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승천 대축일 ‘다’해(루카 24,46ㄴ-53)

“예수님께서는 그들(제자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by Maria Cavazzini Fortini

암브로시안 전례력을 따르는 곳이나 미국의 몇몇 교구들은 부활 제7주일을 지내지만, 이탈리아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많은 곳에서는 부활 후 40일째(부활 제6주간 목요일)에 지내는 주님 승천 대축일을 주일로 옮겨 지내는데, 전례적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기리는 일곱 번째 주일의 의미를 상실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루카복음의 저자와 사도행전의 저자는 동일 인물로 알려지는데, 루카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 곧 루카복음의 마지막 장면으로 예수님의 승천을 기록하고, 이어서 교회의 시작과 활동을 기록하였던 사도행전의 첫 장면으로서 예수님의 승천을 기록한다.(오늘 제1독서) 이렇게 루카는 하나의 사건을 복음서의 마지막 장면과 교회의 시작 장면으로 삼는다. 복음사가 중에 예수님의 승천기를 전하는 이는 마르코와 루카뿐인데, 마르코는 단 한 줄로(마르 16,19) 묘사하는 반면, 루카는 사도행전(사도 1,9-11)과 함께 예수님의 승천기를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부활과 승천은 사실 같은 사건을 단계적으로 조명한 신학적 이해이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승천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후 “사십 일” 후에 일어나는 것으로 기록되지만(참조. 사도 1,3), 루카복음에서 주님의 승천은 빈 무덤이 발견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자들에게 나타나신 날(참조. 루카 24,1-1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날(참조. 루카 24,13-35), 마침내 모든 제자가 예루살렘의 어떤 집에 모여 있던 날(참조. 루카 24,36-49), “주간 첫날”(루카 24,1), 곧 ‘끝이 없는 날’의 늦은 저녁에 일어난 일로 기록된다. 루카는 유일하고도 독특한 부활 사건을 두 가지 모습으로 기록하면서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사실 부활은 주님(Kύριος, Kýrios)께서 하느님의 오른편 영원한 생명에 오르심(승천)이고, 성령께서 내려오심(성령 강림, 참조. 사도 2,1-11)이다.

루카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부활 당일에 승천하신 것처럼 묘사하고, 사도 1,3에서는 부활 하신 후 40일 만에 승천하신 것으로 기록한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셨다고 하는 같은 신비를 말하는 두 가지 방법이다.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가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분이 되셨다는 말이며, 때와 곳을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일을 몸소 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때와 곳에 매이지 않으심은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과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로 오늘 제1독서는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라고 한다. 제자들은 하늘을 쳐다보고만 있을 수 없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다시 돌아간다. 거기서 성령을 받고 힘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심을 알 수 있었고, 이에 증인들이 되어 힘차게 나아갔다.

예루살렘 어떤 집에 “열한 제자와 동료” 제자들이 모여 “주님(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신” 일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여기에 엠마오에서 “곧바로” 돌아온 두 제자도 합류하였고, 그들은 그들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 등, 자기들의 체험을 나누었다.(루카 24,33-35)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루카 24,36) 당황한 제자들에게 당신의 손과 발을 확인해보라고 하신 주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시기까지 하시더니(참조. 루카 24,36-42)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루카 24,44ㄱ) 하시면서 이전과는 다른 당신의 상황을 가리키듯이 말씀을 시작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스승이요 예언자이시며 사람이었던 분으로서 “전에…말씀”하셨으나, 이제는 살아계신 주님으로서, 그들이 오랫동안 들어왔던 아람어나 인간적인 음성으로만이 아니라, 하느님 성령의 힘, 부활하신 분의 권능, 새로운 방식, 더욱 설득력이 있고 효력이 있는 말씀으로 말씀하신다.

1.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다시 살아나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에 관하여 성경의 말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루카 24,44ㄴ)과 당신께서 하신 말씀이 지난 행적을 통해서 모두 이루어져야 했음을 밝혀주시고,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루카 24,45) 해 주신다. 그리고 제자들이 알아들을 만하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루카 24,46ㄴ) 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경에 기록된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했음을 상기시키신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제자들이 전에는 알아듣지 못하던 것을 깨닫게 된다. 제자들은 수도 없이 읽었고 들었을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의 말씀들이 성취되었음을 알고 깨우치며 신앙의 빛으로 믿게 된다. 사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필요성을 여러 번 언급하셨지만(참조. 루카 9,22.43ㄴ-44), 당시 제자들에게는 수수께끼 같았고 하나의 스캔들일 뿐(참조. 루카 9,45)이었다.

2. “너희는 증인높은 데에서 오는 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요 체념할 수밖에 없는 숙명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세속적인 시각에서 볼 때 불의한 세상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참조. 지혜 1,16-2,22) “의로운 분”(루카 23,47)에 관한 말씀의 성취요, 구세사 안에서 볼 때 구세주 예수님께서 구원자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명하시고 기꺼이 세상의 모욕과 조롱을 참아 받으시며 죽기까지,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어 성경의 말씀을 이루신 결과이다. 이와 같은 성취와 완성으로 비로소 우리의 믿음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느님 편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모든 인간에 대한) 죄의 용서를 위한 (인간 편에서의) 회개가 그(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그 자리에 있던 열한 제자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이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이)이 일(그리스도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증인이다.”(루카 24,47) 하신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그 자리에는 열한 제자만이 아니라 다른 동료 제자들도 모두 함께 있었다.(참조. 루카 24,33) 믿으면서증인이 된다. 회개를 요구하고 죄의 용서를 허락하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면서증인이 되어간다.

“증인”은 『영혼이 육신 안에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서 그 혼이 되어야 한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349~407년),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제38항)』어떤 면에서 세상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려고 하는 이는 많으나 증인이 되려는 이들은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세상은 스승보다는 더욱 많은 증인을 필요로 한다.(교황 바오로 6세, 1897~1978년)』는 말씀 그대로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증인”이 되라 하신다. 당장 우리 자녀들 앞에서부터 신앙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고 예수님께서 지상 생활을 마치실 때 우리에게 부여하신 마지막 임무이다.

예루살렘”은 제자들의 집이 있던 곳,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주님을 뵙고 돌아와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알렸던 곳, 주님께서 시몬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셨던 곳(루카 24,34), 모두 모여 주님을 이야기하고 있던 곳, 주님께서 몸소 제자들 가운데 서시어 평화를 빌어주신 곳(루카 24,36), 공생활 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바를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신”(루카 24,45) , 성령께서 임하신 곳, 예수님께서 죽고 묻히셨으며 부활하신 바로 그곳이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으나, 이제 사도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땅끝에 이르기까지”(사도 1,8) 예수님의 구원 사건을 선포할 것이다. “모든 민족들에게”라 한다.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까지도 복음을 선포하게 될 것이다.(사도 2,39;10,43-48 마태 28,19)

예수님, 나자렛 사람, 마리아와 하느님의 아드님, 하느님께서만 우리에게 허락하실 수 있는 분께서 “사람이 되시어”(요한 1,14) 우리에게 오셨다.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루카 1,68) 하시러 오셨으니, 우리가 지은 죄를 벌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죄를 용서받아 구원됨”(루카 1,77)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분께서는 세상의 모든 미움과 폭력, 거짓과 못된 행실을 당신 몸에 다 받아 안으시고, 이를 “끝없는” 사랑으로 갚으신 “의로우신 분”이시어서 “하느님의 모상…모든 피조물의 맏이(하느님께서 원하신 원래의 모습인 아담)”(콜로 1,15)이심을 그렇게 보여주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 부정한 자들과 창녀들, 강도들과 도둑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하나 되시고, 하느님께 오르시어 그들을 용서해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라고 끊임없이 간구하셨다. 돌아가시기 전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며,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 23,43) 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이렇게 한없는 사랑과 자비를 사신 주님을 스승으로 두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배워 그분을 증거하는 “증인”인 제자들은 이 내용을, 이 내용만을 세상 모든 민족에게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강론이고 가르침이며, 선포이고 증거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며, 가난한 이를 섬기며, 병든 이, 고통받는 이, 죄인들과 연대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모든 민족들”을 용서하고 용서로 초대하는 기쁜 소식(복음)이야말로 지상 순례자요 파견된 자이며 선포자인 우리 그리스도인, 곧 교회의 일이다. 그렇지만 교회는 자기들이 부여받은 이 임무를 제쳐놓고 부여받지 않은 다른 내용을 증거하고 싶은 유혹에 곧잘 빠진다. “이 일(만)의 증인”이 되는 일은 믿기 어렵고 현실성이 없는 것 같아서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렇지만, 부활절 늦은 저녁에 함께 모인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이해했으며, 깨우쳤고, 오로지 “죄의 용서”만을 위해 투신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연약한 제자들에게는 진정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하느님의 성령)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8-49) 하신다. 하늘에 오르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을 힘, 하늘에서 오는 힘,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를 동반하시며 우리에게 활력을 주시는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

3.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복음사가 루카는 예수님의 승천에 관하여 일찍이 예언자 엘리야를 주님께서 하늘로 들어 올리시며 하늘로 데려가시는 모습을 회상하면서(참조. 2열왕 2,1-12) 그와 같이 묘사하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제자들, 이미 ‘너희가 증인이다.’라고 말씀해주신 제자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라고 기록한다. 이는 땅에서 하늘, 하느님의 나라로 오르시는 예수님의 출애굽이다. 복음사가 루카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를 어떤 식으로든 훼손하거나 약화하지 않으려고 세심하게 노력한다. “손을 드시어…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계속 이어져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게 되었다는 것을 기록한다. 예수님의 “강복”은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강복이며, 당신의 제자들을 “성령”에 잠기도록 하시는 “세례”이다.(참조. 루카 3,16)

강복”은 루카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마지막 동작이다. 루카복음 제1장에서 즈카르야에게 천사가 나타나 메시아의 오심을 알릴 때 사제인 즈카르야에게 내리지 않고 정지되었던 강복을(참조. 루카 1,21-22) 이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사제의 강복으로 베풀어 주신다. 예수님의 강복을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루카 24,52) 예수님의 강복은 예수님의 공동체가 예수님과 떨어지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공동체를 기쁘게 하면서, 동시에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1베드 2,9) 하는 말씀대로 예수님의 공동체가 “사제단”이 되게 한다.

주님의 축복으로 모든 것은 이제 기쁨 안에서 끝난다. 제자들은 주님의 축복으로 힘을 얻는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루카 24,52) 마침내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께 경배한다. “예수님께 경배”하는 제자의 모습은 루카복음에서 이곳이 유일한 대목이다. 복음은 경배의 예찬으로, 그리고 기쁨의 찬미로 막을 내린다. 이제 “그들을 떠나신” 예수님을 두고 ‘크게 슬퍼해야 할사도들이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복음은 기록한다. 루카에게 예루살렘은 구원 소식의 출발점이고(1,5-25), 예수님의 사명 수행의 목적지이다.(9,51) 그리고 이제는 사도들의 복음 선포가 퍼져나가는 중심지가 된다.(사도 1,8) 예수님의 강복을 받은 제자들은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루카 24,53)

제자들의 불신앙이 살아계신 예수님, 하느님이요 주님이신 분을 믿는 신앙으로 극복된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신 후에도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분으로 그들 가운데에 항상 함께 계심을 느낀다. 하늘로 오르신 주님에 대하여 성경은 더 이상의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는다. 성경은 다만 주님의 승천 뒤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만을 기술한다. 그러므로 승천기는 그 초점이 하늘에 있지 않고 지상에 있다. 바야흐로 성자께서 하늘에 오르시고 성령께서, 그리고 성령의 힘이 내려오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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