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일 ‘다’해(루카 17,5-10)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여정 동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으시거나 당신의 행동이나 말씀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항의를 받으셨고, 때로는 기도하시기도 하셨다. 이 여정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일반적인 제자들, 어떤 경우에는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과 어우러지셨고, 또 다른 경우에는 당신의 측근이랄 수 있는 열두(루카 6,13;9,1) 제자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파견하시는 이들, 말 그대로 문자적인 의미에서 ‘아포스톨로이ἀπόστολοι, apóstoloi(보냄을 받은 이들)’, 나아가 당신 부활의 증인이 될(루카 24,48 사도 1,8.21-22) 자질을 지닌 이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셨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①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는 기도, ② 주님의 크신 은총에 의탁하는 겸손하고 작은 겨자씨 같은 믿음, ③ 그저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는 자세 등을 묵상할 것이다.

1.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엄중한 요구가 뒤따랐다.(참조. 루카 9,23-26;14,26-27) 이에 많은 이들은 자기들의 연약함과 나약함을 절실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 안에서 어느 날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예수님을 ‘주님Κύριος Kýrios’, 곧 스승이요 주군으로 모시는 사도들이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7,5)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는 이 말은 항상 주님 안에 계시면서 믿음 위에 활동하시고 제자들을 북돋우어 주시는 성령의 능력과 힘을 청하는 아름다운 기도이다. 그러나 이 청원은 그 기도가 지닌 실제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위험이 있으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주님을 향한 믿음에 대해 묵상해 보아야 한다. 베드로 사도가 청했고 다른 사도들과 예수님을 만난 이들까지도 청한 믿음이었으니 우리는 훨씬 더 큰 믿음을 청해야만 한다.

믿음은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맺는 구체적이고도 개인적인 관계의 형성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믿음은 머리로만 아는 지적인 개념이 아니며, 진리에 관한 교의나 교리에 관한 형식적인 파악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믿음이 무엇인가를 ‘믿는다’(예를 들어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와 같은)라는 것도 아니다. 믿음은 내가 알아 모시는 예수님, 곧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뢰의 행동이다. 주님을 믿어 그분께 매달리는 것이며, 그분과 강하게 밀착하여 있는 것이고, 그분만을 믿어 지극히 개인적으로 그분께 의존하고 있으며, 자궁의 아기가 엄마에게 탯줄로 연결되어 살듯이 그렇게 연결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하느님을 믿는 인간의 믿음은 인간 편에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살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다음 예시에서 보듯이 몸소 당신의 입으로 다른 군더더기 없이 ‘믿다’라는 동사 피스튀오(πιστεύω, pisteúo)나 ‘믿음’이라는 명사 피스티스(πίστις, pístis)를 사용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루카 8,50 마르 5,36)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7,50;17,19;18,42 마르 5,34과 병행구, 마르 10,52)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마태 8,13)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하신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구차한 어떤 설명이나 부수적인 조건 따위가 없이 하느님과 직접적으로 결정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믿음”은 단순히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식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님께 대한 철저한 의존이고 죽기까지 그분께 나의 인생 모든 것을 거는 행위이다. 믿음은 우리 자신에게 의존된 아주 작은 부분이 있고, 하느님 은총의 선물에 의존된 부분이 있다. 우리의 믿음은 결국 주님 부활의 은총으로 완성될 믿음이다. “믿음”은 폭넓은 교리 지식과는 거리가 멀다. 믿음은 참되고 유일하신 주님의 초대를 부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분을 믿어 그분에게 나의 생명을 맡기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포로가 되는 것이고, 그분의 소유가 되기 위해 스스로 내어 맡기는 것이며, 인간적인 모든 안전장치를 포기하는 것이고, 온갖 위험마저 무릅쓰는 것이다. 그렇다고 믿음이 바위만 있는 어둠의 밑바닥에 개죽음을 위해 몸을 던지는 것과 같은 비이성적 돌진이나 맹신은 아니다. 믿음은 확실한 안전장치와 담보가 아니라 조용한 침묵의 발걸음이다. 『하느님을 찾는 것은 하나의 어둔 밤이다. 신앙도 어둔 밤이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인간에게 매일 매일도 하나의 어둔 밤이다. 그 누구도 바로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이 닥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간다. 뭔가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신앙이 있기 때문이다.…어쩌면 인생의 매 순간이 하나의 신앙 행위이다.(파울로 코엘료)』

분명 믿음은 인간의 약함과 하느님의 힘이 만나는 바로 그 지점에 있으면서 믿음의 행위 안에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믿음은 ‘불신앙’, ἀπιστία, apistía(마르 6,6;9,24;16,14 마태 13,58)에서 믿음으로 넘어가는 문제이지만, 이러한 넘어감, 곧 어떤 면에서 ‘회개’는 하느님을 불러 하느님께 청하고, 그 답으로서 언제나 주어지게 마련인 하느님의 선물이자 은총을 얻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는 자기 포기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면서 주님의 말씀이 내 안에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하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 편의 불신, 혹은 작은 믿음(ὀλιγοπιστία, oligopistía, pistía 곧 믿음이라는 말 앞에 붙어 있는 oligo는 ὀλίγος라는 말에서 파생되는데, 이는 ‘조금’, 영어로 ‘few’에 해당한다. *참조. 마태 17,20 ; 복수형인 oligópistos 는 마태 6,30;8,26;14,31;16,8 루카 12,28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서도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도 아닌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은 여러 번 예수님의 지적을 받고 꾸지람을 듣는다.(참조. 루카 24,11.41 마르 9,19와 병행구;16,11.16) 반면에 의외로, 병든 이, 죄인들, 뜨내기, 그리고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구해주시고 살려주시라고 믿음으로 도움을 청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라고 하시는 대목을 만날 때면 참으로 놀랍다.

이러한 내용에 관하여 공관복음이 공통으로 전하는(마르 9,14-29 루카 9,37-43 마태 17,14-18) 일화를 통해 우리는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아들을 두었던 어떤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 아버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 “영을 쫓아내 달라고” 요청했으나 제자들이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에 그 아버지는 몹시 실망하였는데, 다시 예수님을 만나게 된 자리에서 예수님께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한다. 이 말씀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정녕 너희는 목이 뻣뻣한 백성”이고 믿음이 없는 백성이라며 탄식한 것처럼(참조. 신명 9,6;31,27;32,5)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하시면서 먼저 제자들을 향하여 탄식하신 다음 아이 아버지에게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고 말씀”(마르 9,23) 하시면서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10,27 참조. 창세 18,14)라는 뜻으로 믿음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신다. 그러자 아이 아버지는 예수님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불신, apistía)’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 한다. 예수님 앞에 나의 불신과 작은 믿음을 내어드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이는 예수님께서 나의 의심을 쳐부수시는 자리이며 믿음이 불신을 이기는 자리이다. 겸손한 아이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꾸짖어 쫓아내 아이를 고쳐주셨을 뿐만 아니라 생명을 믿지 못하는 덫에 갇힌 아이의 아버지까지 고쳐주신다.

2.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다시 오늘 복음의 본문으로 돌아와서 볼 때, 이미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였던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한”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미 있는 그 믿음으로 충분하다. 믿음은 예수님의 능력과 힘에 대한 신뢰이다. 이러한 요청 앞에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참조. 마르 11,22-23 마태 17,20;21,21) 말씀하신다. 사도들이 자신들의 믿음이 작다는 것을 이미 인식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진실한 것이고 예수님 편에 꼭 붙어 예수님만을 믿고 의지하여 구원을 얻으려 한다면, 예수님과의 관계를 놓치지 않으려는 간절한 열망만이라도 간직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겨자씨는 대단히 작아 보입니다. 너무나도 작아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지만 그 맛은 그 어느 것보다도 강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교회 안에 불타오르는 강한 열정과 내적인 믿음의 강도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다.

우리의 믿음이 항상 작은 믿음이고 짧은 믿음이며 단편적인 믿음이라 할지라도, 설령 아주 작은 겨자씨만큼 아주 작은 믿음의 씨앗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의 권능에 매달리는 간절한 믿음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의 뒤를 따라가면서 가끔은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엎어질지라도 그분만을 따라간다면 나의 주님이신 그분께서 나를 붙들어주시고, 일으켜주시어 당신께서 가고자 하시는 곳으로 결국 나를 이끄시어 나를 살려주시고, 그분께서 계시는 그곳에 나도 항상 같이 있게 하실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실제 겨자씨라도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바라보면서 우리의 작은 믿음을 자주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에 관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사용하신 이미지인 그 겨자씨가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 작지만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온갖)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되면서”(마르 4,32) 우리를 놀랍게 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 작더라도 그 믿음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면 우리가 지닌 그 무엇보다도 강하고 세서 차고 넘칠 것이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믿음은 믿음이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께만 매달리는 믿음이며, 그분과의 관계를 절대 놓지 않으려는 믿음이며, “믿음을 일깨우려는”(로마 1,5에서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이라고 번역된 문장에서 ‘믿음을 일깨우려는ὑπακοὴν πίστεως, hypakoé písteos’이라는 원문 단어 배치를 따라 단어의 도치倒置) 믿음이다.

3. “~하겠느냐?”“~하지 않겠느냐?”

‘믿음’의 중요성을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믿음에 반대되는 것이 자신을 믿는 것이므로 그것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루카 17,7-8) 하시면서 두 개의 반문을 통해 비유를 들어 말씀을 이어가신다. 포도밭에 일하러 내보낸 종과 주인의 관계에 관한 비유이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물론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는 주님의 파견을 받아 주님의 밭에 일하러 나간 종들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늘 그렇듯이 종이 종다워야지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신다. 종이 종의 신분을 잊고 주인 행세를 하려 들면서 자기 본위로 생각하면 안 된다. 종이 자기 본분을 잊고 자기 본위로 생각하면서 주인이신 주님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바로 죄의 근본이다.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바리사이와 세리에 관한 비유(루카 18,9-14)를 말씀해주시면서 주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πρός τινας τοὺς πεποιθότας ἐφ’ ἑαυτοῖς ὅτι εἰσὶν δίκαιοι)” 사람, “꼿꼿이 서서 혼잣말”을 하는 사람, “자신을 높이는” 사람을 바리사이라고 하셨다.

이러한 태도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파견되어 주님께서 분부하신 바를 열심히 다 수행했으면서도 은근히 무엇인가를 보상받거나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는 이들이 종종 갖는 태도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이들에게 “~하겠느냐?”, “~하지 않겠느냐?”라고 두 번이나 거듭 물으신다. 명령을 수행하고 돌아온 종에게 주인이 감사하며 머리 숙여 먼저 배려할 일도 없으며, 종일 일하고 돌아온 종에게 설령 또 다른 임무를 부과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일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부르심으로 파견을 받은 우리 역시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주님 앞에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루카 17,10) 말씀드릴 뿐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그 어떤 보상이나 인정을 바라지 않고 가는 길이다. 그 길에는 그 어떤 보증이나 공로도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주님을 위해, 그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전한 나의 자유의사로 하는 일일 뿐이다.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하였다고 해서 누군가로부터 이미 어떤 상을 받았거나 아니면 스스로라도 자신에게 보상하였다면, 장차 더는 주님으로부터 받을 것이 없을 것이다. 아멘!

***

『우리는 수많은 순명을 행해야만 하는 종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먼저 먹고 마시기 위해 식탁을 차려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은총(Grace)이 먼저 자리를 잡아야만 하고 본성(nature)은 그다음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충실히 순명하였다고 자신이 잘난 척해서는 안 됩니다. 태양도 서 있었고 달도 멈추어 있었습니다.(여호 10,13) 또한 천사들도 시중을 들었습니다.…우리 자신을 들어 높이지도 말고 하느님의 심판을 미리 구하지도 말 것이며, 하느님의 판결문을 미리 들으려고도 하지 말 것이니 판결의 “정해진 때를 기다릴(하바 1,3)” 뿐입니다.(성 암브로시우스, 337~397년)』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이 그릇된 열정에 사로잡힐까를 경계하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이 기껏 덕스러운 행동을 하고 나서도 자기 입으로 그 덕을 얼마나 쉽게 까먹고 맙니까? 온갖 덕행의 모범을 실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치켜세우다 보면 모든 것을 잃고 빈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349~4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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