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근본을 식별하지 않는 우리 인생은 ‘거의’ 의미가 없다. 자주 발생하고 노출되는 우리의 실패와 약점들 저변에 깔린 것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한낱 멍청한 시도에 불과할지 모른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 죄의 근본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잡초를 제거하고 싶다면 눈에 보이는 줄기만 잘라내지 말고 뿌리를 뽑아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뭔가를 해냈다 싶어도 그것은 단편·단기적이고, 실질적이지 못하며, 조만간 다시 낙담과 좌절이 찾아들고 만다.
죄의 근본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지혜가 도움이 된다. 이에 관해 세기를 두고 교회의 영성 작가들은 세 가지 항목들을 지적한다. 이를 밝히기 전에 먼저 한 가지를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세 가지 내용이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에 떨어지고 기우는 경향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세 가지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그중 어떤 한 가지에 치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곧, 어떤 한 가지가 다른 것들보다는 더 과도하게 우리 일상을 지배하거나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교만, 허영, 센슈얼리티sensuality이다. 교만은 내가 잘 났다는 우쭐댐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이다. 교만한 사람은 성취와 정복을 추구하면서 의미를 찾는 경향을 보인다. 허영은 타인의 인정에 대한 대책 없는 집착이다. 허영스러운 사람은 타인의 인정을 받거나 이를 좋아하며 거기서 의미와 성취를 느끼는 경향이 있다. 센슈얼리티는 편하고 안락한 것, 쾌락에 대한 얽매임이다. 이런 사람은 인생을 그저 쉽게 편하게 살거나, 즐기는 것에서 의미와 성취를 느끼는 성향을 보인다. 셋 모두 어떤 것에 관한 무질서한 애착이다. 이런 세 가지를 중심으로 무엇을 추구하거나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일시적인 것이나 피조물, 혹은 현실에만 집착하고 머물면서 이를 추구한다는 것에서 발생한다. 우리 인간은 영원하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도모하고 그분 안에서만 우리의 성취와 의미를 만족스럽게 찾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고, 그렇게 살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인간의 성취와 관계, 그리고 기쁨은 이러한 원칙 안에서 정렬되어야만 한다.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인간의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다. 인간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에게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늘 인간을 당신께로 이끌고 계시며,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진리와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 (사목 헌장 19항) 인간 존엄성이 빼어난 이유는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도록 부름 받은 인간의 소명에 있다.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과 대화하도록 초대받는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보존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랑을 자유로이 인정하고 자기 창조주께 자신을 맡겨 드리지 않고서는 인간은 온전히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없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7항)』
다시 말하지만, 우리 모두 예외 없이 본성적으로 교만, 허영, 센슈얼리티의 경향을 지니고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세 가지 중 어떤 하나가 내 안에서 더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려는 나의 목표를 더 잘 실현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의 타락과 잘못의 원인을 더 잘 파악하여 덕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영성 작가들은 이를 가리켜 ‘지배적 결함dominant defect’이라 한다. 열거하는 목록들에서 내가 어떤 것에 치우쳐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실마리로 삼아 내가 짓는 죄의 근본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아래의 목록들을 빠르게 읽어나가면서 일단 나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표시를 해 두면 좋다. 여기에도 해당하고 저기에도 해당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분명 어떤 것에 더 두드러진 부분이 있을 것이고, 세 가지 중 더 많이 해당하는 부분이 나의 죄로 기우는 성향의 뿌리일 가능성이 크다. 이 작업을 진행하면서 생각보다 어렵고 모호하다고 느낄 수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표피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하여 영적 지도자를 찾곤 한다. 세심하게 살펴보면서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려는 나의 착한 지향을 하느님께서 축복해주시고 인도해주시기를 청해야 한다.
교만의 보편 성향
– 자신에 대해 과도한 평가를 내린다
– 나와 맞지 않은 사람들을 귀찮게 여기거나 만나기 꺼린다
–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 남을 쉽게 판단하거나 윽박지르고 뒤에서 험담한다
– 나의 실수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에도 더디고 용서를 잘 구하지 않는다
– 다른 사람이 나에게 감사하지 않을 때 화가 난다
– 누군가에게 봉사하려 들지 않고 내가 싫어하는 것에 저항한다
– 일상적인 접촉에서 누군가와 거리를 두려 하고 무뚝뚝하거나 초조할 때가 있다
– 상황을 수습하거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그 일을 주도하면 도우려 하지 않는다
– 나의 지능과 이해에 대한 과장된 생각, 내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다른 이가 다르게 보는 것을 무시하려 한다
– 기도하면서도 하느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는다
– 사소한 일인데도 앙심이 생긴다
– 누군가의 명령이 싫다
– 내가 선호하는 것이나 우선권을 침해받고 싶지 않다
– 나와 나의 필요가 최우선이며 타인과 그들의 필요에 무관심하다
– 내가 대화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대화 주제를 내가 선도해야 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해야 한다
– 하느님과의 관계나 타인과의 관계를 가늠하고 계산한다
허영의 보편 성향
– 누군가로부터 칭찬이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지 못하면 불안하다
– 외모에 대해 과도하게 신경이 쓰인다
–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라 움직인다(때로 이를 두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 나름대로 몇 가지 형태의 수줍음이 있다
– 상황에 맞추느라 원칙을 희생할 수도 있다
–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나 인기, 내가 받아들여지는 것이 중요하다
– 나의 실패에 쉽게 낙담한다
–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이나 누군가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를 잘 듣는 편이다
– 항상 누군가로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고, 때로는 진실을 과장하는 버릇도 있으며, 어떨 때는 노골적으로 거짓말을 하거나 내 말이 옳다는 것을 강조하느라 심한 표현이나 막말을 할 때도 있다.
센슈얼리티의 보편 성향
(참고. ‘Sensuality’는 오늘날 사전에서 ‘관능성, 육욕성, 호색, 음탕’ 등으로 번역된다. 센슈얼리티라는 말의 역사는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길다. 인간의 감각과 관련된 말이거나 오감五感과 관련된 말이었다. 나중에 라틴어에서 sensualitas라고 할 때는 느낌과 감각에서 얻어지는 ‘감각 능력’을 뜻하기도 하며 동물적 본능을 표현하기도 하다가 17세기에 이르러 인간의 저급한 본성으로 취급되면서 육체적인 정욕을 가리키기도 했다)
– 게으른 편이다
– 항상 편하고 최소의 노력이 필요한 것만을 찾는다
– 타인을 위해 그와 함께 몇 걸음도 가고 싶지 않다
–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것을 미루려 한다
– 사소한 불편에도 조바심이 나고 불평을 한다
– 누군가를 위해, 무엇인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싫다
– 가정 내에서 내가 해야 할 바를 하기 싫거나 일을 맡고 싶지 않다
–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주고 봉사해주기를 바란다
– 내 기분이나 느낌에 따라서 결정을 내리고 행동한다
– 나를 중심으로 공상을 많이 한다
– 어떤 것에 마음이 끌리면 좋은 생각이 아닌데도 빠져들고 이를 통제할 수 없다
– 음식이나 일 등을 선택할 때 내가 좋아하는 것만 선택한다
– 주책없이 호기심에 빠져들거나 모든 쾌락이나 즐거움을 맛보고 싶어진다
– 나의 감각이나 충동이 내가 알고 있는 옳고 그름을 넘어선다
– 나의 양심이나 하느님, 그리고 타인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나의 욕구불만이나 욕구를 따라서 느끼고 행동한다
–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일하고 싶어 하며 쉽게 상처를 받는 편이다
– 변덕을 부리거나 지구력이 약하다
– 내가 시작한 일을 결코 끝낼 수 없다
(*번역글 : https://spiritualdirection.com/2010/04/26/how-can-i-identify-my-root-sin 존 바트넥John Bartunek 신부의 글, 사진은 유진 아트겟Eugène Atget의 작품이라고 소개하면서 존 신부가 인용하여 게재한 것을 재인용 하였음. 글은 편의상 과감한 문형의 변형과 첨삭이 있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