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일은 미사 전례의 입당송이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라고 시작하면서 기쁨으로 부르는 초대를 담았으므로 “기뻐하여라(laetare)”, 곧 “기쁨 주일”이라 부른다.
지난주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요한복음이 전해 주는 바에 따라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 곧 하느님과의 통교 자리라는 선언의 말씀을 들었다.(참조. 요한 2,19.21) 오늘 전례의 복음을 들으면서는 참 어려운 대목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요한 복음사가는 자신의 복음에 사실 자신이 기록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인간적인 비전을 뛰어넘는 깊은 비전, 오직 예수님 안에 신앙을 지닌 이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비전,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상호 통교에서 이루어지는 시선에서 영감을 얻은 비전을 담았다.
오늘 복음이 수록된 요한복음 3장은 예수님과 니코데모라는 유다교 지도자 간의 대화이다. 니코데모는 “최고의회 의원(요한 3,1)”이었고, “이스라엘의 스승(요한 3,11)”이었으며, 구약에 정통한 것으로 보아 바리사이였을 것이다. 니코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간다. 그는 훗날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할 때 그와 함께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가져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를 바르고 아마포로 감싸 아무도 묻힌 적이 없는 새 무덤에 예수님을 모셨다.(참조. 요한 19,38-42)
니코데모는 성전 정화 사건을 두고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요한 3,2)께서 일으키신 “표징”이라 하면서, 예수님께 “위로부터 태어난다(=물과 성령으로 태어난다)”(요한 3,3.5)는 것의 의미,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요한 3,9)를 여쭙고, 결국 예수님께서 ‘누구이신가?’를 질문드린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요한 3,10) 하는 말과 함께 자세한 설명을 듣는다. 이는 니코데모와 예수님 간의 대화이지만, 동시에 유다인들을 비롯한 주변인들과 초대 교회 간의 대화라고 볼 수도 있다. 오늘 복음은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를 대비하여 예수님의 신원, 구세사 안의 예수님의 역할, 생명과 죽음, 믿음과 구원, 그리고 심판, 빛과 어둠, 진리와 악 등에 관하여 문학적 대조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분을 믿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밝힌다.
복음사가 요한은 우리 현재의 달력으로 보아 기원 후 30년 4월 7일, 금요일, 파스카 축제 전날 골고타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목격했다. 치체로가 『극도로 잔인하고 끔찍한(Contro Verre II,5,165)』이라고 기록을 남긴 것처럼 복음사가 요한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처절한 고통, 그리고 사형 집행인들이 가한 수치스럽고도 잔인한 죽음과 조롱, 경멸의 현장을 목격했다. 자신의 눈으로 이 모든 것을 목격했던 요한은 그렇지만, 주님의 부활 이후 충만한 믿음을 얻고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이 모든 사실에 관해 공관복음 사가들이 보는 시각과는 아주 다른 필치로 볼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기록한다. 공관복음은 일관되게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해서 제자들에게 세 번(참조. 마르 8,31-33;9,30-32;10,32-34과 각각의 병행구) 예고하실 ‘필요’가 있었으며 제자들이 이를 두려워했었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요한복음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예고를 세 번 하실 ‘필요’가 있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는 있으나 전혀 다른 필치로 기록한다. 즉, 공관복음이 못된 이들의 악행, 고문, 십자가에 달린 분에 대한 경멸이라는 차원에서 이를 기록하는 것에 반해 요한복음은 주님의 다시 일어나심, 곧 “영광”이라는 차원에서 이를 기록하고 있다.
1.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 한다.”(요한 3,14)는 첫 구절을 통해서 요한복음이 전하는 첫 번째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예고를 듣는 셈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땅으로부터 “들어 올려져야” 했지만, 요한 복음사가에게 예수님께서 땅으로부터 들어 올려지신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몸이 땅으로부터 들어 올려지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높이, 영광스럽게, 영광스러운 존재로, 당신의 영광을 계시하기 위해, 들어 올려지셨다는 사실이었다. 영어 번역에서 ‘be lifted up’이라고 하는 것을 희랍어에서는 ὑψόω(휩수hypsóo)라고 하는데, 이는 δοξάζω(독사죠doxázo)로 대치될 수 있는 말(영어에서 ‘be glorified’)로서(참조. 요한 7,59;8,54 등) 요한 복음사가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들어 올려지신 것은 곧 성부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다는 것이 된다. 그런 뜻으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십자가에 매단) 뒤에야 ‘내가 나’(‘나는 있는 나’egó eimi, 하느님께서 밝히신 하느님의 이름. 참조. 탈출 3,14)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요한 8,28)라고 말씀하시고, 나아가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요한 12,32) 하신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들어 올려지심’은 이중 복합의 뜻을 담은 말로서 수난과 십자가의 시간이지만, “영광”의 시간이며(참조. 요한 12,23;13,31-32)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당신께로 “이끄시는” 시간이다. 이런 의미로 제4복음서에서 수난과 부활은 같은 신비이고, 하나의 신비이며, 서로 갈라질 수 없는 신비이고, 사랑의 공현公顯(epiphany) 순간이다.
사실 십자가에 관한 복음사가 요한의 이와 같은 내용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결코 받아들이기에 상당히 어려운 내용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고,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참되고 심오한 내용임이 틀림없다. 십자가는 실제로는 고문과 사형의 형틀이었지만, 또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εἰς τέλος, eis télos) 사랑하셨다.”(요한 13,1)라는 사실을 밝혀주기 위해 휘장과 베일을 ‘걷어 올리심’(계시, re-veil<revelation)이었고 ‘들어 올리심’이었다.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신명 21,23)요 “저주받은 몸”(갈라 3,13)으로서 하느님과 인간에게 버림받은 죽음이었다. 하늘에서도, 그리고 땅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하늘과 땅의 중간인 허공에 못 박혀 달리셨으나, 그러셨기에 하늘과 땅을 화해하도록 하실 수 있었으며, “당신의 몸으로” 인간을 가르는 모든 “장벽”을 허무시고(참조. 에페 2,14-16) 인간 자체를 하느님께 인도하여 인간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열어주신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한 분이 버려져 죽음을 맞았지만, 바로 그분께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라는 사실을 몸으로 쓰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내용이 복음사가 요한이 읽어낸 십자가의 역설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성경의 전문가인 니코데모에게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요한 3,10) 하시면서 하느님의 심오한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스승”에게 계시하시고 밝혀주신 복음이다.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의 이러한 ‘필요성’을 설명해 주시기 위해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나 광야의 긴 세월을 보내야만 했었음을 비교하고자 하셨다. 민수기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평하다가 “불 뱀들”을 만나 속절없이 죽어가므로 모세가 하느님께 청하고 답을 얻어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고…(뱀에 물린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4-9) 이러한 옛이야기는 지혜서의 저자에 의해 다시 해석되는데(참조. 지혜 16,5-14), 지혜서의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리 뱀”이 “구원의 표징”(지혜 16,6)이 되었다고 설파하면서 “구리 뱀”이라는 사물은 단지 “표징”이었을 뿐이며 “자기가 본 것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신 당신 덕택에 구원된 것”(지혜 16,7)이라고 정확히 알려준다.
성경에서 “뱀”은 마귀 또는 사탄이라고 불리는 “옛 뱀”(묵시 20,2), 하와를 유혹한 하느님 배반, 죄, 그 독성으로 인간을 위협하는 것의 상징이다. 반면에 “구리 뱀”은 생명, 치유, 하느님께로 돌아옴의 상징이다. 같은 ‘뱀’ 안에 죽음이 있고 생명이 있다. 요한 복음사가는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들어 올려져야만” 사람을 살리고, 예수님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내가 나임을”(요한 8,24.28;13,19 참조. 창세 3,14) 믿고 깨달아야만 할 것이라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뱀이 들어 올려지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뱀으로부터는 죽음, 곧 인간이 죄를 짓게 하는 결과가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무 잘못이나 흠이 없으신 주님께서 마치 죄의 벌로 죽음이 주어진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뱀의 독, 죄, 곧 죽음, 이 모든 것들을 없애버리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2.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하늘 일”(요한 3,12)을 설명하시면서 “사람의 아들”은 들어 올려져야 할 필요가 있고, “하느님께서는 세상(모든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요한 3,16) 하시고자 하였다는 계시를 주신다. 하느님은 사랑하시는 분, 당신의 외아들을 내주시는 분, 그 아드님을 들어 올리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그분이 바로 “사람의 아들”이시고 “하늘로 올라간 이”(요한 3,13)이시다.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하늘에서 내려온 이”가 십자가 위에 들어 올려지는 것이 하느님께서 인간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극단적으로 드러내심이다. 하느님께서는 달리 표현할 길 없는 당신 사랑을 그렇게 드러내신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설명하시면서 말씀해주신 내용, 곧 당신 아드님이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음을 맞는다는 사실을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내팽개치고 버리셨다는 식이 아니라 그것이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셨는지, 그렇게 드러내셨다는 사실을 알아듣도록 매우 주의해야만 한다.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하느님 당신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란 하느님을 누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를 내어준다는 것은 진정 위대한 사랑입니다.(성 토마스 아퀴나스, 1224/25?~1274년)』
3.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구원을 받게”
인간을 위한 선물이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내어주고, 생명을 일깨우며, 생명을 전하면서 그렇게 당신의 삶을 사신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이 되시는 아드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당신 사랑에 대한 응답과 반응으로)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예수님의 현존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심판”과 “멸망”을 선택할지 “구원”을 선택할지, “어둠”을 선택할지 “빛”을 선택할지를 놓고 각각 선택하도록 요청한다.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났으니 인간이 “멸망”과 “심판”을 받도록 운명 지워진 것이 아니고 그 각자의 선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3,18)
그런데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요한 3,19) “어둠”은 악의 세력을 의인화한 것이다.(참조. 요한 1,5)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사랑한 것은 하느님 탓이 아니라 사람들 자신들의 탓이다. 빛보다 어두움, 즉 하느님과의 영생의 교제가 아니라 하느님과의 단절된 삶을 사랑한 사람들의 탓이다. “심판”은 단죄나 처벌이 아니라 “빛”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 “어둠”의 지배를 지속해서 받는 상태이다.(참조. 요한 8,24;12,35.46-47) 『사람들은 빛을 찾지 않았고, 아예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빛이 그들에게 비쳤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빛을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349년경~407년)』
이처럼 “심판”과 “멸망”은 교회의 어떤 교리나 사상, 혹은 어떤 윤리적 가르침을 거부하는 것이라기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것으로서 “외아들의 이름”(요한 3,18)을 믿지 않는 것이고 희망과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다. 한편에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우리 가운데에 사신 외아드님을 통해 세상 모든 인간을 위해 주어진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 있어 그 사랑에 사랑으로 응하는 쪽이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반대로 그 사랑을 거부하고 믿지 않으면서 미움과 증오, 그리고 죽음의 어둠에 스스로 갇혀 그 사랑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제4복음서에서 믿음과 신앙은 항상 ‘사랑의 작용’이다.
이렇게 우리 앞에 놓인 길이 있다.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사람, 곧 진리를 행하는 이들은 자기 안에서 하느님 자신이 일하시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을 안다. 믿는 이들은 그렇게 “영원한 생명”을 이미 산다. 바오로 사도께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라고 말한 그대로이고, 예수님께서 “나는…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라고 말씀하신 그대로이다. 이렇게 구원을 바라는 세상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내어주시고 사랑하는 외아드님을 내어주신다.
『많은 이가 자기 죄를 사랑했으나 많은 이들이 그 죄를 고백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들의 죄를 따지실 때,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죄를 스스로 고발하면 여러분은 하느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의 행실을 미워하고 여러분 안에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따르지 않고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빛으로 나아온 것은 하느님께서 여러분들을 비추어 주시고 당신의 진리를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여러분들을 우울하게 하는 여러분들의 죄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성 토마스 아퀴나스, 1224/25?~1274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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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주일
“거듭남”,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생물학적 탄생),
되어가는 존재,(테르툴리아노), 아니, 거듭나야 하는 존재이다.
‘들어 올려지신 분’을 믿는 믿음으로 거듭나야 한다.(믿음의 탄생)
하느님의 마음에서 시작한 생명, 영원한 생명,
그래서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 나라를 볼 수 없다.
들어 올려지신 분
요한복음이 말하는 첫 번째 수난 예고인 셈
“들어 올려지다”- 요한 3,14;8,28;12,32-34
아드님의 영광과 인간을 향한 하느님 사랑이 계시되는 순간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요한 12,32) 하신 그대로
온 인류를 데리고 하느님께로 돌아가시는 순간
들어 올려진 광야의 뱀(민수 21,4-9) – 치유, 생명을 되찾는
뱀을 바라보면서 뱀에게 물린 상처를 치유 받고 다시 살게 된다
밤에 찾아온 니코데모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밤이라는 어둠에서 벗어나고, 하느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위로부터 태어나야”(요한 3,3.5.7)
놀라서 “이미 늙은 사람이…?”라고 되묻는 니코데모에게
“바람의 소리를 들어도 듣지 못하는”(요한 3,8) 인간의 일, 땅의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일, “영에서 태어난”(요한 3,7.8) 영의 일
“세상 일”이 아닌 “하늘 일”(요한 3,12)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하늘로 올라간 이”(요한 3,13)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요한 3,14)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3,13)
하느님의 일, 오직 믿음
뱀에 물린 상처로 죽게 된 인간들이 뱀을 보고 나아 살아나듯이
사람의 아들이 들어 올려지면 그를 보고 믿는 이들이 생명을 얻게 된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요한 6,29)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요한 6,16)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요한 3,17)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온 존재를 다하여 믿는 것, 이것이 인간의 부르심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높이 들리신 분이 하시는 것
자기가 무엇을 어찌해보려는 인간의 몸부림과 어리석음을 넘어
믿음이 인간을 낫게 하고, 살린다
빛과 어둠
믿음은 “빛으로 나아가는 것”(요한 3,20-21)
악을 행하는 이들은 자기 악행이 드러날까 봐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요한 3,20-21)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은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고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21)
빛으로 나아가는 길은 쉽지 않으니
두려움에 사로잡혀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
나를 살리는 빛, 치유의 빛, 나의 죄 때문에 내가 결코 수치를 당하지 않는 빛,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빛, 자유로 나아가게 하는 빛, 진리로 나아가게 하는 빛의 길
언제 어느 인생길에서도 하느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 잃을 것이 전혀 없는 길
기쁨 주일의 이미지는 뱀처럼 높이 들리신 사람의 아들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 우리에게 매일 생명의 선물을 주신다
우리 눈을 멀게 하고 죽이는 빛이 아니니
오직 그분만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믿으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모든 일은 오직 사랑, 성실한 사랑, 영원한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수난에 들어가기 직전에 다시 한번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요한 12,48) 하실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