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카 10,25-37의 거룩한 독서(이연학 신부)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역시 그 아름다움이나 깊이에서 참으로 신비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들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각도에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먼저 성령의 비추심을 청하며 본문을 주의 깊게, 사랑에 찬 시선으로 한 번 읽어 주십시오.
우선 본문 전체의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율법 교사가 예수께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예수께서 반문으로 응하시고, 그러나 율법 교사는 ‘정답’을 내놓습니다. 이른바 사랑의 이중계명 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최종적으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그대로 하여라”(28절). 이것이 첫째 단락이고, 둘째 단락도 비슷하게 진행됩니다. 즉 율법 교사가 다시 묻고(‘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예수께서는 이번에도 즉답을 주시는 대신 비유 하나를 들려주십니다. 그런 후 다시 문답이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주시는 말씀이 또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 입니다. 그러니까, 두 차례에 걸쳐 주어진 같은 명령 사이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놓여 있군요. 이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두 번째로 같은 말씀을 다시 들었을 때, 율법 교사 편에서는 그것을 처음 들었을 때와는 다른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율법 교사가 변화되었는지 아닌지는 어쩌면 우리의 거룩한 독서에 달렸습니다. 본문은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요.
먼저 첫째 단락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조금 더 가까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율법 교사가 청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입시다. 그는 지금 ‘영원한 생명’을 자기 몫(유산)으로 원하고 있군요. 마치 레위인들이 다른 지파 사람들과 달리 그 어떤 몫도 얻지 못하지만,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 그들의 몫이기에 그런 것처럼, 이 사람도 결국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 자신만을 바라고 있다고 고백하는 셈입니다. 이렇게 대단한 말을 하고 있는 그에게 예수께서 반문하십니다. 율법에 뭐라고 씌어 있고, 그대는 그것을 어떻게 알아듣는가? 여기서 예수께서는 ‘씌어 있는 것(써진 것)’과 ‘알아듣는 것’(원문: ‘읽는 것’)을 구분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율법 교사의 흠 잡을 데 없는 대답은 어떤 수준에서 나온 것일까요. 그는 과연 ‘씌어진 것’을 참으로 알아들었을까요. 아니면 씌어진 것에 대한 훌륭한 분석과 종합의 수준에서 그친 것일까요. 만일 이 수준에서 그쳤다면, ‘가서 그대로 행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그에게 불가능한 명령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제 둘째 단락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율법 교사는 “스스로 의로운 체하려고” 새로운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할) 저의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요. 이에 예수께서 비유 이야기 한 자락을 들려주시고,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고 되물으십니다. 그러자 율법 교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고요. 자, 그러면 율법 교사의 질문, 누가 자기 이웃인지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직접 일러주시진 않았지만, “내 이웃은 너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지”라는 대답 아니겠습니까. 정확히 바로 이 자리를 우리 묵상과 기도의 출발점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순간은 예수께서 몸소 율법 교사에게(내 안의 교사에게!) ‘이웃’으로,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한 동료 인간으로 드러나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멀리서도 보고 아시며(루카 15,20) 내 아픔을 함께 지고 가시는 참된 ‘이웃’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시면서 들려주시는 이 비유 이야기에 내 마음을 참으로 열어주실 수 있다면, 이제 내 안의 율법 교사는 ‘씌어진 것’이 비로소 자기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음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루카 4,21 참조). “가서 그대로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현존 아래 서서, 이제 주님께서 몸소 해 주시는 이야기, 당신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깊이 들여다봅시다. 먼저 어떤 재수 옴 붙은 사람이 떼강도를 만나 얻어터지고 옷까지 벗겨진 채 반 죽은 상태로 길에 널브러져 있군요. 그런데 사람들이 지나갑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어떻게 하나요. 그들 행동의 공통점은 ‘보다’, ‘비켜 지나가다(지나가버리다)’라는 두 개의 동사에서 드러납니다. 보고도 그냥 비켜 지나가면 그들이 본 것은 무엇입니까. 안 본 것만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 속으로 중얼거렸을지도 모릅니다. “에이, 차라리 안 보았더라면….”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등장하네요.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들에게 한마디로 ‘밥맛 없는’ 부류에 속합니다. 재수 없는 사람, 불편한 사람, 기피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역시 유다인들에게 ‘먹보요 술꾼’으로 비쳤고, 나병환자를 거리낌 없이 만질 뿐아니라 죄녀가 자기를 만지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 위험천만하고 불편한 사람이 아니었던가요. 과연 사마리아 사람과 예수님은 서로 통하는 데가 있었군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런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마음을 쓸까요.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 심정 안다고, 쳐다보니 아마도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자, 사마리아 사람이 이제 어떤 행동을 보입니까. ‘와서(들여다)보다’, ‘측은히 여기다(가엾은 마음을 지니다)’, ‘다가가다’…. 이 가운데 ‘측은히 여기다’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사람의 아픔 앞에 선 하느님의 심정을 나타낼 때 언제나 나오는 말입니다. 그냥 안됐다고 여기는 정도가 아니라, 상대방이 겪는 아픔이 내게 전염되어 내 속(‘내장’)도 울렁거리고 진동하는 그런 상태입니다. 이런 연민의 정이 나를 덮치면, 다음 단계는 반드시 ‘다가가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다가가는 일’은 그의 여정을 철저히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끝까지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재수 더럽게 없는 사람을 측은히 여기고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은, 자기도 재수 더럽게 없어질 각오를 해야 합니다. 고통받는 사람의 상태가 요구하는 것이 귀찮고 불편하기 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더러운 곳에는 가까이 가지 말라 했건만, 우리 하느님은 철저히 가까이 가시기에 철저히 스스로의 몸을 더럽히시는 분이 아닌가 합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면서도 죄인들의 대열에 끼여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시던 분이셨고, 잔뜩 몸을 낮추어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겨 주신 분이셨습니다(요한 13장). 함께 더러워지지 않고서는 사람의 더러움을, 그 고통과 병고를 자기 어깨에 옮겨질 수 없습니다(이사 53,4-5 참조). 그러니까 ‘이웃이 되어 주는 것’, 그것은 무서운 일이로군요. 이렇듯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 안에 드러난 지극한 연민으로 넘치는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그 얼굴이 지금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 그분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내 상처와 누추함, 벌거벗음에 함께 계시는지, 얼마나 나를 사랑하며 알고 계시는지, 깊이 바라보며 오래 머물러야겠습니다.
이렇게 지금 내 가까이 계시며 내 상처를 기름과 포도주로 싸매주고 계신 분의 사랑을 체험할 때, 나도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름다운 사마리아 사람으로 계신 주님을 참으로 만날 때, 비로소 나도 아름다운 사람, ‘사람 냄새’ 나는 사람,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이 내게 품으신 그 애틋한 연민을 마음으로 알아듣기 시작할 때, 비로소 나도 동일한 그분의 연민을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낼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내가 사마리아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깨닫는 경우, 예수께서는 이제 ‘강도 맞은 사람’의 모습 속에 당신을 드러내시게 됩니다. 신비스럽고 또 신비스런 자리바꿈입니다. 그렇지요. 예수께서 여러 차례(예컨대 마태 25,40) 스스로를 가장 보잘것없는 이, 고통받는 이와 동일시 하셨습니다. 성 밖으로 쫒겨나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지신 분, 내침받고 배신당한 이(그것도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서), 소외되고 왕따 된 이…. 우리 주변에 고통당하는 이들, 쉽게 무시당하는 이들은 아직도 많은데, 흔히 꼭꼭 숨어 있습니다. 그분은 그들 안에 계시며 오늘의 사마리아 사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같이 재수 옴 붙을 각오, 불편해질 각오를 하고 가까이 다가올 그 한 사람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심히 보기, 측은지심의 물결에 마음을 열기, 가까이 다가가기, 그렇게 해서 이웃이 되어 주기. 사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복지론’의 요체입니다(정달용). ‘주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이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율법 교사의 처음 질문을 기억한다면(“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그가 이렇게 ‘주는 것’이 사실은 ‘받는 것’임을 알아듣겠군요. ‘줌으로써 받는 것’입니다. 이웃이 되어 줄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을 몫으로 받게 됩니다.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가 ‘받는 것이 사실은 주는 것’이란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이 이야기는 ‘주는 것이 사실은 받는 것’이란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이웃이 되어 줌으로써 내가 가난한 이들을 돕는다기보다 가난한 이들의 현존이 나를 복음화하고 구원한다는(장 바니에)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중 1970년대 미국 반전 가수 봅 딜런의 노래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g in the wind’을 아직 기억하고 계신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사람이 비로소 사람이라 불릴 수 있을까”로 시작하던 그 노래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 그것은 아름다운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이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세상에 아파하는 사람들의 아픔에 함께 울 줄 아는 마음[공명共鳴]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사실 하느님이 되어 가는 먼 길입니다. ‘국가’든 ‘민족’이든 혹은 더 거룩한 다른 그 무엇이든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과 관점에 함몰되지 않고, 세상의 구석진 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문제에 개인으로서 아픈 책임을 자각하는 길입니다. 때론 바보 소리를 들으며 그들이 선 곳에 함께 손잡고 서 있는 일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이 머리 위를 날아야 포탄은 지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하고 이 노래는 묻습니다. 경쾌한 멜로디에 실린 노랫말이라 마음이 더 아립니다. “얼마나 많은 귀를 가져야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우는 걸 들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야 사람은 이미 너무 많은 이들이 죽었음을 깨닫게 될까” 하고 아프게 묻습니다. 그리곤 “친구여, 그 대답은 바람 속에 실려 오지. 바람 속에 들려와”라고 대답도 해주지요.
그런데 친구여, 오늘날이라고 해서 사정이 달라졌나요? 기도 중에 귀를 잘 기울인다면, 대답은 오늘 내 마음에 이는 바람에 실려 들려올 것입니다. 성령께로부터 들려올 것입니다.[이연학, 성경은 읽는 이와 함께 자란다-거룩한 독서의 원리와 실천, 성서와함께, 2010년, 6쇄, 136-145쪽]
*착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여러 그림은 https://m.blog.naver.com/qkrwlz/221896427612 에서 비교하여 볼 수 있다. 위 그림은 생애 말년인 1890년에 들라크루아 작품을 모사한 것으로 알려지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