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7장
우리는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자연 본성상으로는 지니고 있지 않다
독수리란 놈은 심장이 매우 크고 힘이 세어서 높이 나른다. 그러나 높이 나르는 것보다도 비할 데 없이 뛰어난 시력을 지니고 있어서 날개깃보다 훨씬 더 민첩하고 요원하게 시야를 넓힌다. 이와같이 하느님께 대한 자연 본성적이며 거룩한 경향에 자극되어 생기를 얻은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신성을 사랑하는 의지의 힘보다도, 그가 얼마나 사랑함직한 분인가를 보는 오성悟性의 빛을 훨씬 더 가지게 된다. 죄라는 것은 사람의 지성을 어둡게 하는 것 그 이상으로 사람의 의지를 약화시킨다. 그리고 흔히 우리가 정욕이라고 부르는 감각적 욕구의 반동은 실로 우리의 지성을 흩어놓고 특히 우리의 의지를 거역하여 혼란과 선동으로 뒤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이미 약화된 그 비참한 의지는 정욕이 일으키는 끊임없는 유혹에 흔들려 우리의 이성과 본성적 경향이 우리에게 암시하고 요구하는 대로 하느님의 사랑에 있어, 그다지 큰 진보를 못 하게 된다.
애석하여라! 테오티모여, 하느님께 대한 지식에 관해서만 아니라, 하느님을 향하는 세찬 경향성에 대해서, 저 훌륭한 철인哲人들, 즉 소크라테스Socrates, 플라톤Plato, 트리스메지스투스Trismegistus,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세네카Seneca, 에핔테투스Epictetus 등은 얼마나 훌륭한 증거를 남겼는고? 이중에서도 가장 찬사를 받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하느님의 단일성에 대한 아주 명료한 지식에까지 이르렀었고, 그를 사랑하려는 그러한 경향을 느꼈었다!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증언하듯이, 많은 이들의 견해로는 소크라테스가 진심으로 바라고 있던 것은 사람들에게 윤리 철학을 가르치려 함이 아니었고, 오히려 마음을 순결하게 함으로써 좀 더 잘 최고의 선善 자체를 관상케 하려고 함이었으니, 이 최고의 선은 곧 하느님의 신성의 유일한 단일성이었다.(신국론, VIII, 3) 그리고 플라톤만 하여도 그는 철학과 철학자에 관한 정의 속에서 자기 견해를 넉넉히 밝히고 있으니, 철학을 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철학자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일 따름이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신국론, VIII, 9) 그리고 하느님의 유일성을 매우 효과있게 입증하고,(아리스토텔레스가 쓴 형이상학에 나온다. Metaph, LXII 10, De Mundo의 끝에 나옴) 그 여러 곳에서(여러 외교인 현자들과의 토론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자주 거기에 대해 성의껏 영예롭게 이야기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오! 영원하신 하느님, 당신의 착하심을 사랑하려는 그럴듯한 경향을 지녔으면서도 그 위대한 이들은 모두 당신의 착하심을 충분히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용기가 결핍되어 있었나이다! 저들은 눈에 보이는 만물을 통해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사물들을 알아보았고, 더구나 사도께서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로마 1,20-21)라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물론 어떤 형식으로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고 가장 높은 공경의 칭호를 드리기는 하였으나 타당한 방법으로 충분히는 아니하였다. 다시 말하면, 만유 위에 섬기지 아니하였고, 우상숭배와 투쟁할 만한 용기를 내지 못하였었다. 오히려 우상숭배에 빠져 마음은 불의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그것을 진리라고 고집하며, 하느님께 공경을 드리기에 앞서 자기들의 삶에서 헛된 명예와 안식을 취하며 그릇된 지식의 추리를 따를 뿐이었다.
테오티모여, 플라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그가 죽는 자리에서 여러 잡신에 대하여 말하였다니,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그처럼 잘 터득하였으면서 그런 말을 남긴 이 철학자가 얼마나 가엾은가! 그리고 하느님의 단일성의 진리를 그처럼 똑똑히 깨달았던 플라톤이 그 여러 잡신에게 희생의 제사를 올리게 한 것도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 또한 메르쿠리우스 트리스메지스투스Mercury Trismegistus가 하느님의 신성에 대해서 그처럼 여러 번 합당히 이야기하였으면서도 우상의 제대가 파괴되는 것을 그토록 비통해하였다는 것은 그 얼마나 애석한 일이랴?(신국론, VIII, 12, 23, 24)
그러나 특히 이들보다도, 저 가엾은 호인, 에픽테투스에 대하여 나는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문장을 우리는 우리말(불어)로 잘 읽을 수 있으니, 이 번역은, 골 지역에 있는 훠이양회Feuillants in the Gauls의 관구장인 성 프란치스코의 요한John of St. Francis 신부가 요즈음 우리에게 내놓은 것이다.(1609년 파리의 Heuqueville에서 발행된, ‘그의 제자이며, 그레시아의 저술가인 아리아노가 수집한 에픽테투스의 담화-Les Propos d’Epictete, recueillis par Arrian, Auteur Grec, son disciple’) 그런데 이 철학자가 하느님께 대하여 말할 때, 마치 어떤 그리스도인이 깊고 거룩한 묵상을 한 끝에 말하듯이, 그렇게 마음에 들게 감정을 움직여서, 분발심을 돋구는 말을 하면서도 그의 여러 작품에서 이교인들의 잡신에 대하여 말한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일이랴? 슬프도다! 하느님의 단일성을 그처럼 잘 알고 있었고, 그처럼 선량했던 사람이 어째서 하느님을 공경하기 위한 거룩한 분발심을 가지지 못하였으며, 그처럼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오류에 빠져 있을 수 있었는가?
테오티모여, 한마디로 말해서, 죄로써 몹시 상처받은 우리의 본성은 마치 먼 나라에서(저자가 이 책을 쓰고 있던 지방) 옮겨 심은 저 야자수와 같다. 이 나무는 여기서도 좀 불완전하게나마 그런대로 열매를 맺어주지만, 그것이 제대로 익은 맛 좋은 과일이 되기 위해서는 더운 지방의 기후라야 한다. 이처럼 우리의 인간적 마음도 자연 본성적으로는 하느님을 위한 사랑의 싹을 조금 돋게 한다. 그러나 만물을 초월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이르는 참된 그 성숙이란 하느님의 지극히 높으신 선에까지 이르러야 얻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천상적 은총으로 생기와 도움을 입은 마음에만 속하는 거룩한 애덕의 상태인 것이다. 우리의 본성이 저절로 그 충격을 느끼는, 이 작고 불완전한 사랑은 다만 의지意志가 없는 원의에 불과하고 무력하고 성과를 걷을 수 없고 반신불수병에 걸린 원의이므로, 거룩한 사랑의 건강케 하는 연못물을 보면서도 힘이 없어서 뛰어들지 못하는 원의인 것이다.(참조. 요한 5,7) 대체로 이런 원의가 선의에서 나오는 것만은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하느님을 참되이 사랑한 만큼, 세찬 힘을 갖지는 못하고 있다. 죄인의 입장으로 사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외치고 계시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로마 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