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일 ‘다’해(루카 11,1-13)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10)

이번 주 복음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예수님의 기도와 ‘주님의 기도’(1-4절), ② 끊임없이 간청하는 친구에 관한 비유(5-8절), 그리고 그 ③ 비유의 적용(9-13절)이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시고 떠나신 소위 ‘예루살렘 상경’ 동안 예수님의 모습에 관해서 루카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 정보들에 기초하고 있다. 이 여정 동안에 예수님께서는 잠시 길을 멈추기도 하시고 쉬기도 하셨으며 기도하기도 하셨다. 예수님과 길을 나선 제자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으며 마음에 와닿는 예수님의 행동들에 관해서 질문들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 “아버지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아침나절인지 저녁나절인지, 때는 명확하지 않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11,1) 제1독서인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시려 할 때 이 벌을 면하기 위해 50명으로부터 10명에 이르기까지 에누리를 하며 하느님께 간절히 빌었다고 하는데,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셨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예수님의 기도는 다름 아닌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기도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이처럼 몸소 간절히 기도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인간의 기도가 필요 없으신 분께서 인간을 위해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제자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고, 지금도 기도하고 계신다.

‘다’해의 복음인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루카 3,21), 가르치시고 전도하시며 마귀를 쫓아내시고 치유하신 다음에(루카 4,42), 열두 사도를 부르실 때(루카 6,12-13),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해 물으시고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실 때(루카 9,18), 영광스러운 변모의 모습을 보여주실 때(루카 9,28), 베드로에게 당신의 교회를 맡기실 때(루카 22,32), 수고수난을 앞두고 마음이 괴로우실 때(루카 22,41),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당신을 못 박는 사람을 용서해주시라고 청할 때(루카 23,34),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 “큰 소리로”(루카 23,46)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 내가 주님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주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셨고, 지금, 이 순간도 기도하고 계신다. 오늘 한 번 더 나에게 새로운 날을 열어 주시고, 나를 위해 기도하신다.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어쩌면 나에게 또 다른 하루를 허락하시고 나를 한 번 더 믿어주고 계신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이처럼 조물주께서 피조물인 나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감동해가는 과정일 지도 모른다.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 공동체에 대한 응답으로서 루카나 마태오가 전해주는 바에 따라 두 가지 버전이 있는 대로, 간결하지만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루카의 버전은 마태오 버전보다 상대적으로 더 짧으면서 유다인이 회당에서 설교 끝에 함께 낭송하는 기본 기도인 카디쉬(קדיש, Qaddish =holy)에 견주어볼 수 있는 두 가지 요청, 즉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루카 11,2ㄴ) 하면서 하느님 이름의 성화聖化와 왕국의 도래라는 내용으로 전반부를 이루고, 이어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3-4) 하면서 제자들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 “죄의 용서”, “유혹에서의 해방”이라는 세 가지 요청을 담는다.

많은 말이 담기지 않고 단순하지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느님을 향한 신뢰로 가득한 그리스도인의 기도이다. 유사 이래 그 어떤 스승도, 그 어떤 시인이나 철학자도 이처럼 완벽하게 인생의 명제를 요약한 기도문을 설파한 이가 또 없었다. 그래서 성 테르툴리아노(155~240년경)는 이 주님의 기도가 『예수님 복음의 요약』이라 하였다. 초대교회 공동체 삶의 요약이며 우리 그리스도인 공동체 삶의 요약이기도 하다. 너무도 중요한 기도이고, ‘주님의 기도’에 대한 강해는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어지는 비유와 그 적용에 치중하여 ‘강해’한다.

2. “줄곧 졸라대면필요한 만큼 다 줄 것

이어지는 비유는 루카만이 전하는 비유다. 루카는 이 비유를 통해서 요청을 위한 기도가 열렬하고 고집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하느님 앞에서 확실하고도 항구한 믿음을 보여야 한다는 점을 제시하려 한다. 비유는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렸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1,5-7)이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누가…” 하면서 매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듣는 사람 중에 누구에게든지 일어날 법한 이야기로서 제삼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비유를 시작하신다. 비유는 거침없이 단숨에 읽힌다. 비유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로 끝난다.

아무리 친구라 하더라도 처음에는 요청을 들어주지 않으려 하다가 “줄곧 졸라 대면” 결국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단순한 비유이다. 누군가가 무엇을 줄곧 졸라대는 것은 아무리 친구라 하더라도 다소 귀찮고 듣기 싫은 소리이다. 그러나 고집스러운 친구의 요청이 차마 거절하지 못하도록 친구의 마음을 바꾼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하시면서 비유를 몸소 제자들의 처지에 적용하시면서 설명하신다. 비유에서 ‘기도하다’라는 동사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라는 제자의 요청에 대답의 연장선상에서 이 비유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분명하다. 한밤중에 친구를 찾아간 사람처럼 “찾아가고”, “말하고”, “졸라대라” 하신다. 그리고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 하신다. 그러면 “주시리라”, “얻으리라”, “열리리라” 하신다. 두 개의 비유가 얽혀 있다고 할 수 있는 이 대목을 읽을 때 이처럼 3가지 동사動詞들이 거듭 짝을 이루고 있음에 유의하여 읽을 것이다.

청하여라” 하심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두려워하지 말고 단순하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들어주시고야 말 것이니 청하는 것에 절대 지치지 말고 청하라 하신 것이다. “찾으라” 하심은 찾고자 하는 것이 분명히 찾아져야만 하는 가치라는 확신도 확신이지만, 때로는 어렵고 힘들며 때로는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결국에는 찾아지고야 말리라는 확신이다. 약속이 있는 곳에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고 깨어있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문을 두드려라” 하심은 안에서 그 문을 열어 나를 맞아줄 누군가가 있다는 희망이다. 그러나 때로는 반복해서 두들겨야만 할 때도 있다.

비유를 들으면서 우리에게는 금방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반복적인 간청을 왜 필요로 하시는가? 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간청을 받고 싶으시며, 우리에게서 찾아지시고 싶으시며, 우리가 문을 두드리기를 바라시는가? 과연 하느님께 그러한 것들이 필요하기나 하신가?’ 하는 의문이 앞선다. 아니다. 하느님께서 이런 것들을 필요로 하시지는 않는다. 바로 우리다. 우리 자신무엇인가를 청해야만 되는 존재이며, 찾아져야만 하고 또 찾아야만 하는 존재이고, 우리 밖에서 우리를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하는 존재가 바로 우리이다. 우리는 너무도 부족함이 없이 살아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을 간청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임을 잊어버리고 산다.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허겁지겁 부질없는 것을 애써 찾느라 하느님께서 애타게 나를 찾고 계심을 잃어버린 존재이다.

나의 귀를 때리고 내 마음의 문을 수도 없이 두들기며 문밖에 서서 ‘들으라’ 하시고 ‘열라’ 하신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무디어져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사는 존재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 나를 만나고 싶으신 주님을 위해 문을 열어야만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하지 않으시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 기도를 새기고, 그 기도가 우리의 호흡이 되게 해야 하며, 우리의 희망이 되도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간청이다.

3.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앞선 비유의 적용을 이렇게 풀어주신 주님께서는 의문문의 형태로 다른 내용 하나를 덧붙이신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 참조. 마태 7,9 이 내용은 일부 필사본에만 전한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1-13) 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이 대목에서 『“빵”은 우리 신앙인들이 서로 나누는 사랑이요, “생선”은 신앙을 처음 얻을 때의 그리스도교인의 세례 때 머리에 붓는 물과 연관된 상징이요 또한 초대교회의 징표이니 믿음이며, “달걀”은 알을 깨고 깨어나는 생명 곧 희망의 상징이니 이 비유 안에 사랑, 믿음, 희망이 모두 담겼다.』라고 설파한다. *실제 살아계신 아버지를 내다 버리고 유기하기까지 하는 패륜적인 오늘날의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부정적인 관계를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말씀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비유의 초점은 그것이 아니다.

이 마지막 부분의 예수님 말씀에 관해서는 최근 몇 세기 동안 연구가 깊지 못하여 겉핥기식으로 묵상이 되어 온 경향이 있다. “너희가 악해도(πονηροὶ, poneroí, =being evil)”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사악하다는 전제 아래 말씀하신다. 우리 안에는 충동이 있고, 우리 자신만 생각하고 우리 자신만 잘났다고 하려는 본능과 필라우티아(φιλαυτία, philautia, =self love, 자기애自己愛), 이기적인 사랑이 있다. 이런 것이 우리 인간의 조건임에도 혈연관계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간에는 대부분 서로 선을 베풀려는 경향을 보인다.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루카 18,19) 하는 말씀처럼 유일한 선善이시며 선 자체(아가토스ἀγαθὸς, agathós)이신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께서야” 무엇인가를 청하고 찾으며 구하는 당신 자녀들에게 얼마나 더 선하시겠느냐 하는 말씀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를 지상에 있는 아버지보다 훨씬 더 나쁜 아버지로 자주 만들고 말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볼테르Voltaire(1694~1778년)는 『아무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땅에 계신 아버지로 모시고 싶지 않은 듯하다.』라고 말하며, 이에 대한 화답이라도 되듯이 엥겔스Engels(1820~1895년)는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자기 친아버지보다 더 나쁘고 엄한 아버지로 여기면 무신론자가 된다.』라는 말을 남긴다. 그리스도인들이 역사 안에서 엄하신 심판관이시며 보복적이고 가혹한 하느님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여 인간이 그러한 하느님을 거부하고 부정하도록 부추긴 측면이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그 어떤 아버지보다도 더 선하신 하느님, 우리가 청하기만 하면 그 무엇이라도 내주실 좋으신 하느님에 관해 말씀하신다.

이 마지막 대목에 기도에 관한 결정적이면서도 중요한 내용이 더 담겨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가 전해 준 말씀들에서 출발하면서 그 내용을 좀 더 명확히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마태오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라고 기록한 부분에서 루카는 마태오의 “좋은 것”을 “성령”으로 대치한다. 루카는 우리가 좋다고 생각한 것이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기도는 마술이 아니다. 이교도 철학자 루크레찌오Lucrezio(BC 99~55년)가 말한 것처럼 기도는 『신들을 귀찮게 하는 것(사물의 본성, 4권 1239)』이 아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빈말을 되풀이…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 생각…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6-7) 하셨듯이 기도는 빈말과 많은 말로 하느님을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욕망을 그대로 다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고, 때로는 무지하고 이기적이면서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도 모르고 청하기까지 하는 모든 것을 충족하여주시는 분도 아니다. 우리에게 진정좋은 것”은 “성령”이다. 우리가 기도 안에서 찾고 두드리며 구할 때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임하시는 “성령”을 주신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16) 하는 말씀 그대로이다. “성령”이야말로 우리 기도의 응답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는 것을 즉시 들어주시지 않는다. 오히려 계속 청하도록 우리를 밀어붙이시면서 우리를 늘리시고 우리의 청을 확장하도록 하셔서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더 크고 더 좋은 것)을 받도록 하신다.』 한다.

인간의 찾음이 필요 없는 분, 인간의 말이 필요 없는 분, 인간에게 사정할 것이 전혀 없으신 그분께, 아쉬운 것은 우리이니 우리가 그분을 찾고, 말씀드리고, 졸라대야 한다. 사람에게 청할 것이 없으신 분, 사람에게서 찾을 것이 없으신 분, 사람에게 두들길 일이 없으신 분이 그분이시니, 우리가 그분께 청해야 하고, 그분을 찾아야 하며, 그분께 사정하면서 그분 계시는 곳을 두들겨야 한다. 그러면 설령 인간적으로 언뜻 이해가 가지는 않는 방식일지라도,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잘” 주실 것이고, 우리는 모든 것을 “잘” 얻을 것이며, 우리에게 모든 것이 제대로 “잘” 열릴 것이다. 아멘!

One thought on “연중 제17주일 ‘다’해(루카 11,1-13)

  1.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심에
    희망을 갖고
    두드리기.
    믿고.
    맡기기.
    지금 제겐 너무 절실한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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