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0주일 ‘다’해(루카 18,9-14)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18,14)

지난주 ‘재판관의 비유’에 이어지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루카 18,9-14)인 오늘 복음은 루카만이 전한다. 루카 복음사가는 자신의 복음 제18장에 이렇게 두 개의 비유로 ‘그리스도인의 기도’에 관한 내용을 담는다. 전자가 그리스도인의 기도 생활에서 ‘끊임없이 항구한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라면, 후자는 ‘겸손한 기도’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두 비유가 맞닿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니 겸손한 기도는 항구한 기도일 수밖에 없고, 항구한 기도 역시 겸손한 기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부의 비유가 ‘언제’ 기도할 것인가에 관하여 “끊임없이”라는 답이라면,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는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에 대한 ‘바리사이처럼 말고 세리처럼’이라는 답이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기도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둘의 태도를 통해서 기도에 관한 지평을 훨씬 더 넓게 확장하신다. 기도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고, 우리가 사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며, 우리가 하느님과 이웃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함께 읽기: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https://benjikim.com/?p=15866

1.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비유의 시작에 앞서 루카 복음사가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루카 18,9)라는 구절을 기록한다. 자기들이 의롭다고 확신하고(참조. 루카 5,32;15,7), 또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면서(참조. 루카 10,29;16,15)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들, 이러한 종교인들은 진정으로 의로운 이들이 아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율법이나 계명을 성실하게 다 지킨다고 생각하고 살다 보면 자칫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은총에 기댈 것이 도무지 없어서 자기 자신을 믿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만다. 이러한 태도는 필시 타인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결과를 낳고야 만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를 믿는 분으로서 종교의 이러한 위험성을 잘 아셨고, 참된 믿음을 지니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 역시 잘 아셨다. 그런 이유로 세례자 요한은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루카 3,8)라고 말한 바 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섬긴답시고 만들어놓은 장벽이 하느님을 위한 장벽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아신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신자, 자신이 만들어놓은 우상을 섬기면서 믿음이라고 착각하며 고집스럽게 사는 신자, 믿음을 산다고 하면서도 불신을 사는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아신다.

본격적인 비유의 시작은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루카 18,10)라는 구절이다. “성전”은 토라, 곧 말씀과 율법에 따라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이다. 두 사람 모두 사제들에게만 허락된 지성소 앞에 있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허락된 자리에 들어서 있다. 두 사람 모두 하느님께서 당신 거처로 삼기로 하신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을 부르면서 주님께서 모세에게 당신 얼굴을 보여주셨듯이 자신들에게도 주님의 얼굴을 보여주시라고 청한다. 그렇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공통된 점은 여기까지이다. 둘 중 하나는 열성적인 “바리사이” 투사이고, 다른 한 사람은 부패한 범주에 속하면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욕을 먹고 멸시받는 공공의 적敵인 “세리”였다. “세리”는 당시 공공연하게 죄인이고 부패한 자로 낙인이 찍힌 사람으로서 하느님과 인간 사회로부터 저주를 받은 무리에 속했다.

2. “바리사이는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자기가 하느님의 기대에 부응한 존재임을 스스로 느끼면서 기도하는 유다인의 본분을 의식하면서) 혼잣말로 이렇게 (감사의 기도로) 기도하였다. ‘,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루카 18,11-12) 바리사이는 자신의 행실에 스스로 만족하면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고 판단한다. 하느님 앞에 “꼿꼿이 서서…감사”를 드리고 있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당당하고 이에 관해 일말의 의심도 없다. 그렇지만 그의 기도가 아닌 독백은 다른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을 뿐아니라 하느님에게서도 멀리 떨어져 있고, 자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없으며, 자신의 말에 하느님께서 오직 “아멘!”이라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두고 『바리사이는 성전에 기도하러 간 것이 아니라 자신을 칭송하러 갔습니다.』라고 평한다. 그의 기도 아닌 기도에서는 하느님과의 관계 설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그에게 믿음은 특권이고, 율법의 준수는 타인에 대하여 우월감을 느낄 수 있도록 보장을 받기 위한 도덕적 조건일 뿐이다.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를 나무라시듯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의 선행이나 행실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자기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하느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이 잘못되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의 문제는 그가 스스로 바르고 건강한 의인이라고 생각하여 의사가 필요 없으며 하느님의 은총이나 거룩하심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참조. 루카 5,31-32) “의인은 일곱 번(무한하게) 쓰러져도…”(잠언 24,16)라고 하듯이 바리사이는 성경에서 인간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죄에 떨어지고 쓰러진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음을 잊었다. 많은 사람이 바리사이처럼 그저 그런대로 특별한 잘못이 없이 대충 잘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을 과신하면서, 자신은 올바르니 하느님의 자비를 청할 만큼은 아니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거나 자위하고, 따라서 타인을 두고는 왜 저렇게 살아가는지 한심하다면서 타인을 판단한다. 바리사이는 이런 마음으로 타인의 죄를 열거하고 자기는 그런 상황(“강도, 불의, 간음, 저 세리”)에서 제외되어 있다고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바리사이의 기도 앞에 이제 공공연하게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세리의 기도가 펼쳐진다. 루카복음의 서두에서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를 당신의 첫 번째 제자로 삼으셨으며, “레위”는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러한 행적이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 사이에 큰 물의를 빚게 된 적이 있다.(참조. 루카 5,27-32) 루카복음의 말미라고 할 수 있는 대목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다시 다른 세리이자 “세관장이고 또 부자”인 자캐오를 만나시고, 자캐오는 “돌무화과나무”에서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자기 집에)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의롭다고 자처하는 종교인들과 같은) 사람들은…투덜거렸다.”(루카 19,1-10 참조) 루카복음은 이렇게 세례자 요한의 선포인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와 함께 ‘죄·죄인’이라는 주제로 복음을 시작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라는 주제로 복음 전체를 관통하며 복음을 기록한다. 이러한 주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십자가에 달린 “두 죄수”와 예수님의 “죄명 패”(참조. 루카 23,32-42)에서 절정을 이루고, 예수님의 삶과 행적 안에서 온전히 완성된다.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이나 백성의 원로들을 비롯하여 소위 종교 지도층이라는 이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왜 그렇게 죄인의 무리에게 다가가시고 그들을 더 선호하신 것일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거나 그들이 짓는 죄가 아름답다는 것을 설파하시고자 함이 아니라, 소외되고 죄인으로 판단 받아 낙인찍힌 그들의 모습이 인간 자체의 모습을 드러내 주는 표징이기 때문이었다. 설령 아무리 보이지 않게 죄를 지었더라도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예수님께서는 공공연한 죄인들은 타인의 비난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런 까닭에 자기 삶을 바꾸려는 간절한 욕구를 내심 지니고 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 하나를 알고 계셨다. 그러한 죄인들은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죄 때문에 겸손하게 굴욕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고, 따라서 “부서지고 꺾인 마음”(시편 51,19)을 지녀 그 마음의 힘이 삶을 바꾸도록 밀어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3. “세리는

“세리”는 자신의 행실로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람이고, 오히려 모든 이로부터 공공연하게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다. 이런 이유로 낯을 들고 다닐 수 없으며 스스로 죄인이라는 자괴감에 한숨 짓는 세리가 기도라도 하면서 하느님의 용서를 구걸하려고 성전에 올라간다. 루카는 바리사이와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을 세리의 모습을 바리사이와는 정확하게 반대로 묘사한다. 세리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지성소에 가까이 갈 수 없다는 죄책감에) 멀찍이 서서 (부끄러움에)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려) (전통적인 뉘우침의 표시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밑에서 군중이 그러했던 것처럼-참조. 루카 23,48)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한다.

세리의 말은 짧다. 그렇지만 “내 지은 죄악이 크고 크올지라도, 주여, 당신 이름 보시와 용서하소서.…당신의 면전에서 날 내치지 마옵시고, 당신의 거룩한 얼을 거두지 마옵소서.”(시편 24,11;50,13 등등-최민순 역) 하면서 시편에서 반복되는 기도문이다. 죄인인 인간에게 하염없는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는 기도이다. “겸손한 이의 기도는 구름을 거쳐서 그분께 도달하기까지 위로를 마다한다.”(집회 35,21) 말한 그대로 ‘구름을 뚫는 기도’이다.

말은 많지 않아도 하느님과 자신,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염두에 둔 기도이다. 이러한 기도는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다른 이와 연결된 연대連帶를 살고자 하는 기도이다. 하느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고 자랑할 것이 없어 세 번 거룩하신 하느님께 그저 자비를 간청하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베드로가 부르심을 받자마자 거룩하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4,8 참조. 이사 6,5-이사야의 부르심) 하던 기도이다. 세리의 겸손은 굳이 겸손하여지려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겸손이 아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겸손할 수밖에 없는 죄스러운 처지를 그대로 그냥 드러내는 겸손이다. 자신에게는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어서 하느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겸손이다.

이러한 내용은 나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나 자신이 도무지 존재할 가치도 없이 비어서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일하시도록 하느님께 열린 자유 공간이 되는 나여야 한다. 자기로 가득 찬 곳에 하느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공간은 없다. 바리사이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를 잘 살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기도와 그의 의로운 행동들을 판단하시지 않은 것처럼 세리의 삶이나 행동 역시 판단하지 않으신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하느님의 판단에 의해)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하심으로써 바리사이는 스스로 높아져 낮아지는 판단을 받았고, 세리는 스스로 낮아져 높아지는 판단을 받았다고 하시면서 자신들의 행위가 그대로 하느님의 판단이 되어 자신을 판단한다고 하신다.

비유의 끝 절인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하신 예수님의 이 격언과 같은 말씀은 이미 앞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혼인 잔치”에 빗대어서 하신 비유 말씀의 끝 절에서도 등장한다. 내용으로 보아 이 말씀은 “비천한 이들을 높이셨으며…”(루카 1,52) 하는 ‘성모님의 찬가’와 맥락을 같이한다. 도대체 이 ‘높임’과 ‘낮춤’은 무슨 말씀일까? 어찌 보면 실체가 손에 잡히지 않고 상당히 모호하다고 할 수 있는 ‘겸손’이라는 미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겸손은 ‘제가 미소한 자입니다’ 하는 식의 그럴듯하게 내세우는 거짓 낮춤이 아니다. 거짓 겸손으로 낮추어진 겸손, 교만하게 낮추어진 겸손은 바리사이의 겸손이어서 하느님께서 높이시지 않는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며, 다른 이들의 손가락질이나 업신여김을 견디면서까지 오히려 이를 자신을 고칠 수 있는 약으로 삼아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은총과 자비만이 자신의 나약함을 고쳐주시리라고 기다리며 인내하는 이가 하느님께서 높이실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고쳐 주시고 낫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므로 우리도 세리처럼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밖에 있는 이들을 수상쩍은 눈으로 살피거나 죄를 골라 지적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하시고,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9) 하는 말씀처럼 우리의 가련한 처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세리는 하느님과 다른 이들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고, 하느님만이 은총과 자비로 자신을 돌보아주실 수 있다고 믿으며, 그 자비와 은총이 필요하다면서 하느님께서 당신 마음대로 자기를 판단하시라고 자신을 내어 놓는다. 세리는 이처럼 자신을 다른 이들과 분리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과 통교하는 짧고 단순한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얻고 의롭게 되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시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따라 의인이 죄인 되고, 죄인이 의인 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의 정의는 인간의 정의와 배치된다. 자기가 멀리 있고 떨어진 존재라고 믿었던 이가 예수님 곁에 가까이 있게 되고 구원을 받으며, 스스로 가까이 있고 이미 인정받은 존재라고 생각한 이가 예수님 곁에서 멀리 있게 되고 구원을 잃는다.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은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며, 수치스러운 존재일 뿐이고 걸림돌과도 같은 존재로 느끼며 살아가면서도 예수님의 은총과 자비의 호흡을 간절히 믿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진정 ‘복음’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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