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옮겨와 지내는 곳에서는 https://benjikim.com/?p=15442 에서 자료를 참조할 수 있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구성이 치밀하며 메시지가 분명한 비유가 있고, 복잡하면서도 직설적이지 않아서 주도면밀하게 메시지를 찾아내야만 하는 비유도 있다. 루카복음 제16장에는 돈과 재물에 관한 태도를 두고 루카만이 전하는 두 개의 비유가 담겼는데, 그중 이번 주에는 ‘약은 집사의 비유’(1-8절)를 듣고, 다음 주에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19-31절)라는 다른 한 비유를 듣게 된다.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집사는 얼핏 보기에 올바르게 처신하지 않고 의롭지 않으며 정직하지 않은 집사로서 윤리적으로 불량한 모습이다. 그렇지만 비유에 담긴 신학적인 관점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한다면 예수님의 의중이 무엇이었는지 곧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비유 역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겸손하게 우리 지성의 수고를 발휘하여 “영리하게” 읽는다면 복음적 방식으로 듣게 되는 또 다른 ‘복음’이 될 것이다.
1. “불의한 집사”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루카 16,2) 주인이 집사를 불러 “소문”을 추궁하며 해고를 통보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랴!’ 싶게 많은 경우에 “소문”은 사실로 확인된다. 주인은 “집사”가 자기의 직위를 이용하여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였다고 말한다. 현대 말로 횡령(가로챔)이고 배임(직위를 이용하여 본인의 이득이나 다른 이에게 이득을 넘겨 본래의 주인에게 손해를 끼침)이다. “집사”라는 용어는 복음서 저자들 가운데서 루카만 사용하는 용어로서(이 비유와 루카 12,42 참조) 바오로 사도 식으로 표현하면 “시종”이고 “관리인”이다.(참조. 1코린 4,1-2) 부자와 집사 간의 상황은 오늘날에도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맡겨진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눈앞에 보이는 재화 앞에서 부정한 짓으로라도 자신의 배만 불려보려는 유혹 때문이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어서 결국 집사는 부자에게 이 모든 일을 들켜 쫓겨날 위협에 직면한다.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생각하며)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루카 16,3) “어떻게 하지?”라는 의문은 세리들이 세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왔을 때 물었던 질문(루카 3,12 참조), 그리고 개종한 첫 사람들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었던 질문(사도 2,37 참조)이다. 루카가 위기 상황에서 즐겨 쓰는 표현이다. 집사는 모든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며 다시 정직한 집사로 살기를 주인에게 애원하거나, 쫓겨나 가슴을 치며 비참하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는 것 중에서 선택을 해야 했지만, 나름대로 창의적인 제3의 선택을 한다.
“속으로” 이 궁리 저 궁리를 다 한 집사는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주인에게 빚을 져 곤란한) 사람들이 나를 (친구로 삼아)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4) 하고 계략을 세운다. 다급한 집사는 신속하게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오십 항아리를 깎아)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스무 섬을 탕감하여)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6,5-7) 집사는 채권자의 승인이 없이 빚을 탕감하는 노골적인 부정과 사기를 저지른다. 그런데 “주인은 (집사가 자기 재산을 축낸 이 모든 상황과 전모를 파악하고도)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어둠의 불의한) 자녀들이 (사탄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의로운)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이 문맥에서는 적절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죄를 지어 하느님 앞에 지게 된 죄의 빚문서를 받아들고 약은 청지기처럼 아무 빚도 없는 문서로 돌려주시고, 오히려 기대하지도 않은 은총의 선물이라는 보증서까지도 안겨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느님이시다.
비유에서 주인이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불의한 행위를 칭찬한 것일까? 아니다. 불의한 재물을 나누어서라도 어떻게든 자기 편에 설 수 있는 친구를 만들려고 하는 그의 능력을 칭찬한 것이다. 의롭지 못한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자기가 더 착복하려 드는 것보다는 자기보다 딱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한 이들에게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나눠서라도 호의를 베푸는 것으로 친구를 만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이들 중 무엇인가를 많이 가진 사람들, 부자들에게 그것을 자기만 위해서 축적하려 하지 말고, 서둘러 나눠 가난한 사람들을 친구들로 만들어보라고 하시는 셈이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께서는 재화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많은 이들과 나누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부자들에게 “복음”이 되고자 하신 셈이다. 불의한 집사의 모범(?)은 그의 불의한 행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처한 상황을 잽싸게 파악하고 부족한 것이 많은 자신임에도 영리하게 처신한 그의 능력에 있다.
2.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불의한 집사”라는 말에 등장하는 “불의(아디키아, ἀδικία/ἄδικος, adikía/ádikos=injustice, unrighteousness)”라는 말마디는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오늘 복음에서는 “집사”나 “재물”, 곧 맘몬이라는 말과 연결되면서 무려 다섯 번이나 등장한다. 가난한 이와 나누어지지 않는 재화는 “불의”이다. 그 “불의”가 의롭게 되는 방법은 오로지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 /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마태 5,3 / 루카 6,20)이라고 하늘 나라 / 하느님의 나라를 약속받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지는 길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물(곧 ‘맘몬’으로라도)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하신다.
우리는 돈이라는 것이 자기를 믿어야 한다면서 우리의 믿음을 사로잡으려 하고, 우리를 유혹하고, 걸려 넘어지게 올무를 놓으며, 거짓 안전판을 제공하고, 우리를 속이고 우리 마음을 훔쳐 마침내 우리 마음의 귀한 보물이요(참조. 루카 12,34)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1티모 6,17) 두도록 하면서 우리의 우상이 되고 만다는 것을 잘 안다. 돈은 단지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일 뿐이지만,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고, 우리를 사로잡아 우리 자신을 좌지우지하려 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을 나눠야 하고, 누군가에게 선물해야만 한다. 돈을 축적하고 자신만을 위해 간직하게 되면 그 돈이 결국 우리를 소외시키고 만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우리를 소유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루카 복음사가는 이미 예수님의 유혹 장면에서 악마가 예수님께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경배”하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하면서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루카 4,6) 하는 악마의 말을 통해서 중대한 사실을 계시한다. 악마는 사실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그분께서 원하는 이에게 주겠소.’라고 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악마는 “내가…내가 원하는 이에게…”라고 말한다. 부를 축적하는 이는 자신이 알든 모르든 사탄의 청지기요 집사로 행세할 위험이 커진다. 그래서 집사에게 많은 재산을 맡긴 “어떤 부자”는 또 다른 사탄일 수 있다. 재화의 포로가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나누는 것이고 자선을 베푸는 것이며 빚을 탕감해 주는 것이다. 축적된 재산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방법은 공유와 나눔뿐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군가에게 재산을 맡겨 노예요 청지기이며 종으로 부리면서 그에게 ‘주님(Kýrios)’이 되며 우상이 되려는 맘몬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카 16,13) 하신다. ‘미움’과 ‘사랑’ ‘떠받듦’과 ‘업신여김’ “하느님과 재물”로 대칭된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라고 할 때 이를 두고 영어 번역은 “both God and Mammon”이라 한다. ‘맘몬’이라는 말의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히브리말 아만(’aman, אָמַן)으로서 ‘믿다’라는 뜻에 가 닿는다. 꿈란 공동체의 문서도 “불의한 재물”은 ‘근본적인 불의’라고 규정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두 주인” 중 누구를 “주인”으로 섬길지 선택해야만 하는 존재이다. 이쪽을 사랑할 것인지 저쪽을 섬길지, 아니면 이쪽을 거부할지 저쪽을 거부할지 분명히 선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두 주인”은 서로 어울릴 수 없고 병존할 수 없으며 오롯한 충실과 믿음을 요구하는 주인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장차 “하느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친구들과 어울려 영원한 삶을 누리는 큰 친교가 있을 것임을 내다보며 이를 알고 또 믿는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하셨으니, 우리가 마침내 그 영원한 잔치에 나아가게 될 때 날마다 이 땅에서 나눔의 실천과 자선의 춤으로 우리가 함께 어울렸던 바로 그 가난한 친구들이 우리를 맞이하여 줄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나 혼자만 있을 것이 아니고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느님의 축복으로 내가 가진 것들이 있어서 그것들을 여기저기 나눌 수 있었고 함께 기뻐할 수 있었던 친구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아, 아담의 후예들이여, 그대 자신을 위하여 그대 소유가 아닌 없어질 것들로 없어지지 않을 것을 사도록 하십시오.(시리아의 성 에프렘, 306?~373년)』
3. “세상의 자녀들…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자녀들이…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루카 16,8) 하시면서 “빛의 자녀들”인 당신 제자들이 “세상의 자녀들”처럼 “영리하게”, 창의적으로, 대담하게 처신하라고 하시는데, 뒤집어서 말하면 이 말씀 안에는 당신의 제자들이 그렇게 ‘영리하다(프로니모이, φρόνιμοι, phrónimoi)’, 곧 “뱀처럼 슬기롭고(=be shrewd as serpents)”(마태 10,16) “슬기로운 처녀”(참조. 마태 25,2.4.9)와 같지 않으니 식별과 지성의 능력에 깨어있으라 하시는 뜻이 담겨 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하느님의 복음에 무관심한 이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설득력이 있게 복음이 말 그대로 정말 기쁜 소식인 것을 알릴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리스도교적인 담론은 왜 그렇게 인간적이고도 세속적인 덮개들로 씌어 계속 아리송해지고 모호해지는 것일까? 왜 그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살아계신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여 그분과 만나야만 구원받을 수 있고 살 수 있다는 말을 자신 있게 하지 못하고, 우리 그리스도교는 한낱 나쁜 짓 하지 않고 잘 살면 되는 것을 가르친다는 식의 윤리나 도덕의 가르침 정도로 전락하고 마는 것일까? 왜 그렇게 우리는 사회를 주도하는 ‘무관심’에 맞서 선과 아름다움과 행복으로 특징지어지는 그리스도교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도록 할 수 없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빛의 자녀들”에게 “세상의 자녀들”에 맞서 “영리”해야 한다고 다그치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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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나오는…집사는 반박하거나 합리화하거나 낙심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탈출구를 궁리합니다. 먼저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명석하게 반응합니다.…자기 주인의 재산을 뒤로 빼돌리며 영악하게 행동합니다. 실제로 그는 그들의 친구가 되고 나중에 그들로부터 보상을 받기 위해, 빚진 사람들을 불러 주인에게 진 빚을 줄여줍니다. 부패를 통해 친구가 되고, 부패를 통해 치하를 받는 것은,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세태와 같습니다.…예수님께서는 불의를 권면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민함을 권면하시기 위해 이 사례를 소개하십니다.…다시 말해 영리한 약삭빠름이 섞인 행동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게 해준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 키워드는 비유의 마지막에 나오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라는 예수님의 초대에 있습니다.…
“불의한 부富”는 “악마의 배설물”이라고도 불리는 돈이며, 일반적으로 물질적 재산입니다. 부富는 장벽을 세우고, 분열과 차별을 조장하도록 부추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하시며 진로를 바꾸라고 당신 제자들을 초대하십니다. 재산과 부를 관계로 변화시킬 줄 알라는 초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물보다 더 가치 있고, 재산의 소유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생에서 결실을 맺는 것은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부”, 다시 말해 하느님께서 주신 여러 가지 선물을 통해 많은 결속, 많은 관계, 많은 친구를 만들고 활기차게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루카 16,3)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이나 우리의 실패 앞에서, 항상 선을 통해 우리가 저지른 악을 치유할 시간이 있다고 보장해주십니다. 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부당하게 (재물을) 훔친 사람은 필요에 처한 사람에게 (재물을) 주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영민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에게 칭찬을 듣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식하고 하늘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현명함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9년 9월 22일, 삼종기도 훈화, 출처. 한글판 VaticanNews)』
기꺼이 나누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