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십자가 현양 축일(요한 3,13-17)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거룩한 십자가의 승리(축일의 공식적인 영어 이름: The Exaltation of the Holy Cross)를 기념하는 날이다. 이 축일은 전승에 따라 4세기경부터 예루살렘에서부터 전해져왔다는 오래된 축일로 알려진다. 이 축일은 전승에 따를 때 세 가지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326년경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께서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를 발견한 사건, 335년 예수님의 무덤 위에 부활 기념 성당을 지어 봉헌한 사건, 그리고 페르시아인들이 약탈해 간 그 십자가를 628년(혹은 630년)에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되찾은 사건 등과 연결된 축일이다.(참조.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교황 세르지우스 1세(650년경~701년)에 의해 교회의 축일로 자리를 잡았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축일이 9월 14일로 고정되었다.

“십자가의 승리” “영광” 혹은 “십자가를 높이 들어 올림(현양現揚, 거양擧揚)”이라는 축일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들렸을 것 같은 축일의 이름이다. 사형 도구요 형틀인 십자가를 찬양하듯 높이 들어 올린다는 말 자체가 이상한 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는 나라 식으로 얘기한다면 “전기의자를 드높이!”라든가, “교수대를 드높이!” “단두대를 드높이!” 정도에 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십자가는 로마 제국 시대에 로마 제국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이를 훼손하는 이에게 국가의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에게 자행하는 끔찍한 테러 행위였고, 이는 특히 지배를 당하는 이들에게 끔찍한 공포였다. 그리스도교가 이러한 십자가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 때문이다. 부활이 없는 그리스도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예수님은 그토록 끔찍한 십자가형의 희생자이셨으나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다. 부활을 체험한 그리스도교인들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섭리로 십자가가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었음을 알았다.

하느님의 힘이요 지혜인 십자가

그리스도인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라 2,19)라고 말하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 자기 몸에 십자가를 그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선포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자기들의 죽음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할 것임을 믿고 산다. 바오로 사도와 함께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3-25)라는 믿음을 고백한다.

십자가 현양: 십자 나무로 나무의 쓴 맛을 낫게 하시고 사람에게 낙원을 열어 주셨으니 주님, 당신께서는 영광 받으소서. 이제 저희가 생명 나무에 이르는 것을 더는 막지 않으시니 주님, 당신께서는 영광 받으소서. 죽으실 수 없는 분께서 나무에 못 박히시고 악마의 올무를 끊어내셨으니 주님, 당신께서는 영광받으소서.

저를 구하고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당신을 찬미하고자 제가 깨어 있사오니 오, 그리스도, 하느님, 사람의 친구이신 분이여! 천상 군대의 주님, 제 영혼의 비참함을 아시니 당신의 십자가로 저를 구하소서. 오, 그리스도, 하느님, 사람의 친구이신 분이여! 오, 그리스도여, 당신께서는 불보다 더 밝고 불꽃보다도 더 빛나게 당신의 십자가를 보여주셨나이다. 병든 이들의 죄들을 태워버리시고, 기꺼이 십자가 처형을 받으신 당신을 찬송하는 저희의 마음이 빛나게 하소서. 그리스도, 하느님, 당신께 영광이 있어지이다! 그리스도, 하느님, 당신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셨으니 당신의 수난을 기리는 저희의 찬미를 받으시고, 저희를 구원하소서!(비잔틴 전례문에서)」

영광의 십자가

십자가는 무엇보다도 사형 집행 도구인 나무틀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실제의 고문과 고통, 죽음을 이야기하는 형틀이다. 치체로Cicerone나 타치토Tacito가 “가장 잔혹한 형벌”이라고 불렀던 십자가이다. 구약의 토라는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갈라 3,13 참조. 신명 21,23)라고 묘사하면서 인간 사회에 해악을 끼친 자, 곧 하느님과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은 자에게 죽음을 내리는 그 현장이 바로 십자가임을 가리킨다. 인간의 역사 안에서 권력을 쥔 종교적·정치적 세력이 종종 결탁하여 위험하다고 판단한 이들을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백해야만 한다. 다양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독재자들이 얼마나 많은 폭력을 행사해왔는지, 또 행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러 사회적·문화적·종교적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진정으로 그분께 영광이 아닌 것으로 자칫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영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십자가 형틀에서 소모되고 잃어버리게 된 어떤 누군가의 안타깝게 죽어간 삶의 표징일 뿐으로 여겨버릴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형수 누군가의 죽음 기억이나 상징이 아니다. 인간을 “끝까지”(요한 13,1), 원수들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을 “끝까지” 사랑한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다. 교회는 교회가 이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매년 성금요일이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온전히 경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덕분에 드러난 예수님의 영광, 사랑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해서 4세기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가톨릭과 정교회가 기념하는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 교회 안에 자리를 잡았다. 올해에는 이 축일의 장엄함과 엄숙함이 연중 제24주일의 전례를 앞선다.

영광스러운 십자가라고 하지만 죽음의 도구요 형틀 자체가 그리 영광스러울 수는 없다. 그렇지만 십자가 위에서 살아내신 예수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워야만 한다. “영광”은 구약의 언어로 ‘카보드(כבוד, kabod)’로서 ‘무게, 무거움(명예와 존중, 존엄)’을 뜻한다. 하느님의 영광은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나라와 행위로 인간의 역사 안에 지우시고 남기신 무게이며 흔적이다. 예수님께서는 로마 제국의 전체주의 권력과 그것을 부추긴 유다의 종교 권력에 의해 이 형벌을 받으시고, 그 안에서 당신 사랑의 무게와 존엄, 곧 영광을 “끝까지” 드러내고자 하셨다. 인간적으로는 하염없이 무력하고 버림받았으며, 내쳐지고 모욕과 조롱이 되며 일개 사형수로 보였지만,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과 무게를 보여주셨다.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은 듯 보여도 그 아버지 사랑의 뜻에 순명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이다. 잔인하고 끔찍한 십자가는 그렇게 빛나는 영광의 표징이 된다. 나무에 높이 매달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게서 들어 올려진 영광의 왕으로 드러나신다.(참조. 요한 8,28;12,32-33) 예수님께서 머리에 쓰신 가시관은 그분을 거부하는 인류를 섬기는 왕의 신분을 그렇게 드러낸다. 손과 발, 옆구리의 상처는 그 어떤 앙갚음이나 보복이 없이 인간의 폭력을 묵묵히 받아들이셨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그분께서는 증오와 원한과 폭력의 사슬을 끊으신다.(참조. 이사 53,5-6.12)

그렇게 공관복음과 다른 시각을 가진 제4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영광의 사건으로 읽는다. 십자가형을 왕위에 오르신 메시아의 대관식처럼 해석한다. 조롱과 신성모독의 불경함들을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을 드러내는 호칭으로 읽는다.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요한 19,19)라는 명패는 히브리 말, 라틴 말, 그리스 말 곧 ‘사람이 사는 모든 땅(오이쿠메네oikoumene)’의 언어로 기록되어 선포된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필리 2,9)이 선포되는 것이다.

공관복음뿐이 아니라(참조. 마르 8,31;9,31;10,33-34 및 병행구), 제4복음서에서도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필연’이다. 불의한 이 세상에서 의인은 결국 거부되고, 심판을 받으며,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참조. 민수 21,4-9)라고 말씀하시면서 들어 올려진 사람의 아들을 믿음으로 보는 이마다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또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믿음으로 바라보게 하시고 사람들을 이끌어 들이시는 분이시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는 세속적인 힘과 영광 안에서 승리하는 슈퍼맨이 아니라 이사야 예언자가 기록한 대로(참조. 이사 53,2-3) 부서지고 망가졌으며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고,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이시다. 그렇지만 그분만이 다른 이를 위해 진정으로 당신의 생명을 내어 주실 수 있는 “의로운 분”(루카 23,47)이시다.

사랑의 표징인 십자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사랑의 표징이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두 팔을 벌려 나무에 못 박히시고, 모든 이를 끌어안아 살리시고자 당신 생명을 바치신 종이 되셨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보고, 우리 죄의 결과를 보며,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찬미하며 그분의 십자가에 영광을 드려야 한다. 그분의 십자가를 높이 들어올려야 한다. 나의 계획이나 생각을 들어 올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드러난 놀랍고도 신비한 그 사랑을 형제자매들에게 나눠야 한다. 아무것도 없이 “끝까지” 가난해지신 그분의 가난 모습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우리의 가난을 나눠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곁에 평생을 사셨던 성모님의 모범과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남아야 한다.

거룩한 십자가의 현양 축일에 내 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욱 자주 긋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욱 자주 바라보도록 은총을 청해야 한다. 십자가의 영광으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 그리스도여, 영광중에 어서 다시 오소서. 아멘!

———————————-

※오늘 복음의 구절들을 위해서는 13절을 제외한 해당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 「사순 제4주일 (요한 3,14-21) https://benjikim.com/?p=8844」를 참조할 수 있음

※더 읽을거리: 십자가 https://benjikim.com/?p=15349 / 십자가 곁에 서 계신 성모님 https://benjikim.com/?p=14123 / 십자가 호칭 기도 https://benjikim.com/?p=2151

2 thoughts on “성 십자가 현양 축일(요한 3,13-17)

  1. 십자가를 자주 긋고.
    습관처럼
    기도하셨던 모니카 친정 엄마를
    추모합니다.
    사랑과 희생의
    십자가.
    제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지
    묵상하는
    주일 아침입니다. 감사합니다.

SHL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