 가지 길 위에 저는 세 가지 우선 과제를 덧붙이고자 합니다. 첫째, 내적 삶(영성)에 관한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깊이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침묵과 식별, 양심과 하느님과의 대화의 공간이 필요합니다. 둘째, 인간적인 디지털 세계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술과 인공지능을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알고리즘보다 인간을 먼저 두고, 기술적・정서적・사회적・영적・생태적 지성을 조화롭게 길러야 합니다. 셋째, 무장해제와 무장을 거부하는 평화(disarmata e disarmante)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비폭력적 언어, 화해, 다리를 놓는 마음(장벽이 아닌)을 가르쳐야 합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9)는 복음의 말씀이,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배움의 방식과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10.4. 가톨릭 교육 네트워크는 유일무이한 연결망과 현장성을 지닌 공동체입니다. 이 별자리는 전 세계 모든 대륙에 뻗어 있으며, 특히 저소득 지역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참조. 교회 연례 통계, 2022.12.31) 그것은 교육적 이동성과 사회 정의의 구체적인 약속입니다. 이 별자리는 질적 탁월함과 용기를 요구합니다. 교육 설계, 교사 양성, 거버넌스의 질적 향상, 가난한 이들에게 접근의 문을 여는 용기, 취약한 가정을 지원하고, 장학금 제도와 포용적 정책을 추진하는 용기. 복음적 ‘무상성(gratuità)’은 단순한 이상이나 수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관계의 방식이자, 교육의 방법이며, 목표입니다. 교육의 문이 여전히 특권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곳이라면, 교회는 그 문을 밀고 나아가야 합니다.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이들을 잃는 것’은 곧 ‘학교 자체를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는 대학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포용적 시선과 마음의 돌봄은 획일화로부터 구원하며, 봉사의 정신이 상상력을 되살리고, 사랑의 불을 다시 지핍니다.

11. 새로운 희망의 지도

11.1. 「Gravissimum educationis」 반포 60주년을 맞이하여, 교회는 풍요로운 교육의 역사를 기념함과 동시에, 시대의 징표들에 비추어 그 교육적 제안을 새롭게 해야 할 긴급한 과제 앞에 서 있습니다. 가톨릭 교육의 ‘별자리(교육 공동체 네트워크)’는 전통과 미래가 모순 없이 맞물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영감 어린 상징입니다. 그것은 과거에 머무는 유산이 아니라, 살아 있는 전통으로서 새로운 형태의 현존과 봉사로 뻗어나가는 생명력입니다.

이 별자리들은 단지 서로 다른 경험들이 병렬된 평면적 연결망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슬’이 아니라 ‘별자리’로 상상해야 합니다. 경이와 깨어남으로 가득 찬 빛의 얽힘으로서 말입니다. 그 안에는 희망으로 도전을 항해하는 능력, 그러면서도 복음에 대한 충실함을 잃지 않은 채 용기 있는 쇄신을 감행하는 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여정이 쉽지 않음을 압니다. 과도한 디지털화는 집중력의 파편화를 초래하고, 관계의 위기는 인간의 마음과 정신을 상하게 하며, 사회적 불안과 불평등은 의욕과 열망을 사그라뜨립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가톨릭 교육은 하나의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과거로 도피하는 향수의 피난처가 아니라, 식별의 실험실이며, 교육적 창의성과 예언적 증언의 장으로서 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급한 사명은 분명 “새로운 희망의 지도를 그리는 것”입니다.

11.2. 저는 모든 교육 공동체에 다음과 같이 청합니다: 말을 무장 해제하고, 시선을 들어 올리며, 마음을 지키십시오. 말을 무장 해제하십시오. 교육은 논쟁이나 대립으로 전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청하는 온유함으로 성장합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보아라.”(창세 15,5) 하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신 말씀처럼, 시선을 들어 올리십시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그 길을 가고 있는가?”라고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면서 여러분의 마음을 지키십시오. 관계가 의견보다 먼저이고, 사람이 프로그램보다 앞섭니다.

시간과 기회를 낭비하지 마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인용하자면, “현재란 우리가 살아가는 ‘직관의 시간’이며, 손에서 빠져나가기 전에 반드시 붙들어야 할 시간”(로버트 프레보스트, 산토 토리비오 데 몬그로베호 대학 설립 28주년에 붙여, 2016) 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끝으로 저 또한 사도 바오로의 권고를 마음에 새기고자 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필리 2,15-16)

11.3. 이 여정을 지혜의 좌(座)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聖人 교육자들의 손에 맡깁니다. 주교들과 수도자들, 평신도 지도자들, 교육 기관의 책임자들, 교사들, 그리고 학생들에게 부탁합니다: 교육적인 세상의 일꾼, 희망의 안무가, 끊임없는 지혜의 탐구자, 진정한 아름다움의 장인이 되어 주십시오. 꼬리표는 줄이고 이야기는 늘이며, 무의미한 반대는 줄이고 성령 안의 조화를 더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별자리는 단지 빛이 나는 것뿐 아니라,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길(참조. 요한 8,32), 정의를 굳건히 하는 형제애의 길(참조. 마태 23,8),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희망의 길(참조. 로마 5,5)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성 베드로 대성전, 2025년 10월 27일

「Gravissimum educationis」 반포 60주년 전야에

교황 레오 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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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어 원문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물론 다른 언어판들도 있다):

https://www.vatican.va/content/leo-xiv/it/apost_letters/documents/20251027-disegnare-nuove-m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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