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권
인간세대의 역사와 하느님 사랑의 천상적인 탄생
제1장
하느님의 완전성은 유일하고 무한히 완전한 것일 수밖에 없다
해가 뜰 때, 아침 노을이 붉게 물들다가 조금 후 즉시 어둡게 움푹 파인 듯 보이거나 해질 때, 어둠침침하고 흐려 날이 꾸물거리면 비가 올 징조라고들 흔히 말한다. 테오티모여, 태양은 붉지도 검지도 않고 회색도 아니며 푸르지도 않다. 저 거대한 광모(光母)와도 같은 빛나는 태양은 색깔의 변천이나 바뀜에 예속된 것이 아니다. 기적이 나지 않는 한, 이 태양 빛은 가장 밝고 영구한 것으로 언제까지나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위와 같이 말하는 것은, 태양과 우리 사이에 가로 놓인 다양한 수증기에 따라서, 태양이 여러 가지로 보이는 까닭이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하느님께 대해서도 추리를 한다. 즉 하느님의 실체를 따라서가 아니라 흔히 하느님의 업적을 따라 우리는 그를 관상하고 그것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다양한 관찰을 따라 우리는 하느님을 다양하게 부르며, 마치 하느님께서는 상이한 여러 가지 탁월성과 완전성들을 아주 많이 가지시기나 한 듯이 말하기조차 한다. 하느님께서 악인을 징벌하심을 보고 우리는 의로우신 분이라고 여긴다. 또 죄인들을 그 비참에서 구원하시면 우리는 그를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외친다. 만물을 조성하시고 갖가지 기묘한 것을 많이 만드신 것을 보고 우리는 그를 전능하신 분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 당신의 약속을 꼭 지키시고 채워주심을 보면 진실하신 분이라고 한다. 만물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하심을 보고 우리는 그를 가장 지혜로운 분이라고 일컫는다. 또 이와같이 하느님의 갖가지 모든 업적을 따라 끊임없이 우리는 그분을 대단히 큰 다양성과 각가지 완전성을 모두 다 지니신 분으로 여긴다.
그러나 모든 시대에 걸쳐 하느님 안에는 아무런 다양성도, 상이한 완전성도 없었다. 하느님은 그냥 그대로 하느님이실 따름이고 하나이시고 지극히 유일하시며 가장 단순하시고 절대로 나누일 수 없는 유일무이한 완전한 분이실 따름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오로지 하느님 자신뿐이며, 우리가 말하는바, 그분 안에 있는 모든 갖가지 다양한 탁월성은 실제로 가장 단순하고 유일한, 순수한 단일성 안에 존재한다. 그래서 마치 태양이 우리가 말하듯 여러 색깔을 가지고 있지 않듯이, 또 그래서 모든 색깔을 일체 초월한 가장 밝은 빛으로써 모든 채색에 제 나름의 빛을 주고 있듯이, 하느님께 있어서도 우리가 상상하는 여러 가지 완전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유일하고 가장 순수한 탁월성만 있을 따름이니, 이 탁월성은 모든 완전성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완전한 모든 것에 그 완전성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 최상의 탁월성을 가장 완전히 표현하는 이름을 하나 찾아내야 하는데, 이 탁월성은 자체 내의 가장 단일한 단일성 안에 다른 모든 탁월성들을 내포하는 것이어서 인간이건 천신이건 간에 그 어떤 피조물이 그 탁월성을 호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묵시록에도 “그분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 그분 몸에 적혀 있습니다.”(묵시 19,12)라고 하였다.
당신만이 오직 무한하고 유일한 완전성을 가장 완전히 인식하실 뿐이며, 당신만이 오직 당신에게 적합한 이름을 생각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으므로, 옛사람들은 하느님 외에는 진정한 신학자가 아무도 없다 하였으니, 하느님만이 그 무한한 완전성을 완전히 알 수 있으며, 결국 다른 아무도 말로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 이름을 묻는 삼손의 아버지에게 천사를 통해 대답하시기를 “내 이름은 무엇 때문에 물어보느냐? 그것은 신비한 것이다.”(판관 13,18)라고 하였다. 하느님께서 비록, “내 이름은 신비한 것이다.”라고 하셨을지라도 결코 피조물에 의해 불리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이름은 흠숭을 받아야 하지만 이해될 수는 없으며, 다만 당신만이 이해할 수 있을 뿐이고, 당신만이 그 본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으니, 참으로 생명을 주는 일에까지 그 이름으로써 그 탁월성을 표현할 따름인 것이다.
우리의 사고력은 너무나 미약하여 그처럼 광대무변한 탁월성을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을 형성하지 못하니, 이 탁월성은 매우 단순하고 유일한 완전성 안에 다른 모든 완전성을 낱낱이 또 완전히, 더구나 무한히 탁월한 방법으로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력은 도저히 거기 미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께 대하여 어차피 어떤 방법으로든지 간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만 한다. 위대한 명칭들을 전부 나열하여 가면서라도 즉, 하느님은 착하시고, 지혜로우시고, 전능하시고, 참되시고,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무한하시고, 불사불멸하시고, 무형하시며…….
물론 이것은 하느님께 해당하는 참된 말이니, 하느님은 그러한 모든 것을 초월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즉 하느님은 아주 순수하고 탁월하고 고상한 방법으로써 이 모든 것을 내포하고 계시며, 가장 단순한 완전성 안에서 그는 능력과 힘과 모든 완전성의 탁월함을 포함하고 계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나(manna)는 한 가지 음식이었지만 그 안에 모든 음식의 맛과 영양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참조. 지혜 16,20) 그래서 레몬과 수박과 포도와 오얏과 배 같은 모든 맛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오히려 더 옳게 말한다면, 그 만나는 그런 모든 맛을 다 지닌 것이 아니라 다만 독특한 한 가지 맛, 말하자면 그 독특한 다른 여러 맛이 지니는 맛스러움을 낱낱이 하나로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도데카테오dodecatheos라는 약초와 비슷하다.(Plinius의 Nat. Hist. 25장 4절) 플리니우스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만병통치”의 약이라는데, 장군풀(rehubarbe)이나 센나풀(sene)이나, 장미나 소린경(clove)이나 지치(buglosse)도 아닌 단순한 것인데, 그 안에는 다른 여러 약초들이 지닌 효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오! 하느님의 완전성의 깊은 심연이여! 당신은 얼마나 경탄할만하시옵니까? 오로지 한가지 완전성에 모든 완전성을 다 내포하고 계시오며, 그것도 당신 외에는 아무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탁월한 방법으로 소유하고 계시나이다.
성경에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리 많은 말로 이야기해도 미치지 못하니 ‘그분은 전부이시다.’ 할 수밖에 없다.”(집회 43,27) 한다. 그 전능하신 분이 직접 당신의 모든 업적 위에 임하여 계시니, 그를 영광스럽게 해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아직 더 해드릴 필요가 있으리오? 주께서는 두려운 분이시고 엄청나게 위대하신 분이시며 그의 전능은 경탄할만하도다! 주께서 보다 더 특출나시고 그의 장대壯大함은 기묘하시니, 그대는 주께 영광을 돌릴지어다. 주를 찬미하면서, 그대가 할 수 있는 한껏 그를 드높일지어다.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그분을 높이 받들어라. 아무리 높이 받들어도 그분께서는 그보다 더 높으시다. 그분을 높이 받들 때 네 온 힘을 다하고 지치지 마라. 아무리 찬미하여도 결코 다하지 못한다.”(집회 43,30)
테오티모여, 결코 우리는 하느님을 충분히 파악할 수가 없으니, 성 요한의 말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3,20) 그러니만큼, 모든 정신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그분 이름 홀로 높으시도다.”(시편 148,13) 하고 주님을 칭송하되, 더없이 위대한 이름으로써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크게 그를 찬양한다고 하더라도, 충분한 찬양을 받으셨다고 할 수 없는 분임을 고백하자! 따라서 아무리 가장 탁월한 이름 일지라도, 그분의 이름은 모든 이름을 초월하시므로, 결단코 우리는 합당한 명칭을 그분께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