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르심은 하느님께서 한 인간의 생명을 이 땅에 허락하시고, 그 생명 안에 세우신 고유 계획이다. 어떤 이는 이를 쉽고도 분명하게 찾고, 어떤 이는 고통 속에서 찾아가며, 또 어떤 이는 못내 찾지 못하기도 한다.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지으신 생명이 감히 함께 써 내려가는 성소聖召 이야기는 세상의 사랑 이야기나 인생이 다 그렇듯이 자기만의 사연이 있고, 극적이며 감동적이고, 반전의 연속이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 돌아본 부르심의 여정은 거기까지만 보아도 누구에게나 도저히 헤아릴 길 없고 우연 같은 섭리의 연속이다. 인간이 그리는 성소는 하나의 이유인 것 같아도 대개 여러 이유가 합쳐진 복합 동기에서 시작하고, 그 진행 과정은 완성이든 끝내 미완이든 점진적이다. 환경과 원만한 주변이나 이웃 덕택에 처음부터 별 고민 없이 자기 부르심의 길을 무난하게 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죽는 순간까지 자기만이 아는 비겁함 속에 숨어 가슴을 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지만, 자유 의지를 지닌 우매한 인간 편에서 그 부르심을 찾고 살아가는 과정은 대부분 멋대로의 자기 의지를 거스르는 일이어서 순응이라기보다 늘 반항이요 후회이며 아픔이다.
다음은 교황 프란치스코의 자서전에서 발췌한 그의 성소聖召 이야기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카를로 무쏘, 희망(Spera), 이재섭 외 3인 옮김, 가톨릭출판사, 2025년, 189-200.228-232.241-245쪽> 중간에 만나는 괄호 안의 숫자는 해당 책의 쪽이다.
※참조. 마태오의 부르심 https://benjikim.com/?p=5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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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11장 편도나무 가지처럼
Come il ramo del mandorlo
1953년 9월 21일, 그날은 약속이 잡혀 있었습니다. 월요일이었지만 축제의 날이었죠. 남반구의 봄이 시작되는 날이었고, 본당 친구들과 저는 오래전부터 이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습니다.
‘봄의 날’<*‘봄의 날(El Dia de la Primavera)’은 아르헨티나에서 매년 9월 21일에 봄의 시작과 함께 학생의 날로도 기념하는 날로, 젊은이들이 공원과 광장에 모여 음악, 춤, 피크닉 등을 즐기는 문화적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은 ‘학생의 날’이기도 해서 모든 젊은이의 큰 축제였습니다. 함께 소풍을 가고, 겨울의 습기와 한기를 쫓으려 따스한 첫 햇살 아래 몸을 뉘었습니다. 누군가는 기타를 치고, 누군가는 야외 음악회에 귀 기울이는 동안, 거리와 공원은 자카란다 나무의 보랏빛 꽃망울로 화사하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은 주로 ‘일본 정원’이나 ‘프랑스 광장’, 혹은 ‘팔레르모 공원’ 같은 수도의 명소를 찾았습니다. 한마디로, 모두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날 아침 저는 어머니를 위해 한 아주머니의 연금 수령을 도와드리는 심부름을 해야 했고, 그런 다음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전차를 타기 전, 산 호세 성당 근처를 지나다가 마치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성당 안으로 들어가라고 이끄는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그때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강렬한 것이었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한 예감마저 들었습니다. 성당에 들어서서 긴 중앙 통로 끝 제대를 바라보고 있을 때, 한 신부님이 다가오셨습니다. 매주 미사를 드리던 성당이었는데도 처음 뵙는 분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신부님은 제대 왼쪽의 마지막 고해소에 들어가 앉으셨고, 저도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연히 제 죄를 고백했고, 신부님은 자비롭고 온유하게 저를 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분명한 것은 고해소에서 나왔을 때 저는 이미 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고, 사제가 되겠다는 깊은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전에도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살레시오회 기숙학교에서 보낼 때 이런 생각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의 가능성으로 떠올랐던 그 생각은 어린아이다운 것이었고, 저 혼자만의 비밀이었습니다. 여름 방학이 찾아오고 작업실에서 청소일을 하다 보니 그 생각은 자연스레 사라졌습니다. 그 봄날(giornata di primavera) 아침, 성당에 들어설 때도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날 오후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친구들은 결국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떤 글에는 제가 약혼녀에게 청혼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쓰여 있지만, 그건 소설일 뿐입니다. 어쨌거나 정류장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무언가’ 큰일이 일어났고, 이를 모른 척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저를 위해 다른 약속을 마련해 두셨던 것입니다. 나중에 자주 체험하게 되었듯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계십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이를 “주님께서 우리를 앞서가신다”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합니다. 마치 예레미야 예언자가 본 편도나무가지처럼, 봄(primavera)이 오면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그 가지처럼 말입니다(예레 1,11 참조).<*‘primerea(앞서감)’와 ‘primavera’(봄)는 스페인어에서 어원적 연관성을 지닌다. 둘 다 라틴어 ‘primus(첫 번째)’에서 파생되었는데, primerea는 ‘먼저 오다’, primavera는 ‘첫 번째 계절’을 의미한다. 교황은 두 단어의 의미적 연관성을 통해 하느님의 선제적 은총을 봄이 가장 먼저 오는 것에 비유하는 언어 유희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분을 찾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분이 이미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도 그분은 이미 용서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시죠. 그분은 이미 거기 계셨고, 저는 놀라운 마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머니 친구분을 위한 심부름을 마친 저는 집에 가서 점심을 먹은 뒤 휴식을 취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고해소 밖에서 잠시 멈춰 서서 쉰 살쯤 되어 보이는 그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신부님, 전에는 뵌 적이 없는데, 이곳 분이 아니시죠?” 그분은 자신의 이름이 카를로스 두아르테 이바라(Carlos B. Duarte Ibarra)라고 하시며,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800킬로미터 떨어진 코리엔테스주 출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은 브라질과 맞닿아 있는 국경 지역이었죠. 저는 그 이상 아무것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제가 느낀 것이나, 중학교 시절 내내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서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날로부터 일주일을 보낸 후, 저는 몇 달 동안 계속해서 그 신부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때로는 소중한 친구 루이지 마리아 칸톤과 함께 갔습니다. 두아르테 신부님과는 점차 모든 것에 대해, 그리고 제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예수회 선교촌에서 시작된 이만 명 규모의 작은 도시 산토 토메에서 오셨고, 그곳은 파라나강을 건너 ‘통합의 다리’<*통합의 다리(Puente de la Integración)는 아르헨티나의 산토 토메와 브라질의 상 보르자를 연결하는 국제 교량이다. 1997년 개통된 이 다리는 두 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로 브라질의 상 보르자시와 이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플로레스의 사제관에 머물며 군 병원에서 백혈병 치료를 받고 계셨던 군종신부님이셨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분은 회심하신 분이었고 사제가 되기 전에는 연극배우셨다고 합니다. 교양 있는 분이셨고, 우리는 함께 극장에 가거나 오페라도 보러 다녔습니다. 한 번은 그 해 큰 성공을 거둔 그리스도교 배경의 미국 영화를 보자고 하셨는데, 예수님의 옷을 얻은 로마 군인의 회심을 그린 리처드 버튼 주연의 “수의”<수의(The Robe, 1953년)는 로이드 C. 더글러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할리우드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작품이다. 예수의 수의를 얻게 된 로마 군인 마르셀루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는 과정을 그렸다>였습니다. 나중에 저는 로사 할머니와 함께 그 영화를 다시 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만남은 이어졌고, 그분은 깊은 존중과 인간미로 저를 이해해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고, 1년 조금 넘어 두아르테 신부님은 선종하셨습니다. 병원에서 그분 곁을 지키던 저는 난생 처음으로 깊은 상실감에 목 놓아 울었습니다. 제 마음을 유일하게 나눴던 분,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게 해 주셨던 분이 떠나시면서 하느님마저 저를 버리신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고, 완전히 길을 잃은 듯 혼자가 된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바로 그때 저는 다시 한번 주님의 자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해성사를 했던 9월 21일은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베다 성인은 세리 마태오의 회심에 대해 강론하면서 한 구절을 전합니다.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 이는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바라보신 순간, 그 자비로운 눈길 속에 이미 선택이 담겨 있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훗날 저는 이 말씀을 주교 모토로, 이어 교황 모토로 삼았습니다. 저는 이를 장인이 정성껏 작품을 빚어내듯, 할아버지 프란치스코가 목공소에서 나무를 다듬어 가구를 만드시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그를 자비로 빚어 가셨다.”라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 라틴어 성무일도를 바치다가 이 구절을 발견했을 때, 주님께서 당신의 자비로 저를 장인처럼 빚어 오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로마에 올 때마다 저는 스크로파 거리에 묵으면서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카라바조의 그림 “성 마태오의 소명”<성 마태오의 소명(Vocazione di san Matteo, 1599~1600년)은 이탈리아 바로크 미술의 대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의 대표작이다. 로마의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 콘타렐리 경당에 있는 이 작품은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는 순간을 극적으로 포착했다. 카라바조 특유의 명암 대비 기법으로 어둠 속에서 비치는 빛줄기를 통해 성스러운 순간을 표현했다> 앞에 앉아 기도를 드렸습니다. 짙은 어둠 속에 흰 빛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카라바조 시대의 복장을 한 인물들로 그려진 그 상징적인 장면 앞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9월의 그날, 제가 마치 번개를 맞은 것처럼 모든 것이 단번에 결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혼 깊이 새겨진 깨달음이었지만, 사라졌다가도 다시 찾아오곤 했습니다. 강렬한 체험이었지만, 거기에는 인간적인 방어와 저항이 뒤따랐고, 때로는 잠시 묻어두었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렇게 돌아오고 또 돌아오면서 매번 더욱 강해졌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말에서 떨어진 바오로 사도의 회심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그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가 곧바로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는 광야로 갔다가,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왔습니다. 인간의 영적 여정은 천천히 진행되고, 무르익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저는 당연히 학교로 돌아갔고, 평소처럼 생활했으며 세상 속에서 살았습니다. 수업도 듣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함께 외출도 하고, 캠핑도 가고, 실험실에서 일도 하고, 가톨릭 액션과 본당 활동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제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특별한 형태의 고독을 체험했습니다. 그것은 ‘수동적 고독(solitudine passiva)’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위기를 겪거나 무언가를 잃어서가 아니라, 뚜렷한 이유도 없이 찾아온 고독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명 저는 말에서 떨어졌고, 다른 길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어두운 순간에도, 심지어 죄를 지었을 때에도, 저는 주님께서 저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비(misericordia)라는 말의 어원 그대로 주님께서는 비참한 이 misero에게 당신 마음 cuore를 여셨습니다. 제게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하느님의 신분증입니다. 자비 말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에제키엘서 16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을 때마다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갓 태어난 여자아이에 비유합니다. 탯줄도 자르지 않고 피투성이가 된 채 버려진 아이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버려진 아이가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시고는 씻어 주시고, 기름을 발라 주시고,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아이가 자라자 비단옷과 보석으로 단장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탕녀가 되었고, 돈을 받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이 돈을 주며 사랑을 구걸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약을 잊지 않으시고 그녀를 언니들보다 더 귀하게 여기실 것이며, 이스라엘이 용서받을 때 자신의 행적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게 하실 것입니다(에제 16,63 참조). 이 대목은 저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계시 중 하나입니다. “네가 언제나 선택된 백성으로 남으리라는 것, 너의 모든 죄가 용서받으리라.” 이 약속에서 저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의사가 필요한 사람은 건강한 이가 아니라 병든 이라 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신실하심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한결같으신데, 이는 당신 본성을 저버리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이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성실하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니 그러한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2티모 2,13). 우리는 하느님을 부정할 수 있고 그분을 거슬러 죄지을 수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언제나 신실하신 분으로 남아 계십니다. 저는 제 죄들을 기억하고 그것들을 부끄러워합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저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결코 아무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이것이 제 자신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의입니다. 이는 그저 말뿐인 것도, 논리적 기교도, 문학적 표현도, 연극적 몸짓도 아닙니다. 저는 카라바조의 그림 속 마태오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자비로운 눈길을 주신 죄인입니다. 그래서 교황으로 선출되었을 때 수락하겠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와 무한한 인내를 믿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Peccator sum, sed super misericordia et infinita patientia Domini nostri Jesu Christi confisus et in spiritu penitentiae accepto.)”
제가 이 말을 여러 차례 강조한 것에 누군가 놀란다면, 저는 오히려 그 사람이 그렇게 놀란다는 사실에 더 놀랄 뿐입니다. 저는 제가 죄인이라고 느끼고 확신합니다. 주님께서 자비로운 눈길로 바라보신 죄인입니다. 그래서 2015년 볼리비아 사도 순방 중 팔마솔라 교도소의 재소자들에게 이렇게 저를 소개했습니다.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저는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수많은 죄에서 구원받았고, 지금도 구원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이 저를 바라보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저는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15일이나 20일마다 고해성사를 받습니다. 고해성사를 받는 이유는 하느님의 자비가 여전히 제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의 자비를 신뢰해야 합니다. 그 자비는 우리를 변화시킬 힘이 있습니다. 언제나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법령이 아닌 어루만지심으로 용서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모든 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원한다면,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전통과 과거의 기억은 하느님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열어 줄 용기를 우리에게 건네야 합니다. 마촐라리 신부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죠. “이천 년의 역사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어도 우리는 늘 새롭습니다. 복음이야말로 영원한 새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늘 규율적인 해결책만을 찾고, 교의상 ‘안전함(sicurezza)’을 지나치게 추구하며, 잃어버린 과거를 완고하게 되찾으려 하는 사람들은 정체되어 있고 퇴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신앙이 살아 있는 체험이 아니라 수많은 이념 중 하나로 전락해 버립니다.
제게는 확고한 교의적 신념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의 삶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속에 현존하십니다. 어떤 이의 삶이 비록 파탄에 이르렀거나, 악습이나 마약이나 그 무엇에 의해 무너져 버렸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모든 인간의 삶 속에서 그분을 찾을 수 있고, 또 찾아야만 합니다. 가시덤불과 잡초가 뒤덮은 땅이라 해도, 좋은 씨앗이 자랄 수 있는 자리는 언제나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단순히 심리적 평안을 주시는 데 그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불안한 마음을 달래주는 진정제가 아닙니다. 그분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이 일하십니다. 새로운 삶의 희망을 주시고, 우리가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현재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제가 죄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오히려 그때 제가 가장 타락한 사람일 것입니다. 성모송을 바칠 때 우리는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타락한 이들의 어머니는 아니십니다. 결코 그러실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이들은 어머니를 팔아넘기기 때문입니다. 가족에 대한 민족에 대한 소속감을 모두 팔아 버립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영혼을 어둠에 내맡기는 선택을 하고, 마음의 문을 안에서 잠가 버립니다. 스스로를 가두고 그 문을 이중으로 잠급니다. 세리 마태오는 매국노였고 죄인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마음과 이름을 바꾸시어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그는 타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문을 완전히 닫아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는 작은 틈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분께서는 저에게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제 영혼의 작은 틈을 통해 당신의 자비를 부어주신 것입니다.
(228) 13장 아무도 혼자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Nessuno si salva da solo
마침내 우리는 졸업을 했습니다. 1955년 12월, 우리 반은 성공적으로 과정을 마치고 성대한 송별 무도회를 열었습니다. 실험실 일도 끝이 났습니다. 여름이 되자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가 왔는데, 저는 부모님께 이 문제를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특히 어머니께는 더욱 그랬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대학에 가서 의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11월의 어느 날, 어머니는 테라스 위 다락방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그곳은 제가 형제자매들과 함께 쓰는 방의 왁자지껄한 소리를 피해 조용히 생각하고 공부하고자 마련해 둔 저만의 작은 공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정리 정돈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던 터였으니까요. 어머니는 마치 모성의 직감 같은 것에 이끌려 오신 듯했습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의심스럽고 궁금한 것이 있으셨나 봅니다. 그리고 이 다락방이 그 답을 알려줄 것 같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수많은 책을 발견하셨는데, 대부분 예상과는 다른 책들이었습니다. 특히 라틴어로 된 신학 서적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기뻐 보이지는 않으셨습니다.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저는 다른 것도 생각하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여전히 의사가 되고 싶지만, 육신이 아닌 영혼의 의사가 되고 싶다고요. 그 대답 역시 어머니를 기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대학에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먼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무엇을 할지 잘 결정해라.” 언쟁은 아니었습니다. 솔직하고 진지한 대화였지만, 어머니는 이후에도 생각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교구 신학교에 들어갈 때도 저를 배웅하지 않으셨고, 신학생 시절 착복식 날에도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 시기에 어머니와의 관계가 특별히 어려웠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어머니의 ‘다섯 손가락’ 중 하나였거든요. 어머니는 제가 신학교에 가는 것에 대해 반대하셨지만, 결국 제 선택을 존중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다투지 않았지만, 저는 집에 돌아올 때만 어머니를 뵐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신학교에 한 번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예수회에 입회할 때야 아버지와 함께 코르도바까지 동행해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여전히 어느 정도 서먹한 관계였지만요. 아버지와는 일이 더 순조로웠습니다. 정말로 그것이 제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버지도 기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이 문제로 다시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포촐리 신부님을 찾아가 모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은 제 성소를 살펴보시고는, 저에게 기도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 손에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도움이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몇 주 후, 집에서 누군가가 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제안을 했습니다. “포촐리 신부님의 의견을 여쭤보면 어떨까요?” 신부님은 우리 가족의 영적 지도 신부님이셨고, 19년 전 제게 세례를 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네, 좋은 생각이네요.”라고 말했습니다. 1955년 12월 12일, 아버지와 어머니는 혼인 20주년을 맞이하셨습니다. 플로레스의 성 요셉 성당에서 미사가 거행되었는데, 부모님 두 분과 우리 다섯 자녀만 참례했고 포촐리 신부님이 집전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모두 함께 ‘라 페를라 데 플로레스’ 식당으로 가서 아침식사를 했습니다. 그곳은 리바다비아 거리와 리베라 인다르테 거리가 만나는 곳, 대성당에서 반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포촐리 신부님도 초대하셨고, 신부님은 대화가 어디로 흘러갈지 이미 아시고는 흔쾌히 수락하셨습니다.
아침 식사가 반쯤 진행되었을 때, 제 성소라는 주요 안건이 식탁에 올랐습니다. 포촐리 신부님은 조심스럽게 에둘러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물론 대학도 좋죠. 대학에 가는 것은 언제나 좋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원하실 때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은 채, 여러 성소 이야기를 들려주시다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야기로 마무리하셨습니다. 신부님은 자신이 몇 년 만에 차부제와 부제가 되었고, 곧이어 사제품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예상하지 못했던 모든 것까지도 선물로 가져다주었다고 하셨죠. 부모님께 제가 신학교에 가도록 허락하라고 말씀하시거나 결정을 강요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신부님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데 도움을 주셨을 뿐입니다. 스페인에서는 “한 삽의 석회와 한 삽의 모래”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강함과 부드러움을 적절히 섞어 지혜롭게 해결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나머지는 저절로 이루어졌습니다.
1956년 초, 저는 비야 데보토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교구 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물론 그전에 조부모님께도 말씀드렸습니다. 마리아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평범한 삶에 안주하지 않을 거라는 걸 늘 알고 있었단다. 네게는 올바른 포부가 있었지.” 그러면서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서재에서 발견한 조수에 카르두치<*조수에 카르두치(Giosué Carducci, 1835~1907년)는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교수로 19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의 책을 어떻게든 읽으려 했던 일을 떠올리셨습니다. “이해하기 힘들었을 텐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했지.” 로사 할머니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모른 척하기로 하셨던 분인데,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신다고 느꼈다면 그건 아주 좋은 일이구나.” 할머니는 제가 마음을 바꾸더라도 집 문은 항상 열려있을 거라고 덧붙이셨습니다.……
(241) (독감이 악화되어 흉막에서 물을 뽑아내기까지 하는 위급한 상황으로 발전하여 입원하고 난 뒤) 요양 기간 동안 신학교의 영성 지도 신부님께서 매주 한 번씩 저희 집을 방문하셔서 봉성체를 해 주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는 수도사제로서의 삶, 곧 공동체 생활을 하는 사제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도미니코회와 예수회 중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깊이 고민하면서 말입니다. 신학교에서 1년 반을 지내는 동안 저는 성소를 잃은 적이 없었고, 혼인할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삼촌의 혼인식에서 만난 한 여성의 지적인 매력과 아름다움에 마음이 흔들린 적은 있었습니다. 저 자신도 놀랐고, 한동안은 그분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기도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제 삶의 방향을 깊이 성찰해야 했고, 많은 고민과 노력 끝에 수도 성소의 길을 다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감정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면 그쪽이 더 비정상이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저는 어떤 젊은이가 주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느낄 때 약간의 불확실함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뭔가 부족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를 보면 저는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대한 일로 부르시는데, 그 부르심에 대한 열정이 약간의 두려움을 동반한다면 그것은 건강한 것이고, 좋은 것입니다.
제 경우로 말하자면, 저는 무언가 더 많은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도미니코회도 마음에 들었고, 그들 중에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학교를 예수회가 운영했기에 예수회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회의 세 가지 면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공동체 생활, 선교 정신, 그리고 엄격한 수도 규율이었습니다. 특히 마지막 두 가지였습니다. 비록 나중에 선교사가 되지는 않았고 대체로 불순종하고 규율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때는 그 규율이 저를 매료시켰습니다. 예수회가 시간을 체계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 좋았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온전히 바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강한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제가 끌린 것은 교회의 필요에 언제든 기꺼이 응하겠다는 마음가짐<*disponibilità(디스포니빌리타)는 이탈리아어로 ‘준비된 자세’ 또는 ‘기꺼이 응할 태세’를 의미하는 단어다. 특히 교회와 하느님의 부르심에 언제든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나 마음가짐을 뜻한다. 이는 단순한 순명이 아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봉사의 자세를 의미하며, 전 세계 어디든 파견될 수 있는 선교사적 소명의 기초가 된다. 한국어로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이 없어, 문맥에 따라 적절히 옮겼음을 밝힌다>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라고 명하더라도 기꺼이 그것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마음이었죠. 포촐리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신부님은 제 생각과 마음을 살펴보신 후 제 결정을 지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저는 또 다른 힘든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10월 말, 의사들은 제 폐에 큰 낭종이 세 개나 있어서 최대한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진단했습니다. 11월에 다시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가슴을 절개한 뒤 피노키에토 개흉기로 늑골을 벌려야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몸에 큰 외상을 남기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본격적인 수술이 시작되었고, 저는 오른쪽 폐 상엽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고통의 시간은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산소 텐트 안에서 며칠을 보내야 했고, 폐에는 카테터가 삽입되어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의사가 큰 주사기를 들고 와서 흉막을 씻어내기 위해 생리 식염수를 주입했습니다. 관은 수도꼭지에 연결되어 있어서 수압으로 배출관을 청소했는데, 그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은 실로 끔찍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병문안을 왔지만, 가장 깊이 마음에 와닿은 것은 돌로레스 수녀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수녀님은 상투적인 위로의 말을 넘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가고 있군요.”
그 말씀이 제 마음에 평화를 주었습니다. 고통은 여전했지만, 이제 그 고통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고통 그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고통을 받아들이고 감내하는 마음가짐에서는 좋은 것이 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소명은 충만한 기쁨을 향한 것입니다. 그 여정에서 고통은 우리가 마주하는 시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곧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수난을 통해서만 자신의 고통에 대한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하느님 안에서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 고통을 덜어 주려는 어떠한 노력도 온전한 치유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마침내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 제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예수회 수련자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3월까지는 기다려야 했습니다.
포촐리 신부님은 제가 그 긴 시간을 집에서만 보내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게 보셨고, 특히 방학 기간에는 더욱 그러셨습니다. 어떻게 하셨는지 모르지만, 신부님은 살레시오회 관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어 저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탄딜 언덕에 자리 잡은 살레시오회의 큰 쉼터, 돈 보스코의 집에서 여름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곳에서 제 상한 폐도 회복될 수 있을 터였습니다.
1958년 1월 25일, 저는 생애 처음으로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360킬로미터 떨어진 산맥 지역으로 날아갔죠. 그것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상징적인 비행기 중 하나였던 DC-3 쌍발 프로펠러기였는데,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비행 중에 한 여성 승객이 춥다고 불평하자 승무원은 곧바로 사과하며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비행기 뒷부분에서 몇 군데 부품이 떨어져 나간 것 같습니다.” 그러고는 서둘러 중요하지 않은 부품들이라고 덧붙였죠.
그렇게 시간은 쏜살처럼 지나갔습니다. 3월 10일, 저는 안내받은 대로 옷 두 벌만 가방에 넣고, 형제자매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레티로 역으로 갔습니다. 코르도바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였죠. 그곳에는 예수회가 반세기 전에 옛 영국인 구역에 지은 큰 건물이 있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그 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게 될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