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죄罪

(Homo incurvatus in se)

성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죄”의 본질은 하느님을 향해 열린 존재여야 마땅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로 굽어지고 휘어져 자아중심적으로 왜곡되어 있는 상태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본성이 진정한 자아가 아닌, 하느님 계시는 곳이 아닌,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 곧 자기 중심, 내향적 폐쇄, 자기 갇힘 상태로 설정되어있는 것으로 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죄 이해를 바탕으로 훗날 이른바 “Homo incurvatus in se.”라는 신학적 개념이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 정형화된다.(*「Incurvatus in se is a theological phrase describing a life lived ‘inward’ for oneself rather than ‘outward’ for God and others.(위키백과) 「루터는 이 개념을 그의 <로마서 강해(Lectures on Romans)>에서 강조한다.(Mockingbird)」 (※함께 읽기. 힘써라 https://benjikim.com/?p=15218)

“incurvatus in se”라는 개념을 영어로 옮기면, 대개 ‘자신에게로 휘어져 있음(curved inward on oneself, curved in on the self)’ / ‘자신에게로 돌아서 있음(turned in upon oneself)’ / ‘자신에게로 굽어져 있음(bent inward toward oneself)’ / ‘자신에게로 돌아서 있는 상태(the state of being turned inward upon oneself)’ / ‘자기 내면 자기중심으로 돌아서 있는 인간 본성(humanity’s self-centered turning inward)’ 등이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5, 17-19)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읽다 보면, 바오로 사도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죄 이해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강조점이 다르다. 바오로 사도는 율법 아래의 인간이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는 내적 분열 상태에 있음을 묘사하면서 은총의 절대적 필요를 강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에 더하여 그 분열의 근원으로서 ‘사랑의 방향성’이 왜곡되어 있음에 주목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를 때, 죄는 하느님과 이웃을 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갇혀 있는 것이다. 죄는 단순히 규칙이나 계율을 어기는 것뿐만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야만 하는 인간의 창조 목적을 거부하고 자기중심적인 폐쇄, 자기 안에 자기 스스로 갇히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도 죄에 기울어지고 휘어진 자신을 힘주어 묘사한다. 하느님의 자리인 마음이 본래 하느님께서 지으신 대로가 아니라 다른 것들에 사로잡혀 있어 엉뚱한 것에 사로잡혀 있거나, 대체되어 있으며, 기울어져 있고, 하느님께서 지으신 본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를 엿볼 수 있는 몇 대목이다. *<고백록>의 번역 인용은 성염 선생께서 번역하신 경세원, 2016년 판을 따랐다:

1) 배나무 절도: 「오, 나의 도둑질, 내 나이 열여섯 살에 밤중에 저지른 나의 저 죄악이여, 가련한 내가 너 안에서 좋아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더냐? 네가 도둑질인 이상 아름다운 짓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너에게 걸만한 다른 무엇이더냐?

저희가 훔친 그 과일은 아름다웠습니다. 만유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이여, 만물의 창조주시여, 선하신 하느님, 최고선이시고 저의 참된 선이신 하느님, 그 과일이 당신의 피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과일은 아름다웠습니다만 가엾게도 제 영혼은 열매 자체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저한테는 더 좋은 과일이 얼마든지 있었고 훔친 것들은 그냥 버렸습니다. 그저 도둑질을 하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저는 과일을 서리해서 그냥 버렸으니 제가 배불리 맛본 것은 오로지 악의惡意 뿐이었고, 그 악의로 하는 도둑질이 재미있었습니다. 그 과일이 조금이라도 제 입으로 들어갔더라면 거기서 맛을 내는 것은 악행이었습니다.

주, 저의 하느님, 지금 저는 도둑질에서 저를 재미있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실상 아무 멋도 없습니다. 공정公正이라든가 현명賢明에서 발견되는 멋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성, 기억, 감관 심지어 목숨을 부지하는 생명에서 발견되는 멋도 거기에는 없습니다. 별들도 멋지고 제 자리에서 뽐을 내는데 그런 멋도 없고, 땅과 바다도 나고 지고 하면서 이어가는 소생들로 가득한데 그런 멋도 없습니다. 결함투성이인 멋, 기만적인 악덕들의 그늘 밑에 살아남는 멋이라도 있을 법한데 그것마저 없습니다.……오, 추기물이여! 오, 괴물 같은 삶이여! 죽음의 심연이여! 해서는 안 될 짓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니, 그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니, 과연 그럴 수가 있습니까?(고백록 제2권, 6.12.14)」

소년 시절의 배나무 절도 사건을 이야기하며,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는 아무런 필요도 없었는데, 다만 내 안으로 굽은 추한 사랑(amor pravus) 때문에 죄를 지었다.”고 고백한다.(*원래의 문장은 ‘나는 단지 훔치기 위해서 훔쳤다.’이다) 여기서 그는 죄 자체를 향한 쾌락 때문에 도둑질을 했다면서 ‘죄 자체를 향한 욕망(선이신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욕망, averti a Deo)’을 거론하고, 선을 향해 열려야 할 의지가 자기 자신 안으로 굽어 들어가는 ‘사랑의 왜곡(perversio amoris)’임을 묘사한다.

2) 탐욕과 천성의 기만: 「인간들이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을 적에, 실은 자기 영혼을 망치는 일을 행하는 짓이고, 악행은 결국 당신께서 만드시고 질서 지우신 천성을 썩히거나 일그러뜨림으로써 자체를 기만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생명의 샘이시여, 당신께서 저버림을 당하실 때마다 그런 짓들이 벌어집니다. 당신께서는 유일하고 참된 창조주이시시면서 우주의 통치자이신데도, 일부에서는 자기 본위의 오만으로 인해서 가짜 ‘일자一者’가 사랑을 받을 적에 그런 일들이 생깁니다.

(*신플라톤 철학에 의하면 궁극존재자 ‘일자一者’로부터의 이탈에 피조물의 타락이 있고 일자에로의 회귀에 구원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철학적 ‘일자一者’라는 개념을 빌려와 하느님께로 향하지 않고 왜곡된 자기 안에 머무는 것이 죄임을 자주 언급한다. 여기서는 지혜가 궁극적 일자unum 혹은 보편universitas을 관조하는 능력이라면, 자기 본위의 오만privata supervia은 욕망의 대상인 단편적인 것을 궁극적 가치로 간주하는 어리석음이다)

더 갖겠다는 탐욕으로, 죄다 잃어버릴 손해를 무릅쓰면서 저희 자신의 것이라는 선을 만유의 선이신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고백록, 제3권, 8.16)

그가 여러 곳에서 ‘하느님을 향해 펼쳐져야 할 자신이 자기 자신 안으로 굽어 들어간 상태’라는 사상적 표현을 드러낸다. 자기중심 선호의 성향이다. 여기서 죄는 하느님을 향해야 할 영혼이 자기 안으로 닫히고 뒤틀린 상태이다.

3) 마음으로 돌아가라: 「…하느님 안에서 사랑할 일이요, 너와 함께 영혼들을 힘껏 사로잡아 하느님께 이끌어가거라. 또 그것들에게 말하라. ‘이분을 사랑하자. 이분을 사랑하자꾸나.’ 그분이 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또 그분은 먼 곳에 계시지도 않는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만들어놓고 떠나버리신 것이 아니요,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서 이것들이 존속한다. 그러니 보라, 그분이 어디 계시고 어디서 진리가 빛을 내는가! 마음 가장 안쪽에 계시는 분인데 우리 마음은 그분한테서 떠나 헤맸다.

‘탈선한 자들아, 마음으로 돌아가라!’(*비슷한 사상을 그는 다른 저술에서도 반복한다. cf. De vera religione 39,72 ‘밖에 있는 것을 탐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유배된 처지가 되었다. … 마음에 새겨진 법이 소리치는 대로 그대는 그대 자신으로, 안으로 돌아가라고 부름을 받고 있다.’)

너를 만드신 분에게 귀의하여라! 그분과 함께 서 있거라! 그러면 너희가 서게 되리라. 그분 안에 안식하라! 그러면 편안하리라. 거친 사물로 어디 가느냐? 어디로 가느냐? 너희가 사랑하는 선은 그분에게서 존재한다.…무엇을 얻자고 여태껏 그 어렵고 수고로운 길들을 걸어 다니고 있느냐? 너희가 안식을 찾는 그곳에는 안식이 없다. 너희가 찾을 테면 찾아라! 하지만 너희가 찾는 곳에는 없다. 행복한 삶을 찾는다면서 너희는 죽음의 지역에서 찾고 있다. 거기에는 없다. 생명조차 없는 곳에 어떻게 행복한 삶이 있다는 말이냐?」(고백록, 제4권, 12.18)

4) 외부 욕망에 매달림: 「늦게야 하느님을 사랑했습니다! 이토록 오래되고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또 보십시오, 당신께서는 안에 계셨고 저는 밖에 있었는데, 저는 거기서 당신을 찾고 있었고, 당신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것들 속으로 제가 추루하게 쑤시고 들어갔습니다. 당신께서는 저와 함께 계셨건만 저는 당신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당신 안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것들이 저를 당신께로부터 멀리 붙들어 놓고 있었습니다.(mecum eras, et tecum non eram. ea me tenebant longe a te, quae si in te non essent, non essent)

당신께서 저를 부르시고 소리 지르시고 제 어두운 귀를 뚫어놓으셨고, 당신께서 비추시고 밝히시어 제 맹목을 몰아내셨으며, 당신께서 향기를 풍기셨으므로 저는 숨을 깊이 들이키고서 당신이 그리워 숨 가쁘며, 맛보고 나니까 주리고 목이 마르며, 당신께서 저를 만져주시고 나니까 저는 당신의 평화가 그리워 불타올랐습니다.」(고백록, 제10권, 27.38)

교회의 역사 안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교부들의 생각을 종합하고 망라하여 오늘날의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죄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849항. 죄란 이성과 진리와 올바른 양심을 거스르는 잘못이다. 죄는 어떤 것에 대한 비뚤어진 애착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참다운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다. 죄는 인간의 본성에 상처를 입히고 인간의 연대성을 해친다. 죄는 “영원법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위나 욕망”(성 아우구스티누스)이라고 정의되어 왔다.

1850항. 죄는 하느님에 대한 모욕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것을 제가 하였나이다.”(시편 51/50,6) 죄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거슬러 맞서며, 우리 마음을 하느님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다. 최초의 죄와 마찬가지로 죄는 선과 악을 알고 규정하는 “하느님처럼”(창세 3,5) 되겠다는 헛된 의지로 하느님께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성 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의 도성De civitate Dei, XIV, 28)이다. 죄는 교만스럽게도 자신을 이렇게 높이는 것이므로, 구원을 이룩하신 예수님의 순명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참고로,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죄’를 설명하면서 ① 자비와 죄 ② 죄의 정의 ③ 죄의 다양성 ④ 죄의 경중: 대죄(죽을 죄)와 소죄(용서받을 죄) ⑤ 죄의 증식 ⑥ 간추림, 이렇게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 1846-1876항을 수록한다.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죄의 근본 식별 https:/benjikim.com/?p=4718

단순하게 계명을 어기는 것만이 죄는 아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1요한 3,4) 할 때, 이는 하느님을 알아 모시지 못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못된 짓들이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로마 3,23) 할 때, 이는 인간이 본래 지닌 하느님의 영광을 잃어버린 상태이며,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8)라고 할 때, 하늘과 인륜을 거슬러 그 관계가 단절된 상태이다.

못된 짓을 일삼고, 본래의 영광을 잃었으며, 하늘과 사람들에게서 돌아서 굽어진 내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여 올바로 펴지기를 기도한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마르 3,5) 하시어 성하게 해 주신 분, 굽은 선線으로도 바른 선을 그으시는 분, 인간의 죄마저 당신의 섭리 안에서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하느님께 은총을 청해야 한다.

2 thoughts on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죄罪

  1. 죄.
    일일이 열거할 수 없게 많이 지었음을
    고백합니다.
    깨어있지 않았으며
    미망 속에서 헤매었음을
    고백합니다

    바오로 성인의 고백이
    제 마음에
    콕 박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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