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주 주일 복음은 “자비”가 단지 어떤 느낌이나 마음에 와닿는 어떤 깊은 감정 정도가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물론 자비는 분명히 이러한 느낌이나 감정에서 시작하지만, 나아가서 어떤 행동이나 실천, 실제 자비를 행하는 동사動詞로 번역되어야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던 “어떤 율법 교사”에 대한 예수님의 최종적인 답으로서 “자비를 베푼”, 그리고 “그렇게 하여라” 하시는 복음 마지막 구절에서 보듯이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을 향해서 애덕을 실천하는 “(자비를) 베풀다”, “(자비를) 하다”라는 동사動詞가 바로 “자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유명한 복음이고 잘 아는 복음이어서 또 한 번 읽는다는 식이 아니라 처음 읽는 것처럼 신중하고 정확하게 읽어 나가야 한다. 이미 여러 곳에서 여러 번 읽었던 복음 내용이므로 그저 그 내용을 이리저리 짜깁기해서 읽는 정도로는 하느님의 말씀이 지닌 품위를 훼손하는 일이 되고 만다. 오늘 우리의 복음은 전혀 새로운 복음으로 오늘 우리에게 선포되고 우리 안에 그 효력을 새롭게 발휘하신다. ※더 읽기: 아름다운 사마리아 사람(이연학) https://benjikim.com/?p=14588
1.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복음의 장면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을 시작하신 대목에 위치한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뒤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길’에서 또 하나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루카 10,25) “율법(νομικός, nomikós) 교사”이다. 이스라엘의 토라와 전통에 관한 전문가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한다. 곧 예수님의 성경 지식이나 전통에 관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하려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루카 10,25ㄴ) 하면서 유다이즘 안에서 ‘한다’ 하는 사람들 사이에 늘 논란이 되었던 고전적인 물음으로 질문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대답이라기보다 그 율법 교사 스스로 답을 할 수밖에 없도록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루카 10,26) 하고 반문하신다.
이에 그 전문가는 모든 유다인이 어려서부터 하루에 세 번씩 반복하며 잘 알고 있는 신명기(6장 4-5)의 구절, 소위 ‘쉐마 이스라엘(שמע ישראל, Shema‘ Jisra’el)’을 인용하고 또 영적인 지성을 발휘하여 레위기(19,18)에서 발췌한 내용을 추가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한다. 이에 예수님께서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루카 10,28) 하셨다고 기록하는 루카 복음사가에 따를 때, “율법 교사”는 “사랑”에 관한 두 계명 사이의 유사점에 착안하여 멋지게 해석하여 대답한 셈이 된다. 문맥상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가 말하는 “사랑”의 범주를 원수들이나 박해자들에게까지 확장하면서 동시에 그가 살아온 과정에서 깨달아 알고 있는 바를 일상에서 실천하도록 초대하기 위하여 그의 대답을 승인하셨다고 할 수 있다.
율법 교사가 예수님께 드린 질문이 비록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한 것이라지만, 인간이 가져야 할 근본적이며 유일한 질문인 것은 사실이다. 인간의 삶은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항상 더 나은 삶의 의미에 대하여 굶주림과 갈증을 느낀다. 과연 우리는 영원한 생명, 충만한 생명이라고 부르는 하느님의 선물인 놀라운 생명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죽은 다음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생명을 체험하며 살아갈 수는 없을까?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는 비결은 무엇일까?
질문하던 율법 교사는 말 그대로 613개에 달하는 율법을 준수하는 길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조항 준수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비결이라 하신다. 인류의 역사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이요 과정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하신 대로 예수님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율법 교사는 “영원한 생명”을 여쭈었고, 예수께서는 “살 것”으로 답하신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첫째요 둘째이며 두 가지인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 이들은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이다. 십자가의 세로축이고 가로축일 뿐이다. 시리아의 성 에프렘(306~373년)은 이 두 사랑을 두고 『모든 가르침은 두 날개와 같은 이 두 계명, 곧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라는 두 날개로 (인간은 하늘) 높이 날아오르게 되는 것』이라 한다.
2.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던)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했던 첫 질문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루카 10,29) 이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루카 10,30ㄱ) 그렇지만 직접적으로 응답하신 것은 아니다. 자칫하면 그의 질문에 말려 들어가 “이웃”에 대한 정의를 하게 되면 그 율법 교사가 속해 있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과 같은 범주의 한 사람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누가 이웃인가?” 하는 질문 역시 우리 인간들이 진지하게 자신에게 되물어야 할 질문이다. 나의 가족과 친지를 비롯하여 내 식대로, 또 우리 식대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선을 그어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만이 과연 나의 이웃인지를 물어야만 한다. 그들만이 우리의 이웃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그은 범주의 감옥에 갇힌 포로들로서 우리 이웃이 아닌 그들을 적대시하고 미워하며 살기 일쑤이다. 유다인들의 입장에서도 자기 민족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요 적이라고 간주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이 오히려 의무이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개념은 오늘날의 유다인들에게까지도 전수된다. “이웃”은 우리 각자가 되기로 하는 모든 이이기 때문에 “누구”라고 하는 한정된 범주에 속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시고 비유의 마지막에 또 하나의 질문으로 그 율법 교사를 이끄신다.
“어떤 사람(국적이나 사회적 신분, 종교적 소속을 알 수 없는 익명의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렸다.”(루카 10,30ㄴ-ㄷ) 별로 특별한 사건도 아니다. 오늘날 늘 우리 주변 도시에서 대낮에도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묻지 마’ 공격을 당하거나 심지어 잡혀가 인신매매에 넘겨지거나 생명을 잃기까지 하는 일 중 하나인 사건이 발생한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 10,31-32) 예루살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을 돌보는 사제와 이스라엘에서 다른 이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레위인이라는 두 종교인이 묘사된다. 율법에 정통하였을 그 두 종교인은 하느님의 처소에서 아마도 집으로 향하는 길을 가던 중에 상처 입어 다 죽게 된 그 사람을 보고도 “(멀리) 길 반대쪽으로 (걸음을 재촉하여) 지나가 버렸다.”
그들이 무심하거나 사악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아마도 “정결한 이”(민수 19,11-16)로서 시체에 가까이해서 부정不淨한 이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행복하여라, 가련한 이를 돌보아 주는 이!”(시편 41,2)라는 구절을 늘 읽고 보았으면서도 실제로 읽지 않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어떤 나쁜 짓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죄나 형제적인 사랑을 거스르게 되는 행실은 누군가에 대한 증오나 악행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무관심으로 무엇인가를 놓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후의 심판 날에 주님께서 “나에게서 떠나…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않았다.”(마태 25,41-45) 하신다는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
3. “가엾은 마음이…이웃이 되어 주었다…그렇게 하여라”
비유가 이어진다.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얼굴을 맞대고 자세히 살펴) 보고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가엾은 마음(안쓰러운 마음, 연민, 동정심, 자비심)이 들었다.”(루카 10,33) 예수님께서는 사제와 레위인이라는 전형적인 종교인 다음에 놀랍게도 사마리아인을 상정하신다. “정결한 이”라고 하는 완벽한 유다인들에 대조하여 불결하고 이단적이며 분열주의자들로 여겨져 유다인들로부터 항상 온갖 천대를 당하던 사마리아인을 대척점에 놓으신다. 비유라고는 하지만 유다인이 듣기에는 너무하다 싶은 상황이다. 그렇지만 ‘자비’는 자식을 안타깝게 보는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마음에서 우러나 본능으로 그 누구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은 마침내 곧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4-35) “사마리아인”은 강도에게서 상처를 입은 이를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긍정적인 결과가 나올 때까지 최선을 다한다. 35절,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꺼내다)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주다),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돌보다). 비용이 더 들면(비용이 들다) 제가 돌아올(돌아오다)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갚다).’ 하고 말하였다(말하다).”에서 사마리아인의 행위가 7개의 동사로 드러난다. 사마리아인의 처신이 자비의 행위라면 바로 하느님의 동작이요 행동인 셈이다.
강도 만난 이가 유다인이라는 가정에 따라서 사마리아인이 했던 행동을 돌이켜 보면, 율법 준수가 영원한 생명의 길이라고 믿던 유다인 율법 교사의 관점에서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전혀 말이 안 되는 행동이다. 사실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자신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역사 안에서 친히 인간이라는 강도를 만나 살해되신 분이실 뿐 아니라, 강도를 만나 다 죽게 된 인간과 그 인간의 세상을 찾아오시어 인간에게 다가와 기름을 붓고 포도주를 부어 인간이 입은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다시 살려주신 분이시다.
부정不淨한 이요 믿음에서 정통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 홀대를 받는 이가 ‘자비를 행하는 이’요 이웃을 사랑하는 슬기로운 이로 드러난다. 하느님의 율법이나 전통, 그리고 신앙을 떠나 도움이 필요한 이를 그저 한 ‘인간’으로서 이웃을 알아보고 그에게 다가가 봉사하며 보살피는 법을 알고 있는 이라는 사실만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비를 행하는 것’이다. 이것에 반해 율법을 잘 알고 그 법을 세세하게 따져 잘 준수하려고 노력하는 종교인이나 신앙인들이 있다. 그저 문자로 쓰여 있는 것을 잘 보려고만 할 뿐, 그 쓰여 있는 내용을 제대로 살려고는 하지 않는 이들 말이다. 그들은 대대로 전해지는 것을 알 뿐 그 율법이나 전통이 그렇게 전해진 이유와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율법이나 전통의 존재 이유는 다른 이를 섬기고 그들을 사랑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성당에 매주 꼬박꼬박 나오고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꼼꼼히 읽으면서 기도도 열심히 한다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다른 형제나 자매를 보는 척 마는 척하면서 이방인 취급을 할 수 있는지, 이는 참 신비로운 일이면서도 동시에 흔한 일임을 우리 모두 안다.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 내에 있는 ‘부정不淨한 이들의 신비’라고나 할까? 놀랄 필요는 없다. 그저 자신에게 질문을 해 보아야 한다. 나 자신이 이웃을 보지는 못하면서도 하느님을 본다고 말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완고한 의인이나 율법주의자, 교만에 사로잡혀 있는 “거짓말쟁이”는 아닌지 자문해야만 한다.(참조. 1요한 4,20) 이런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앙 공동체나 교회에 속해 소위 ‘열성분자’로 활약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선행이나 이웃 사랑에 걸림돌이 되거나 눈가리개 역할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웃은 과연 누구인가를 묻고 따져 알거나 정확히 정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힘써서 누군가에게 되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나의 인생길에 만나는 모든 이 안에 내가 되어 주는 이가 나의 이웃이다. 현대인은 어떤 의미에서 ‘이웃’이 모두 죽어 없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이웃이 없이 나와 내 가족이라는 굴레만으로 뭉쳐 고립된 인생을 적막하게 살아간다. 현대인들은 sns 같은 것을 통하여 친구도 아니고 이웃도 아닌 이들을 친구이고 이웃인 양, 면대면으로, 손에 손을 직접 잡을 수 없는 이들, 눈을 마주 보고 만나지 못하는 이들을 이웃인 양, 그들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인 양, 그렇게 착각하고 기만하며 살아간다. 현대 생활 안에서 진정한 ‘이웃’을 먼저 회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계명을 더는 살아갈 수가 없다.
비유의 끝에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 교사에게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루카 10,36) 하신다. 이에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애초에 이웃이 누구인지에 관한 물음으로 시작했던 비유는 “그렇게 하여라”라는 말씀으로 끝난다. 즉 보살핌이 필요한 이를 잘 살펴보고, 그를 안타깝게 여기며, 그가 필요한 대로 최선을 다해 돌보는 자비를 행하라는 말씀이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절)라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첫 번째 단락이 끝나는 문장이라면, 두 번째 단락 역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라고 끝난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신명 30,16)를 연상시킨다. 시종일관 대가를 셈하지 않는 자비의 실천이 선포된다.
이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특별히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를 두고 내가 가까이하기로, 되기로 한, 그 사람이 바로 나의 이웃이다. 율법 교사는 영원한 “생명”을 물었고, 예수께서는 “하여라”, “살 것이다.”로 대답하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