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카 복음사가는 9장 51절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여정을 기록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오르시는 길)”(9,53;13,22;17,11;19,28)이라는 표현으로 이를 묘사한다. 그 세 번째에 해당하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루카 17,11)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참고로, 루카복음은 즈카르야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분향을 하는 모습으로 복음 기록을 시작하고(1장), 태어나신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한 이야기, 예수님의 소년기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축제를 지내러 갔다가 예수님을 잃었다 찾은 내용(2장),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마지막 유혹(4장),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9장 51절-19장 27절),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서 지내시는 마지막 논란과 체포, 십자가에 이르는 장면(20-23장),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부활하신 주님과 제자들의 만남(24장), 그리고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루카 24,52)라는 구절로 마감된다. 이처럼 루카 복음사가는 시종일관 예루살렘이라는 장소를 중심으로 복음을 기록해나가는 측면이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 곧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요르단 강 계곡 쪽으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시던 중 “어떤 마을”에 이르렀을 때 뜻밖의 만남이 있었다.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예수님)께 마주 왔다.”(루카 17,12)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그런 끔찍한 병을 얻었다고 생각되면서 율법에 따라 피부에 죄가 새겨진 존재들이라고 취급받으며, 그에 따라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사람들로부터 가까이해서는 안 될 불결한 이들로 알려졌던 이들이었다. 나병은 당시, 온몸이 썩어들어가고 부패하면서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은 사회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철저하게 배제되어야만 하던 존재들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말이나 글로 당시의 나병 환자에 대한 상황을 설명하고는 있지만, 오늘날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의 상황을 가늠해보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현재 우리는 질병에 대해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고, 특별히 피부병이 우리를 괴롭히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다소 혐오감을 일으킨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놀랄만한 일도 아니고, 그런 이들을 만날 때 내심 불편하더라도 이를 외적으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당시 나병과 같은 악성 피부병에 걸렸을 때 이를 일상생활 안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참조. 레위 13-14장) 예를 들어, 누구든 그런 경우 감염자를 사제에게 데려가야 하고 사제가 이를 살펴보고 증상을 진단하며, “부정한 이”나 “정결한 이”로 “선언”하거나 “격리” 여부를 결정하는데, 이에 따라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 13,45-46) 한 마디로 나병에 걸린 이는 살았어도 죽은 사람이었으며 “그의 아버지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은”(민수 12,14) 사람이었다.
우리는 루카복음 5장에서 이미 예수님께 “다가왔던”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을 보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고쳐주시기를 청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그의 상처를 만지시며)” 그를 고쳐주셨다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참조. 루카 5,12-16) 그런데, 오늘 복음의 장면 안에 길에서 예수님께 “마주 왔던” 나병 환자 열 사람이라는 그룹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께 가까이 오지 않고)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루카 17,13-14)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원하는 나병 환자들의 외침은 짧고 간결하다. 시편에서 주님이신 하느님을 부르면서 여러 번 반복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탈출 34,6) 한 대로 우리의 주님께서는 나병 환자들이 청원은 할 수 있어도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일을 당신의 권능으로 이루실 수 있는 분이시다. “자비”를 청하는 나병 환자들의 청원은 정확하게 자비의 내용을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리한 창처럼 듣는 이의 마음을 찌르면서 도움과 위로를 청하는 고통 받는 이의 탄식이다.
자비를 간청하는 이들의 외침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찬찬히)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신 나머지) ‘가서 사제들(율법에 따라 나병 환자들의 치유를 선언할 수 있는 이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수수께끼처럼 알쏭달쏭한 말씀으로) 이르셨다.”(루카 17,14) 언뜻 보기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비를 청하는 열 명 나병 환자들의 청원을 예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고 그들을 사제들에게 보내시면서 사제들의 무능을 드러내게 하시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의 분부에 순명하면서 그대로 따른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나병 환자들을 당신께로부터 떨어지라고 물리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을 향한 나병 환자들의 신뢰와 청원을 보시면서 당신 말씀에 계속 믿음을 가지라고 초대하고 계신 셈이다. 그렇게 나병 환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서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루카 17,14ㄴ) 나병이 치유되고 깨끗해진 것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복음의 대목을 기록하면서 엘리사가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던 장면을 생각하였다는 듯이 기록한다.(참조. 2열왕 5,1-14; 오늘 제1독서 루카 4,27) 루카 복음사가의 기록은 예언자 엘리사가 나병의 치유를 청하는 나아만을 문밖에 나와보지도 않고 멀리서 그저 요르단 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고만 하는 바람에 나아만이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려다가 부하들의 만류에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사람 예언자의 지시를 따름으로써 치유를 받았다는 사실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나아만도 그렇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만난 나병 환자들도 그렇고 그들의 공통점은 치유를 바라는 간절한 열망이다. 내다보지도 않은 엘리사처럼 예수님께서도 나병 환자들을 만나 그들을 어루만져 주시거나 따뜻한 말로 위로해주심도 없이 당신을 향한 믿음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저 치유를 선언할 수 있는 사제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병 환자들이 처음에 실망했을 수도 있다.
믿음은 참으로 신비이다. 우리는 어떤 믿음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그 믿음의 질質이나 척도, 그리고 그 크기를 감히 판단하거나 측량할 수 없다. 타인의 믿음도 그렇고, 우리 자신의 믿음조차도 그렇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자기가 믿음 안에 살고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 따져 보십시오. 스스로 시험해 보십시오.”(2코린 13,5)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과연 우리에게 믿음이 있기나 한지, 자신의 믿음을 따져 보고 성찰해 볼 용기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믿음은 은총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이 믿음은 우리가 지켜나가고, 단련해가며, 쇄신하고, 다져가면서 실로 우리 안에 신비로 남는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또 복음의 여러 곳에서 같은 말이 반복되는 것처럼(참조. 루카 7,50;17,19;18,42 마르 5,34와 병행구;10,52), 믿음만이 우리를 구하고 살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얻었던 다른 이야기들처럼 오늘 복음도 “그들이…몸이 깨끗해졌다.”라는 이 대목에서 끝날 수도 있었지만, 복음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들(열 명의 나병 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같이 치유를 받은 다른 유다인, 곧 하느님의 선택받은 민족의 일원이라고 자처하는-레위 11,44-45;19,2 등등 참조. 아홉 명과 달리) (신체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루카 17,15-16)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들로부터 이단이면서 민족으로부터 갈려 나간 못된 것들이고, 그들의 경배는 그릇된 것이며 불법 집단이며 마치 이상한 “외국인”처럼 멸시를 받았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같이 하기에는 ‘너무 먼’ 사마리아인이 예수님께 믿음을 두어 자기 몸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는 예수님 안에 계시는 하느님 영광의 현존과 그 무게를 깨닫고 하느님 앞의 인간이 늘 그러하듯이 예수님 발 앞에 몸을 던져 엎드려 땅에 얼굴을 대고 큰 소리로 감사의 찬미를 드린다. 이러한 모습 안에서 그 사마리아인은 자신을 깨끗하게 해 주신 분에 대한 믿음이 자신을 구원하였음을 고백한다. 이 사마리아인은 사제에게 가던 길을 가지 않고 예수님께로 “돌아와” 하느님을 찬미한다. 그는 사제들이 있는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현존이 있음을 알았고, 육체적인 치유만이 아니라 구원까지 얻을 수 있음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깨끗해졌다.’라고 선언하신 것만이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하신다.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18) 하시며 일련의 질문을 내놓으신다. 예수님께서 실망하신 것은 다른 아홉이 감사하기 위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열 명의 신앙 여정이 주님의 은총과 구원을 얻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육체적인 치유에 멈춰버렸기 때문이었다. 다른 아홉은 병을 고쳤을지 모르지만, 구원을 받지는 못하였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육체적인 질병에서 벗어나고 낫게 되며 죽지 않고 살아나는 것은 분명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이며 하느님께서는 이를 기뻐하신다. 그렇지만 육체적인 치유를 넘어 몸과 정신과 영이 하나 되고 온전한 인격적 치유를 얻으며 구원을 얻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치유나 기적 앞에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꼭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치유를 얻기는 하지만 그러한 치유나 기적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구원을 얻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 역시 어느 정도는 인식한다고 할 수 있지만, 육체적인 치유가 통합적인 전체 인간의 치유, 곧 영적인 치유까지도 얻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의 치유가 되도록 해야만 한다. 열 사람 중 한 사람만 돌아와 예수님께 드리는 “감사”는 역설적으로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자기만족自己滿足과 자기애自己愛에서 벗어나 선善이 타인에게서 온다는 것을 의식하고, 내가 언젠가 누군가에게서 따뜻한 시선의 대상이 되었음을 기억하는 일이 곧 감사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는 이는 소위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정통 울타리를 넘어 밖에 있다고 여겨지는 이,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이 아닌 그 너머의 사람, 이방인이라고 멸시받는 이, 의사가 아닌 병든 이, 고향 사람이 아닌 타향 사람, 엘리야 시대의 사렙타 과부, 엘리사 시대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 감히 주님을 자기 집 지붕 아래에 모실 자격도 없고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던 사람(참조. 루카 4,23-27;7,1-10), 곧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나 공동체라고 하는 울타리에 갇힌 자들의 소위 확신이라는 것을 허무신다. 이미 안에 있다고 여기는 우리 같은 사람보다도 밖에 있다고 여겨지는 소외된 사람들로부터 훨씬 더 많이 환영을 받으시는 그리스도의 역사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나 문화적인 제도 안에서만 당신을 드러내시지 않고, 무엇보다도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당신의 영광을 계시하신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치유라고 하는 차원에 매혹되고, 편안하고 정신적인 안정과 위안을 얻는다는 식의 소위 나의 웰빙well-being을 위한 믿음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지만,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와 친교 안에서 드리는 감사와 찬미로 믿음을 고백해야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치료나 치유, 혹은 안녕만을 염두에 두다 보면, 우리 자체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라는 우선권이자 하느님 편에서의 주도권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치유 과정에서 받았던 은총을 생각하지도 않고, 통합적인 인간의 구원을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주님께 감사하러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 그의 생명은 “구원”되지 못한다. 아멘!
내 몸이 건강해지고 예뻐지기를 바란만큼 내 영혼이 순수하고 기름기없이 건강하고 맑기를 간절히 바랐던가? 그것을 위해 나는 무엇을 했던가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