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일 ‘다’해(루카 10,1-12.17-20 또는 10,1-9)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3.5.9)

오늘 복음 대목은 제자들의 사명에 관한 메시지로 가득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교회가 민족들의 복음화에 관해 지녀야 할 내용과 태도에 많은 영감을 준다.

1.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앞서 둘씩 보내시며

복음의 맥락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는 이미 “사도”, 곧 ‘선교사’요 ‘파견자’라고 부르시는 열두 제자를 선발하시고(루카 6,13) 그들을 보내시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게 하셨다.(루카 9,1)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나 사마리아로 보내셨던 “심부름꾼들(앙겔루스, ἀγγέλους, aggelous, angélous, messengers)”(루카 9,52)과는 다른 이들을 지명하실 필요를 느끼신다. ‘사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자유롭고 선견지명이 있으시며 창의적이신 분이어서 선교의 시급성과 필요성에 따라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루카 10,1) “지명하시어”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선발 자격에 관한 말씀을 남기시지는 않는다. 일단 선발하시고 나서 그들이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양성 차원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서류심사나 경력조회 등을 통해) 일정 자격 요건을 갖춘 사람들을 사전에 선발하시지는 않으셨다. 선발된 제자들은 파견에 앞서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동행한 사람들이었고,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예수님의 증인들이 되었다.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하시고, “와서 보아라.”(요한 1,39)하신 주님께서 이제 “가서선포하여라.…전하여라.”(마태 10,7;11,4) 하신다. 그분께 가까이 갔고 본 것이 있는 사람은 이제 나가서 말할 것이 있다.

유다교 전통에 따르면 “일흔” 혹은 “일흔둘”은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이민족의 수數이다. 루카는 복음선포의 사명이 열두 사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굳이 밝히려 한다. 그렇게 복음의 보편적 사명을 강조하면서 모든 이민족에게 제자를 파견하셨다고 기록한다. 모세는 주님의 명으로 원로들 가운데에서 일흔 명을 불러 모은 적이 있고(민수 11,16-17 참조), 그 일흔 명의 원로들은 모세의 영을 나누어 받았고 예언도 할 수 있었다.(참조. 민수 11,25) 주님께서는 파견하시는 제자들에게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하신다. 일꾼이 주인 행세를 하려 들면 안 된다. 제자들을 파견하신 주님께서 ‘일꾼들을 청하라.’ 하신다. 이처럼 선교의 첫걸음은 “일꾼을 청하는 기도로 시작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아래에 이어지는 당부 말씀처럼 가난이 전제되지 않으면 거짓이다. 원래 추수는 종말 심판을 가리키는 상징이다.(참조. 요엘 4,13 마르 4,29 묵시 14,15 루카 3,17=마태 3,12) 그리고 종말 심판인 추수의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일꾼들이라 하시니 그들이 곧 천사들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같은 셈이다. 사제나 수도자의 성소를 두고 청해야 할 기도가 되는 구절이다.

장차 모든 민족을 수확해야 할 종말론적인 추수를 위해서 “밭의 주인”이신 주님께 일꾼을 청해야(기도해야) 한다. 다가올 왕국을 섬기기 위해, 다양한 모든 민족의 수확을 위해서는 대담하고 창의적인 새로운 형태의 일꾼이 매우 필요하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염려하시며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하시며 “일흔 두 제자”를 보내신다. 열두 제자들처럼 “사도”라는 별도의 호칭을 받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보낸다” 하셨으니, 예수님께서 몸소 가시게 될,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살아계시어 장차 가시게 될 도시들과 여러 곳에 “앞서” ‘보냄을 받은 자들’이요 ‘파견된 자들’이다. 그 제자들은 “이리 떼 가운데 양들”처럼 제자들의 필수적인 덕목과 행동 방식인 온유, 비폭력, 그리고 이리의 공격까지도 받아들이는 순응을 살아야만 한다.

둘씩 보내시며”라 한다. 유다교의 영향을 받아 초대 교회에서도 둘씩 파견하는 관례가 있었다.(사도 8,14;13,2;15,36-40) 제자들이 “둘씩”(루카 10,1)인 것은 둘 이상이어야 믿을 만하다는 증인(신명 17,6;19,15)의 요건 때문이었고, 여정 동안에 서로를 격려하고 도울 수 있다는 연대와 형제애 때문이었으니, “둘씩”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잊을 때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 선교에서 공동체성자기 확인, 상호 교정, 실수나 죄들을 함께 나누어진다는 점에서 본질적이고 필수적이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이 아니었던 순간에는 반드시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부정하는 사건들, 그리고 죽음이 있었다.(유다가 그랬고 베드로가 그러하였다) “둘”은 내가 나의 잘못을 알아차릴 수 없으므로 서로를 격려하며 동시에 교정하는, ‘형제적인 증언’이 아니면 전할 수 없는 하느님 나라의 속성 때문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래서 사도행전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바오로와 실라스, 바르나바와 마르코, 유다와 실라스 등 항상 둘씩 짝지은 상황을 기꺼이 전하고자 한다.

2. “평화하느님의 나라

예수님의 당부 말씀이 이어진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 하신다. 하느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금전이나 생활에 유용한 것들을 챙겨 넣은 보따리도 필요 없으며 “인사”를 핑계로 이런저런 인연의 끈에 얽매이지 말라 하신다. “인사하지 마라”는 말씀은 공관복음에서 여기에만 있다. “인사”와 친절, 처세, 호기심을 핑계로 수다 떨고 말만 번지르르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복음을 전하는 “길에서”라는 조건이 붙어있음에 유념할 것이다. 이는 인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식으로 교양이 없어도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부여받은 선교의 사명이 급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근동에서는 “인사”가 매우 길었다. 그런데 제자들이 전해야 하는 소식이 급하므로 본래의 사명에서 빗나가지 말라는 말씀이다.(참조. 2열왕 4,29) 많은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세상의 관광여행자로서 보고 듣느라 정신없이 수다 떨다가 시간을 허비한다. 선교사는 다른 나라에 관광비자로 입국하지 않는다.

선교사의 짐은 가벼워야만 한다. 이는 검소함과 가난함이야말로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무상성無償性, 대가를 주고 살 수 없으며 무엇인가 받을 만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지는 하느님 사랑의 은총을 더욱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파견을 받은 자들은 주님만을 의지하지만, 주님의 친구들인 제자들도 신뢰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선교사들이 이런저런 인맥을 바탕으로 대우가 괜찮은 곳이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만을 찾아다니며 강론이나 하고 모금이나 하면서 그럴듯한 사업설명을 곁들여 브로커 노릇이나 하고 살아간다면 불행한 일이고 큰일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생명과 기쁨, 그리고 화해를 비는 축복)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루카 10,5-6) 하신다.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언제나 평화를 전하는 이들이자 평화를 일구는 이들이다. 다른 이들의 평화를 빌기 위해서 먼저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와 그리스도인 공동체 구성원들의 마음을 다스리지 않는 한, 우리는 평화를 나눌 수 없다. 우리 공동체가 다툼과 분열로 치닫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이 오늘날 우리 공동체에 속하였을지는 하느님만 아신다. 현대인들은 많은 경우에 평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평화가 찾아올 때 불안해하는 습성을 지닌다.(예를 들어 소음이 없는 아주 조용한 곳에서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경우)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다니지 마라.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면 차려 주는 음식을 먹어라.”(루카 10,7-8) 하신다. 선교사의 식사와 음료는 ‘주어지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전하는 복음이어서 가난한 이들의 음식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소박하게 나누는 것이다. 나의 먹고 마심으로 배고픈 사람이 생기거나 술에 취한 사람이 생기면 안 된다.(1코린 11,20-21) 음식과 환대는 안락함이나 사치스러움, 세련됨이 아니라 그저 감사로 맞아야만 한다. 정결한 음식이나 불결한 음식에 대한 유다인들의 규정, 그리고 특정 음식에 대한 금지나 금욕적 계율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4-20) 하는 말씀처럼 선교사는 식탁에서 모든 장벽이 허물어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신다.”(지혜 11,24) 하는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며, 음식을 감사와 존중으로 대하면서 음식이란 가난하고 필요로 하는 이들과 나누어야만 하는 것(참조. 1코린 11,20-22)을 아는 사람이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이러한 내용이 그저 부수적이고 부차적인 세부 규정 비슷한 사항들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은 없는지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들은 다른 이들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가르치시는, 곧 그리스도인 스타일에 관한 중요한 말씀들이다.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0,9) 하신다. 선교사로서 사람들에게 선포해야 할 메시지는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라는 아주 단순한 내용이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인생과 역사, 그리고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다스리시도록 할 수 있으니, 이렇게 하느님을 당신의 유일한 주님으로 모시면 우리 사이에, 그리고 우리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3.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기뻐하며 돌아와

그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한길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10-11)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반대를 받으며 쫓겨나거나 박해까지 받을 수 있다고 경고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동안 당신께 닥쳤던 일들이 당신께서 파견하신 이들에게도 닥칠 수 있다고 하신다. 이런 경우에 제자들은 모욕을 모욕이나 저주, 그리고 적대감으로 갚지 않고 온유함으로 갚으면서 그 어떤 것도 취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으로 떠나라 하신다. 제자들은 욕설과 비난, 적대감의 대상이 되더라도 이에 맞서지 말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한길에 나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라도 말하라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가 시도하고 또 시도하기를 바라신다. 어제 우리를 저버렸던 사람이 오늘 우리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 발밑의 먼지를 터는 것은 고대 근동 사람들이 결별의 뜻으로 하던 몸짓이다.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하지 않은 고을에서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겠다는 뜻이다.(마태 10,14 참조)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날(하느님의 심판날)에는 (죄가 커서 멸망을 했던) 소돔(참조. 창세 19장)이 그 고을(구원의 기쁜 소식을 환영하지 않은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루카 10,12) 하신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죄도 더 크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셨는데, 일흔두 제자(서른여섯 팀) (임무를 완수하고)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 마귀들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제자들에게 복종했는데, 제자들은 마귀들의 복종 때문에 기뻐한다. 제자들은주님의 이름 때문”이고 주님 은총의 도구였기 때문에 기뻐해야 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루카 10,18)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활약으로 사탄이 하늘에게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보셨다고 말씀하신다. 아직 결정적으로 사탄이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악마의 권세와 악을 쳐부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하신다. 죽음 저 너머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하늘 나라에서도 제자의 생명은 계속될 것이니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기쁨은 악마 따위를 복종시키는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인의 참 기쁨은 오직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함에서 온다.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불 못에 던져졌다.”(묵시 20,15)

이렇게 거행한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자는, 또 교회는 주님께서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그리고 원하시는 곳으로 추수할 일꾼들을 많이 보내 주십사고 청해야 한다. 그렇지만 선교의 시급한 요청에 직면하여 예수님께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파견될 새로운 이들을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도 기억해야만 한다. 교회 역시 새로운 형태의 사목을 창설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굳건한 믿음과 용기, 그리고 성실한 믿음을 언제나 새롭게 하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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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 복음에서 건너뛴 부분: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선포하셨고 많은 기적으로 이를 촉구하셨던 “코라진”과 “벳사이다”를 두고 예언적인 말씀을 하신다.(참조. 루카 10,13-14) 또한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루카 10,15) 하는 말씀을 통해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고 활약하셨던 카파르나움을 두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던 고대 바빌론을 두고 이루어진 예언(참조. 이사 14,13-15)을 다시 예언하신다. 이러한 심판의 이미지는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렇지만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열정과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점, 그렇지 않으면 허무한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운명이 되고 만다는 점을 강조하신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말씀을 이어가신 주님께서는 끝으로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루카 10,16)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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