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페우스Ὀρφεύς, 음악

야생동물을 길들이는 오르페우스Orpheus Taming Wild Animals, 194년경 로마 제국, 대리석 모자이크, 에데사 근처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오르페우스Orpheus는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의 리라 연주를 듣는 이는 인간이나 야수를 막론하고 그에게 매료되어 유순해졌으며, 수목이나 암석마저도 그의 음악에 감동하였다. 그가 연주할 때면 수목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고 암석들은 물러져 견고함을 늦추기까지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애달픈 노래에는 망령들마저 눈물을 흘렸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야 일편단심 민들레라고 웃으며 입방아를 찧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대개의 사람은 아직 인생의 반려伴侶를 애틋하게 사랑하며 산다. 오르페우스도 그렇다. 그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지옥까지 내려가 아내를 되찾기 위해 슬픈 노래를 불러야 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간신히 되찾아 지하의 세계를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조건을 순간적으로 놓치며 아내가 잘 따라오는지를 돌아보다 다시 아내를 잃고 만다. 안타까운 슬픈 사랑 때문에 잊을 수 없는 그 한 사랑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던 오르페우스는 자신을 유혹하는 뭇 여인들의 원성과 미움으로 결국 찢겨 죽는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머리만이 떠내려가면서도 노래를 멈출 수 없었던 슬픔, 그렇게 끝내 하늘의 거문고 별자리가 되어갔던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이와 슬퍼하는 이들의 노래 그 자체이다.

오르페우스는 지하에 내려가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하계下界의 신들이여, 우리들 생명 있는 자는 다 이곳으로 오게 마련입니다. 저의 거짓 없는 말을 들어주십시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하계의 비밀을 탐지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뱀과 같은 모발을 가진, 머리가 세 개인 문지기 개와 힘을 겨루려고 온 것도 아닙니다. 저는 꽃다운 청춘에 독사에 물려 뜻하지 않게 죽음을 맞이한 제 아내를 찾으러 온 것입니다. 사랑이 저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사랑은 지상에 거주하는 우리를 지배하는 전능의 신일 뿐 아니라, 옛말이 옳다면 이곳에서도 역시 그럴 것입니다.

저는 이 공포에 충만한 곳, 침묵과 유령의 나라에 맹세하여 당신들에게 간청합니다. 에우리디케의 생명의 줄을 다시 이어주십시오. 우리는 다 이곳으로 오게 마련이나 오직 일찍 오느냐, 늦게 오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따름입니다. 제 아내도 수명을 다한 후에 당연히 당신들의 수중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원컨대 그녀를 제게 돌려주십시오. 만약 거절하신다면 저는 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저도 죽겠습니다. 두 사람의 죽음을 앞에 놓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십시오.(토머스 불핀치, 그리스·로마 신화, 손길영 옮김, 스타북스, 2022년, 319-320쪽)」

음악

그림의 영감이 빛이라면 음악의 영감은 시간이다. 한 맺힌 사랑과 슬픔의 시간은 진실하고도 고귀한 노래의 가락이다. 음악은 여리고 긴 서사시이지만, 강력하다. 음악은 만국 공통어이고, 영혼의 언어이다. 친구와 함께일 때 인생길은 걸을 만하고, 음악과 함께일 때는 즐겁다. 인생이 괴롭고 우울한 비극 중의 비극이어도 음악은 황홀하다. 사람들은 감미로운 음악이 휘어잡을 때 아름다움에 휩싸인다. 음악은 자유와 해방에 대한 본능의 반응이며 슬픔과 고통에 대한 자연스러운 응답이다. 너무도 사무쳐 도저히 말로 되지 않을 때, 문화적 언사가 항상 딱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 그렇게 말이 사라질 때, 궁극에는 음악이 승리한다. 말은 같은 의미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만이 서로 공감할 수 있고, 설령 공감했다고 하더라도 일부만이 말의 무게를 제대로 알아듣는 법이다. 그러나 음악은 공감 속에서 굳이 표현될 필요가 없이 듣는 모두가 이해한다. 인생의 순간순간에서 말은 매번 부족하지만, 음악은 공명의 울림을 짓는다. 공자님도 시詩로 본성을 깨우치고, 예禮로 사람이 되며, 음악으로 (인격이) 완성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 논어, 태백泰佰, 8) 하셨다지 않은가!

사람의 첫 후손들은 농업과 목축업으로 살기 위해 도구를 만들었으며 집을 짓고 살았다. 그렇게 생존의 문제와 함께 맨 먼저 생겨난 이들은 바로 “비파와 피리를 다루는” 음악가들이었다.(참조. 창세 4,1-24) 인간 삶의 시작부터 인간과 함께했던 음악을 중심으로 맴도는 말들은 끝이 없다. 노래, 소리, 진동, 파장, 파동, 공명, 공감, 울림, 관계, 춤, 시詩, 제사祭祀, 리듬, 하모니와 심포니, 떨림, 가락, 기억, 미美, 침묵, 초월, 신비, 영혼…… 그리고 사랑이다. 사랑은 음악으로 자란다. 실로 만물이 저마다 음악을 한다. 음악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제각각 제 본성을 찾는 것이다.

그렇지만, 음악이 우리를 현실에서 떠나게 만들면 그것은 오류이다. 교황은 「(진실한) 아름다움의 체험은 우리를 현실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아름다움은 우리 삶의 일상 현실과 직접 만나게 합니다. 어둠에서 벗어나게 하고, 어둠이 변모하여 아름답게 빛나도록 합니다.(The experience of beauty does not remove us from reality, on the contrary, it leads to a direct encounter with the daily reality of our lives, liberating it from darkness, transfiguring it, making it radiant and beautiful. – 교황 베네딕토 16세, 예술가들에게 한 연설, 2009년 11월 21일)」라고 말한다. 음악은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갈망이다. 음악은 인간 마음 본질의 표출이다. 음악은 내면 깊은 곳의 외침이다. 음악은 희망과 믿음의 표현이다. 음악은 인생과 창조된 것들의 동반자이다. 음악은 지친 영혼의 위로자이고 상처 위에 덧바르는 연고이다. 음악은 위대한 순간 영혼에 돋아나는 날개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께서 「…인간, 당신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가 당신을 찬미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찬미하며 즐기라고 일깨우시는 이는 당신이시니,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을 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제1권, 1.1 – 성염 역, 경세원, 2016년, 55쪽)」라고 통찰하였듯이 끝없이 불안한 인생 여정은 우리를 하느님께 나아가게 한다. 그럴 때 음악은 조물주 앞에 선 우리 존재 자체를 깨우치게 하며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한다. 지선至善의 아름다움이 나를 휘감도록 나를 내어놓을 때, 그 아름다움은 진정 음악이다. 소리가 영혼의 음성이라면 ‘음악은 소리에 부어진 기도’(마틴 슐레스케, 울림, 니케북스, 유영미 옮김, 2022년, 429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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