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일 ‘다’해(루카 12,32-48)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ㄴ)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계속 오르시는 여정을 배경으로 한다. 예루살렘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곧 세상을 떠나실 일”(루카 9,31), 예수님의 출애굽, 예수님의 죽음이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유다 종교계 지도자들의 적개심은 높아만 갔고, 자기들이 기대한 방식의 메시아로서 행적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일반 군중의 호감도 날이 갈수록 점점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져 감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장차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잘 아신다. 군중은 점점 실망을 더 해가고, 예수님의 삶과 사명은 실패의 윤곽이 점점 분명해지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1.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이러한 맥락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향후 2천 년을 두고 당신을 믿는 이들이 거듭거듭 감동하며, 항구한 믿음으로 묵상해온 몇 마디를 말씀하신다. 먼저 너희들 작은 양 떼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루카 12,32)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거창하고도 웅장한 건물이 아니라 마치 판잣집 같은 스무 명 남짓한 당신의 공동체,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몇몇 여성들, 이리저리 흔들리며 불안해하고 간혹 예수님의 눈치만 보는 것 같은 이들에게 다정다감하고 애정이 듬뿍 담긴 어조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사명에는 가당치도 않고, 더구나 온 인류를 위한 사명에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조그만 공동체를 향해 “두려워하지 마라” 하신다. 겉으로 보기에 약하기 그지없는 소수, 세상 그 누구로부터도 지원이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영향력은 고사하고 중요하게 보이지도 않으며 무력하기 짝이 없이 보이는 이들, 거듭 꾸중을 받아야만 하고 교정을 받으며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하신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사랑으로 이 작은 공동체에 “나라”를 “기꺼이 주기로 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 구원의 생명, 그 누구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는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작은 양 떼”라는 이미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걸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이미지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가 결코 버리지 못할 고유한 특성임이 틀림없다. 예수님께서는 유다 종교계라는 거대함과 세상이라는 현실에 비겨 상대적으로 진정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이제 갓 태어나 걸음마를 하는 것 같은 당신의 작은 공동체를 보신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우리에게 기꺼이 주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 그 나라에 우리가 참여하고야 말 것임을 믿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기뻐하려면 우리는 참으로 그분께서 실패하시는 듯이 보이고 죽으실 때까지도 그분을 따르는 그분의 “작은 양 떼”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가난한” 사람들, 회개를 바라는 죄인들, 자신을 믿기보다는 예수님을 믿어 다가올 예수님의 나라 안에 희망을 두는 사람들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말씀이 당연히 우리를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루카 3,8 참조. 마태 3,9) 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으로는 그저 인간적인 관점에서 소속감을 표현하는 빈말일 때가 많다. : 『우리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목숨이나 농사일처럼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는 일이오. 하지만 이런 두려움은, 우리의 삶과 세상의 역사가 다 같이 신의 커다란 손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단숨에 사라지는 것이라오.(파울로 코엘료)』

2.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깨어있는 종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사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루카 12,33-34) 하신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가진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그것을 다른 이와 공유하고 나누는 것뿐이다. 예수님의 “작은 양 떼”이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자신을 벗고 나누는 것이다. “가진 것”, 곧 돈과 부동산과 재화 등을 그저 경멸하고 초탈하며 도외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 이와 단순하게 공유하고 나누는 것이다. 물질적인 부富뿐만 아니고 인간 모두는 각자 자기 나름대로 “가진 것”이 있다. 힘이나 누군가에게 내어줄 수 있는 시간을 비롯하여 개인이 받은 남다른 소양이나 재능도 있게 마련이다. 이런 것들을 형제자매와 나누고 공유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두 주인”(루카 16,13 마태 6,24)을 섬기지 않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을 자기 삶의 중심에 두지 않을 수 있고, “가진 것에 사로잡히는 유혹과 “가진 것”에 매달리는 믿음과 희망을 떨쳐버릴 수 있게 된다.

이는 비록 단순하게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일생을 통해 결정적인회개”가 동반되어야만 하며, 한번 회개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에서, 죽을 때까지 매일매일 내 인생 안에서, 새롭게 해야만 하는 것이 회개의 과정이다. 돈과 재화를 비롯한 우리가 “가진 것”이 죽을 때까지 우리를 동반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자라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도자로서의 우리 삶을 돌아보면, 어느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진 것을 모두 공유하며 가난하게 살아간다고 하지만, 사목상의 필요라는 이유로, 또 예측할 수 있는 공동체의 삶을 슬기롭게 영위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우리는 우리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며, 우리가 가진 재화가 점점 축적되어가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굴레들의 포로로 전락하여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작은 양 떼”인지를 스스로 묻고, 과감하게 회개해야만 하는 순간을 또 맞는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루카 12,35-36) 하시면서 “주인”을 섬기기 위해 기다리는 “종”의 준비된 복장과 태도로 깨어 있으라 하신다. 그런 이들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7) 하신 대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다. “주인”을 주인으로 모시고, 인생에서 유일한 보물로 알아모실 수만 있다면 그런 이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런 이들에게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종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7ㄴ-38) 

예수님께서는 다른 당부의 말씀을 덧붙이신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주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영적인 몽유병이나 졸음에 사로잡히지 않으면서 잠들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눈을 뜨고 있기란 참 어렵다. 하루의 일과에서 오는 피로와 고된 봉사에서 오는 졸음, 그리고 어제와 같은 또 다른 하루에 불과하다는 따분함으로 맞는 날들의 일상에서 오는 단조로움, 이 모든 것들이 ‘깨어 있음’에 대한 유혹이며 공격으로서 이에 대한 우리의 의식과 책임을 요구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고뇌의 순간에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세 제자에게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르 14,38 마태 26,41) 하고 말씀하신 바 있다.

모든 제자와 종들이 이렇게 깨어 있어야 마땅하지만, 유달리 다른 제자나 종들보다 더 각성하고 깨어 있어야 할 책임이 있는 이들도 있다. 예수님의 “작은 양 떼”는 모두가 형제요 자매로서 모두가 깨어 있어야 할 숙제를 받았지만, 모두가 같은 책임을 진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베드로에게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16.17) 하고 거듭하여 물으셨으며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2)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두 같은 형제요 자매이며 제자들로서 하느님의 자녀라는 동등함과 형제애를 더욱 실현하기 위해 더욱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이를 구분하신다.

3. “불충실한 자들…많이 주신 사람…많이 맡기신 사람”

공동체 안에는 ‘오이코노모스οἰκονόμος, oikonomos(=economer, the manager of a household)’라는 분명한 직무, 곧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 먹을 것을 마련하고 하느님의 지혜와 말씀의 양식을 제공하도록 하는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있다. 이탈리아 말로 minestra(수프)를 제공하는 이가 ministro(부서 관리 책임자)인 것처럼 오이코노모스는 형제들이 살게 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이다. 형제를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보살피는 직무로서 종의 봉사를 수행하기에 믿을만하고(πιστός, pistós=faithful, reliable 참조. 마태 24,45), 아주 영리하고(참조. 루카 16,8) 슬기로워야(φρόνιμος, phrónimos=practically wise, sensible 참조. 마태 7,24) 한다.

그러나 이 종이 다른 종인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루카 12,45-46)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 12,47) 그러한 종은 자신을 공동체 생활의 중심에 두는 사람이고, 즉 자기 위주로 살고 다른 이의 성장을 도모하지 않은 이이며, 형제자매들과 “가진 것”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제멋대로만 사는 이, 마음에 독재나 전제주의적인 요소를 품어 자기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만으로 주변을 결성하는 이, 다른 형제나 자매가 자기 권위나 권력의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 공동체의 상호 관계를 인간적이고도 자비스러운 관계로 형성하지 못하는 이, 그저 자기 멋에 겨워 살려고만 하는 이, 자기 직무에 대한 책임감이 없이 다른 이의 결점만 들춰내면서 주어진 권위로 형제나 자매에게 낯을 붉히며 괜스레 목에 핏대나 세우는 사람… 이다.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오시는 주님께서는 그 종을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주의해야 한다. 더 많은 은총을 받은 이, 더욱 영리한 이, 더욱 재능을 많이 받은 이는 주님의 공동체에서 져야 하는 책임도 더 클 것이며 더욱 많은 요구를 받게 될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8ㄴ) 우리의 죽음 이후에 장차 그분 앞에 서게 될 때 하느님의 심판은 그저 우리가 행한 내용뿐만 아니라 양심과 책임의 정도, 그리고 각자에게 하느님께서 허락하셨던 은총의 사용에 관한 내용에 달려있다. 모든 그리스도인, 특별히 그들의 인도자요 지도자라는 이들은 종말론적인 지평에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기어이 오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깨어 기다려야만 한다. 아멘!

***

「…우리 모두 두려움으로 우리 인생을 시작했고 평생 그렇게 매일 매일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두려움의 힘과 세력이 온 세상을 꽉 채우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될 때가 많다. 내 안의 두려움이 있고, 내 주변의 두려움이 있다. 어떤 두려움은 이미 피부에 와 닿아있고, 어떤 두려움은 아직은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두려움은 빤히 내 눈앞에 와 드러나 있고, 어떤 두려움은 은밀하여 눈에 띄지 않게 숨어 있다. 어떤 두려움은 나 자신 안에 있고, 어떤 두려움은 타인의 마음 안에 있다. 우리의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들이 어쩌면 온통 두려움에서 기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일정 부분 두려움과 이런저런 연관을 맺고 있다. 어떨 때는 날 지배하고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이 두려움인 것 같다. 두려움은 나를 화나게 하고, 흥분시키며, 거친 행동으로 내몰기도 한다. 때로는 절망과 실망에서 비롯된 두려움이 나를 의기소침하게 하고, 급기야는 죽음으로까지 나를 끌어갈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두려움에 찬 아이들, 학생들, 환자들, 공무원들, 노동자들, 부모들… 이렇게 두려움에 가득 차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두려움의 포로요 노예이다. 참으로 두려움의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요 두려움으로 가득한 세상인 것만 같다. 만일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만일 이것이 이렇게 안 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식의 걱정스러운 의문과 두려움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렇다면 결국 “만일”과 “어떻게”의 포로들이고 노예인 셈이다. 개인으로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온통 두려움의 논리와 두려움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다.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 정치적인 대부분이 두려움으로 가득한 전제와 가설 아래 기득권, 영향력, 힘에 있어 유리한 고지를 먼저 차지하려는 술책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다가 걱정이 앞서고, 신경질을 부리고, 급기야 생존을 위한 마지막 방책이라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서로 죽음과 파멸로 치닫게도 된다. 

은총을 청하며 두려움의 끈을 끊어야 한다. 누군가가 두려움의 끈을 ‘먼저’ 끊기 시작해야 한다. 끊으려고 해야만 끊어지는 것이 두려움의 끈이다. 두려움의 끈을 끊고 내 안의 진정한 나를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고, 내 옆과 주변에 있는 타인을 위해서 사랑의 문을 열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발견한 나와 너를 넘어서, 조물주가 이 지구라는 별 위에 나와 너를 살게 한 의미들을 새기면서 영원의 문을 열어야 한다. 의미는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발견된다. 인생의 의미들은 순간의 각박함이 아닌 온 생애로, 온 삶으로만 답해지는 기나긴 숙제이다. 마음의 문, 사랑의 문, 그리고 영원의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게을러서이든지, 이웃을 똑바로 보기 싫어서이든지, 각박한 세상살이에 너무 지치고 찌들어서이다.(벤지)」

One thought on “연중 제19주일 ‘다’해(루카 12,32-48)

  1. 두려움의 장막을 걷어내고

    마음의 문, 사랑의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어떤 의미로
    오게 되었는지를 탐구하겠습니다.

우설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