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그리스도교를 그저 바라만 보거나 그리스도교에 관하여 탁상공론이나 벌이려고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언제나 불편한 스캔들이요 “걸림돌이며 어리석음”(참조. 1코린 1,23)이고, 십자가를 둘러싼 비유와 표징들 역시 그러하다. 그리스도인에게조차 바오로가 코린토 1서 1장 17절에서 고발한 것처럼 “십자가를 헛되게 하려는” 유혹은 되풀이된다. 비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와 십자가를 둘러싼 논리가 비인간적이거나, 고통을 그릇되게 해석하려는 잘못된 시도로 비칠 뿐이다. 언제나 그래왔다. 더구나 물질적 풍요, 부와 안락함, 값싼 쾌락 추구, 그리고 기술적으로 가능하고 경제적으로 달성 가능한 것은 곧 합법적이고 바람직하다는 확신으로 특징지어지는 현시대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매우 미묘하게 십자가가 제거되고 있음을 우리 모두는 날마다 목격한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의 토대 자체가 더는 분명하지 않고, 흐릿하며, 안개 속에 묻히고 만다.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교

그리스도인의 삶을 오직 부활의 표징 아래에서만 보고 그렇게만 드러내려는 시도들을 한 예로 들 수 있다. 그런 이들은 그리스도교를 알리더라도 그리스도교가 그저 끊임없는 축제라는 듯이, 불편한 십자가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십자가를 감추어 알리고 싶은 시도들을 벌인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가장 기본인 입문 성사인 세례 성사의 전례에서마저도 십자가는 중요한 본질 중 하나인데도 요즘 새로운 입문자들이나 젊은이들에게 “포기”라는 요구와 규율, 원칙,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짊어짐과 같은 내용을 입에 올리기조차 부담스러워하면서 이렇게 불편한 내용들을 벗겨낸 매혹적인 복음만을 제시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지 모른다!

십자가를 헛되게 하려는 시도들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비그리스도교적인 웅변가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변주하면서,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제거한 채, 꽤나 지적이고 설득력 있는 그럴듯한 담론으로 포장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제안하는 장면을 점점 더 자주 목격하게 된다. 어느새 우리 교회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극도로 가난한 교회의 구성원들 때문에 조롱받던 2세기의 교회와는 몹시 다른 교회를 산다. 오늘날의 교회에는 자선과 가르침을 역설하는 위대한 스승으로서 예수를 칭송하고,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중요한 존재와 집단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려는 그리스도인으로 넘쳐난다. 그 대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 삶의 태동이자 영감의 근원인 십자가 사건을 희미하게 만들고, 가리며, 망각 속에 밀어 넣고 만다.

그러한 교회 옆에는 “새로운 황제”가 있다. 4세기 교부인 힐라리오(포이티에르스의 힐라리오Ilario di Poitiers)께서 묘사한 옛 황제처럼 그는 “교묘하고 달콤하게 아첨하며, 우리의 등을 채찍질하지 않고 배를 어루만진다. 우리의 재산을 뺏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부유하게 만들어 생명을 주는 대신 죽음에 이르게 한다. 감옥에 가두어 해방으로 이끄는 대신, 궁정으로 초대하고 영예롭게 대접하여 노예 상태로 이끈다. 우리의 몸에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도 마음을 점령한다. 칼로 우리의 목을 끊지 않고도 돈으로 우리의 영혼을 죽인다.”(<콘스탄티우스 반박Liber contra Constantium>, 5) 이렇게 눈에 띄게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십자가는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얼마나 끈질기게, 또 얼마나 강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지 말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했던가!

성금요일과 십자가

그리스도인에게 적어도 1년에 한 번, 성금요일에는 십자가가 온전히 그 현실과 진리 속에서 신자들 앞에 놓인다. 나자렛 예수, 한 인간, 랍비, 예언자가 벌거벗은 몸으로 나무에 매달려 계신다. 저주받은 자, 파문당한 자, 하늘과 땅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자로서. 제자들에게 버림받은 사람, 수치스러운 형벌의 목격자들 앞에서 멸시받으며 죽어가는 사람. 그분은 의로운 예수이며, 불의한 세상 속에서 살았기에 그렇게 죽어야 했던 이다. 그분은 죄인처럼, 하느님께 버려진 사람처럼 죽어가지만 끝내 하느님께 충실했던 믿음의 사람이셨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성부께서는 그분을 죽음에서 부활로 이끄심으로 응답하실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십자가 사건, 오늘날이 아니라 기원후 30년 4월 7일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바로 그 사건조차도 비유나 표징을 통해 비워져 버릴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한갓 비유나 표징 정도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십자가 안에서 거북함을 느껴온 “종교인들”이나, 십자가를 어리석다고 판단한 “세상의 지혜로운 자들”처럼 되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만 한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가 곧 “하느님의 지혜”(1코린 1,21.24)이며,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표현 그대로 십자가 사건이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고 말한다.

옛 인간을 죽이기 위한 사형 도구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을 고통주의나 체념으로, 혹은 예수의 삶 전체를 십자가만으로 읽어내도록 초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의 삶과 그분의 죽음 방식, 십자가 처형은 살아 계신 하느님, 곧 악한 자들마저 사랑하시고, 당신의 원수들을 용서하며, 거부당하고 살해당하면서도 죄인의 회개와 생명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이야기임을 드러내야 한다.

십자가는 또한 우리의 악함, 악에 현혹된 존재, 죄인으로서의 불의함을 고발한다. 그래서 “의로운 분”(루카 23,47)께서 고난을 당하고, 거부되고, 단죄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 그렇게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표징이 되었다. 그렇지만 어떨 때 그 십자가는 승리주의적으로 과장되었고, 또 어떨 때는 장식용 목걸이로 축소되거나 미신의 몸짓으로 전락했으며, 또 단순한 일상적 역경의 은유로 희화화되었다. 십자가가 우리 안의 옛 인간을 죽이기 위한 사형 도구(참조. 로마 6,6 갈라 2,19;5,24;6,14)로 남지 않는다면, 십자가는 더는 사건이 깃든 표징이 아니라 기만이 된다.

루터는 십자가를 묵상하며, 교부들의 가르침을 되새겨 이렇게 쓴다: “하느님을 그분의 영광과 위엄 안에서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분을 십자가의 굴욕과 치욕 안에서도 알아야 한다. …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안에 참된 신학과 참된 하느님 인식이 있다.”

*이 글은 Enzo Bianchi의 <Le parole della spiritualità, Rizzoli, 1999년, 101-104쪽>에서 따온 글의 번역문이다. 관련 글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alzogliocchiversoilcielo.com/2010/09/la-parola-della-croce-enzo-bianch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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