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국 하나의 가설이지만, 일반적으로 복음 중 맨 먼저 쓰였다고 보는 마르코복음은 661절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600절 이상이 1068절에 달하는 마태오복음에 담겼고, 350절 이상은 루카복음에도 담겼다. 한편 마르코복음에는 없는 내용을 마태오와 루카는 230절 정도 공유한다. 각 복음서가 담은 고유한 절의 수는 마태오가 330절, 마르코가 53절, 루카가 500절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처럼 마르코복음이나 마태오복음, 그리고 나름대로 수집한 구전口傳 자료를 종합하거나, 마르코는 보지 못하였을지라도 마태오가 보았고 자기도 보고 참조했을 ‘공통문헌’이 있다는 전제 아래(이른바 Q문헌, 공통문헌, 이출전설二出典說) 이들을 면밀하게 참조하여 편집하고 배치하면서 자기 복음을 기록했다.
오늘 복음의 24절 ‘좁은 문’에 관한 절은 마태 7,13-14에서, 그리고 ‘집주인과 밖에 서 있는 사람의 대화’ 부분인 25-27절은 마태 7,22-23에서 각각 찾아볼 수 있다. 이 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마태 8,11;19,30;20,16;25,10-12 등을 더하고 종합하면서 루카 복음사가가 오늘의 복음을 편집 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 대목에서 우리는 다소 가혹하거나 엄하고, 과격하거나 위협적이라고까지 느낄 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 당신의 스승이었을 세례자 요한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나무라던 다른 예언자들처럼 청중을 흔들어대시고,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 외형적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이는 종교적 행실이 아니라 엄한 심판과 판단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 그 나라에 받아들여지거나 내침을 당할 수 있으니 이를 위해 조심하여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촉구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을 기쁜 소식이요 복음으로 받아들인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엄한 말씀만을 하셨다기보다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 그저 습관적인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져있거나 영적인 수면이나 혼수상태에 있는 우리를 일깨우시고자 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저 듣기에 좋고 귀에 다디단 말씀만이 아니라 때로는 이처럼 무겁게 다가오는 말씀도 구원의 길을 가는 데에 꼭 필요한 말씀임이 틀림없다. ※더 읽기: 벤지, “힘써라”(Ἀγωνίζεσθε, 아고니제스테) https://benjikim.com/?p=15218
1.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좁은 문으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예언자처럼) 가르치셨(고 사람들이 가르침을 들으러 몰려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몰려온 군중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루카 13,22-23)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이다. 소수의 의인에게만 구원이 보장된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자비가 많은 이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줄 것인지 하는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큰 관심사이다. 예수님을 “주님(Κύριος, Kýrios)”이라 칭하면서 묻는 이 질문자처럼 많은 사람이 내심 한편에서 예수님께서 나만은 구원해 주시겠지 하는 자위 속에 살거나 다른 한편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는 의심 속에 살아간다.
구원받을 대상의 숫자에 관해 여쭙는다. 과연 구원을 받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자비로 대다수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항상 숫자에 민감하고 모든 것을 숫자로 정리하려는 속성을 지녔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질문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숫자에 관한 질문을 ‘어떤 사람’, 곧 구원받을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바꾸시어 답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답을 주시지 않고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Ἀγωνίζεσθε, agonízesthe).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하면서 시급히 요청되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선포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의 수가 아니라 “힘써야” 할 필요를 우선 강조하신다. 우리말에서 “힘써라” 하는 말씀으로 번역되는 말은 경기장에서 시합하는 것(참조. 1코린 9,25)을 뜻하기도 하면서 적을 마주하여 목숨을 걸고 위험을 무릅쓰며 싸우는 것(참조. 요한 18,36)이라는 말이 훨씬 더 원뜻에 가까우므로 “힘써라”라는 말보다도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싸워라”가 더 적합할 듯하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하는 말 뒤에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이들이 많다.”(마태 7,13) 라는 구절을 덧붙여 놓았다.
“믿음을 위해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1코린 6,12)에서 보듯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적대자와 반대자, 그리고 사탄의 세력들에 맞서 싸워야 할 싸움이요 전쟁이다. 막연한 환상이나 낭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 하였듯이 영적인 무기로 무장하고 목숨을 버릴 각오로 덤벼야 하며,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치열한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만 하는 길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이들이 가는 길이다. “좁은 문”은 누군가의 진입을 막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길 줄 아는 자가 통과하는 문이라는 말이다. 하느님 나라의 마지막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는 “좁은 문”이 닫히기 전에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 서둘러 만반의 채비를 갖춘 자들만이 지나갈 수 있는 문이 바로 “좁은 문”이다. 어느 도시나 그렇듯이 하느님의 나라에서도 밤이 되어 큰 성문이 닫히고, 이내 작은 성문마저 닫히면 아무도 더는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문”은 “좁은 문”이어서 큰 짐을 가진 이는 들어가지 못한다. 인간사에서 ‘큰 짐’은 곧 ‘죄의 보따리’를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 문은 좁아서 하느님 앞에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하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알아서 겸손하게 고개를 숙인 이들만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좁은 문”은 오로지 ‘회개’라는 통행증이 있어야만 지나갈 수 있는 문이다. 훌륭하게 싸워 이기는 사람, 정작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하느님의 나라인 줄을 아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좁은 문”이다.
2. “주님, 문을 열어주십시오…나는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청중들에게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Κύριε, Kýrie), 문을 열어주십시오.’ 하며 (애가 타서 간절히 호소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하신다. 문밖에 남게 된 사람들이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주님의 만찬인 성체성사를 거행하였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당신께서 가르치시는 말씀도 들었습니다)”(루카 13,26) 하면서 과거 집주인과의 종교적인 관계나 인연을 들먹이며 기도하고 청원을 계속한다. 문밖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 식대로 자기들이 집주인과 친하다고 생각하면서 그 친함이 집주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믿어 주인더러 제발 결정을 번복하여 문을 열어달라고 사정한다. 같은 공동체에 속했고, 함께 전례를 거행했으며, 말씀도 나누었던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것도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구체적인 관계가 동반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이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 성인은 이런 상황을 두고 『먹고 마신 그 귀한 음식이 무엇인지 몰랐던 무지한 신자들』이었다고 말씀하신다.
『…“저는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고…저는 주님의 충고를 들었고, 군중에게 하신 가르침을 들었습니다.”(루카 13,26 참조) “주님께서 가르치셨을 때 저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거듭 그들을 모른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직함을 통해 우리를 알아보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주님, 저는 그 협회에 속했고, 저는 그 몬시뇰님, 그 추기경님, 그 신부님의 지인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직함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로지 겸손한 삶, 착한 삶,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의 삶을 통해서만 우리를 알아보실 것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9년 8월 25일 삼종기도)』
그때 “집주인은(주님께서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루카 13,27) 하신다. 이어서 과거 자기들 식대로의 친밀을 과시한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 13,28-29) 하시며 그들의 논리를 반박하신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주님의 식탁에 공식적으로 앉았었다 하더라도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런 배경을 과시하며 숨어 악행을 일삼았으므로 그들에게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라 호통치신다. 문밖에 서 있게 될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공동체의 일원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를 인정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공동체의 삶은 사실 선과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요 이를 위해 서로를 지탱해주는 수단일 따름이다. 타인에게 실제로 선과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공동체의 삶은 주님 앞에 하나의 속임수요 거짓으로 취급받을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제자라는 신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전례 행위들이나 본당 공동체의 소속, 혹은 사목자들을 돕는답시고 그들을 자주 찾아가는 일들이 자칫하면 ‘거짓 보증’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일상이 진정으로 선과 정의를 실현하는 일인지 되물어야만 한다. 우리의 태도와 행실이 실제로 공동선을 실현하는지, 아니면 말로만 떠벌리면서 서로 시기 중상하며 적개심과 교만한 감정으로 분열을 조장하며 사랑에 어긋나는 행동만을 일삼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만 한다. 대개는 우리가 그렇게 폭력을 행사한 것도 아니고 더더욱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무엇인가가 필요한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이민자들, 헐벗고 병들고 갇힌 자들을 위해서(참조. 마태 25,31-46)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좀 더 할 수 있었음에도 우리가 더 사랑하지 못한 우리의 태만을 생각하면 무척 부끄럽다. 우리는 스스로 주님과 친하고 그분의 현존 안에 열심히 살아가며,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체성사로 양육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른 이들,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서둘러 헌신하는 행위로 나타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3. “안에…밖에…첫째…꼴찌”
모두 하느님의 나라 “안에(ἔσω, éso, =within)” “잔칫상”의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데, 우리만 “밖에(ἔξω, éxo, =outside)” 멀리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그날에 안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밖에 있고, 밖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상황이 예기치 않게 역전될 것이라 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보라, 지금은 (복음의 수혜자로서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30) 하신다. 역설이고 본말전도本末顚倒이다. 쉬운 말로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과 하느님이 생각하는 내가 다르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복음을 듣는 이들에게 ‘식별’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기도하고 주님 말씀의 식탁과 성찬의 식탁에 앉아 있는 일개 종교인일 뿐인지, 우리 주 예수님의 뜻에 따라 나의 삶을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꾸려가는 사람인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분에게서 길가의 거지처럼 은총을 구걸하여서라도 은총을 입어 매일 그분 말씀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며, 듣는 대로 살고, 말하는 대로 살며, 사는 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인지 식별하게 하신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회개하고, 죄를 깨닫게 하며, 우리의 소속감이나 종교적 치장이나 몸짓이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도록 촉구한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은총을 받았다면 이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나는 문이다.”(요한 10,7.9) 하신 분,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좁은 문”을 통과한 사람은 꼴찌라도 첫째가 된다. 그 “문”은 항상 열려있다. “‘오늘’이라는 말이 들리는 한…날마다…”(히브 3,13) 우리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문”, 은총의 문, 자비의 문을 통해 들어가려는 이들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