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이가 책을 쓰면서 책을 쓰게 된 목적을 결론으로 밝혀야 그 책은 비로소 출판된다. 그런데 이 결론 부분에 이어서 어떤 장을 추가하고자 한다면 이전 내용과 어떤 연관성을 지을 수 있는 결정적이고도 중요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일이 제4복음서에서도 일어난다.
지난주 복음에서 이미 들었던 제20장의 결론에 이어 오늘의 전례 복음은 그 이후에 추가된 제21장의 내용 중 한 대목이다. 추가 기록에 대한 저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가설로서 요한복음의 저자, 혹은 편집자들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요한 13,23;19,26;20,2;21,7.20.23)와 예수님께서 처음 만나시면서부터 “케파” 곧 “베드로(반석)”라는 이름을 주신 시몬 베드로와의 연관성을 기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요한복음의 제21장이라는 추가 기술 부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초인적이고도 범상치 않은 사실을 기록하려 했다기보다는 불확실하며 흔들리는 예수님의 공동체 안에 주님께서 인내하시고 또 인내하시며 참을성 있게 현존하시고자 했다는 관점에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1.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이자 요한복음의 부록이랄 수 있는 제21장의 첫 구절 시작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공관복음에 따를 때 첫 번째 두 커플인 네 제자-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의 부르심이 이루어진, 참조. 마르 1,16-20 및 병행구) 티베리아스(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요한 21,1)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제자들은 갈릴래아로 돌아가 믿음과 기다림의 생활, 공동체 생활, 일상생활로 복귀한다. 그렇게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배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요한 21,2)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요한 21,3ㄱ) 한다. 이 장면에는 여성 제자들이 없고, 열한 명이 되지 않은 채 남게 된 나머지 제자들, 예수님의 공동체를 대표하는 제자들만 있다. 베드로가 주도권을 쥐고 다른 여섯에게 말하자 다른 여섯이 베드로를 뒤따른다.
그렇게 고기를 잡으러 제자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요한 21,3ㄴ) 결실이 없었다. 베드로가 주도권을 쥐었다고는 하지만, 주님의 말씀과 명령, 그리고 그분께서 가리키는 방향이 없이는 그 어떤 결실도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고 사목이다.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새벽 어스름에 무엇을 정확히 식별하기 어려운 때),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요한 21,4) 예수님께서 가까이 계시지만 그분을 알아보지도 못하였고 풀이 죽은 제자들이 말없이 배 위에 있다. 이러한 침묵을 깨면서 “예수님께서, (예수님 편에서 먼저 주도권을 쥐고 제자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요한 21,5) ‘뭐 좀 있나요?’ 하는 질문은 대문 밖에서나 길거리에서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아챌 수 있는 구걸하는 이들, 생존을 위한 거지의 질문이다. 제자들이 이스라엘을 돌아다니면서 길거리에서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며 새벽 어스름에 예수님에게서 들었던 그 질문을 교회와 인간은 역사 안에서 계속 듣는다. 제자의 대답은 ‘없습니다.’ 였다.
2. “주님이십니다!…와서 아침을…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계속)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반신반의하면서)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요한 21,6) 모두가 깜짝 놀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힌다. 많은 물고기도 물고기이지만,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제자들은 눈치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요한 21,7)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제자는 눈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볼 수 있는 능력의 눈을 가졌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가리키며 “주님이십니다.(ὁ Κύριός ἐστιν, ho Kýriós estin)” 한다. 그 제자가 “물가에 서 계신” 주님을 자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직 보지 못하고 있던 베드로에게 보여 주며 말한다. 이에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열성에 북받쳐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행동으로 물에 뛰어들어 주님께로 헤엄쳐 간다.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는 사랑으로 듣고 사랑으로 보아 주님을 먼저 알아본다.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베드로는 그 예수님을 향해 물에 뛰어들어 그분께 헤엄쳐 간다. 소명의 아름다운 조화이며 동업이다. 제4복음서는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간에 질투로 이루어진 경쟁이 아닌 일종의 ‘거룩한 경쟁’을 보여 준다. 두 제자는 서로 아주 달랐고 예수님과 맺는 관계 면에서도 아주 달랐다.
최후의 만찬에서 베드로는 예수님 품에 기대어 있던 그 제자에게 “고갯짓을 하여” 배반자가 누구인지를 예수님께 여쭤보게 한다.(참조. 요한 13,24-25)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그 제자는 베드로에게 아무런 대답도 전하지 않는다.(참조. 요한 13,26) 그리고 부활절 새벽에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을 전해 들은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는 함께 무덤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다다른다.(참조. 요한 20,3-4) 그러나 그 제자는 베드로를 먼저 무덤에 들어가게 하고, 베드로를 뒤따라 들어가 “보고 믿었다.”(참조. 요한 20,5-8)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요한 20,9) 반면에 다른 제자는 베드로보다 깨우침이나 믿음에 한발 앞서는 것으로 기록되지만, 공동체의 맏이인 베드로의 위계질서를 존중하는 모습으로 기록된다.
한편,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가득)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요한 21,8-9) 예수님께서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요한 21,10) 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식사와 식탁을 준비하시고 이를 제자와 나누시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런 와중에 예수님께 헤엄쳐 다가왔던 베드로는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요한 21,11-12) 베드로의 임무는 그물이 찢어지지 않도록, 곧 일치와 친교가 원만하도록 보살피는 일이었다. “솔기가 없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을 찢어지지 않도록(참조. 요한 19,23-24) 공동체의 일치를 온전하게 보존하는 것이 베드로의 몫이었다. “백쉰세 마리”라는 물고기의 숫자에 관해 성 예로니모를 비롯한 교부들의 여러 해석이 있지만, 다양하고 큰 물고기가 가득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여러 민족의 상징인 셈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이 물고기들은 “어린 양들”(15-17절)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사가 이어진다. “예수님께서…(제자들에게)…‘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12ㄱ)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 그 누구도 대답이 없다. 그저 예수님을 보는 것으로 충분했고, 그분의 현존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였으며, 빵을 쪼개시어 나누시는 예수님의 스타일과 에수님께서 차리신 빵과 물고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요한 21,12-13) 이 복음 장면이 기록될 무렵에 이미 ‘물고기’라는 뜻을 가진 익투스(ΙΧΘΥΣ, ichthús)라는 말이 『예수(Iota, Ι, Jesus), 그리스도(Chi, Χ, Christ), 하느님(Theta, Θ, God or God’s), 아드님(Upsilon, Υ, Son), 구세주(Sigma, Σ, Savior)』의 머리글자를 따서(애너그램anagram)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었다. 모든 학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복음이 성체성사의 요소를 빠짐없이 지니고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현존,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 “와서 아침을 먹어라(너희는 이것을 받아먹어라)”하시는 초대와 성찬 기도문,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시는” 성찬의 나눔이 있다.
3.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아가파오, ἀγαπάω, agapáo)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필레오, φιλέω, philéo)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agapáo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philéo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philéo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philéo하느냐?’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philéo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7)
이 대목을 읽으면서는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에 ‘사랑하다’라는 동사가 미묘하게 변화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거듭하여 두 번이나 ‘아가파오, ἀγαπάω, agapáo’라는 동사로 물으시는데, 베드로는 끝까지 이를 ‘필레오, φιλέω, philéo’라는 동사로 알아듣고 이로써 대답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실 때는 당신께서 동사를 바꾸어 ‘필레오, φιλέω, philéo’로 바꾸어 물으시고 베드로는 여전히 그렇게 같은 동사로 대답한다. 동사 ‘아가파오’가 하느님의 사랑이며 ‘조건 없는, 무조건적으로, 끝까지(참조. 요한 13,1 Εἰς τέλος, eis télos)’ 가는 사랑이라면, 동사 ‘필레오’는 ‘인간적인, 친구 간의’ 사랑 정도를 가리킨다. 물론 베드로는 장차 예수님의 “끝까지” 가는 사랑을 알고 깨우칠 것이며 순교로 목숨을 바치기까지 할 것이지만, 아직은 그 사랑이 인간적인 사랑의 한계에 머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지금 베드로의 그 사랑에 머물 수밖에 없으셨다.
베드로는 거듭되는 예수님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게서 내려오고 하느님께서만 허락하실 수 있는 아가페의 사랑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이를 알아들은 척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 어떤 가식도 없이 그저 자기가 알아듣는 대로 곧이곧대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 사랑합니다’를 반복한다. 베드로의 위대한 겸손이 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자기의 배반을 내다보시는 예수님 앞에서도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요한 13,37) 하였고, “주님,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십시오.”(요한 13,9) 하면서 항상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보다 무엇이든지 더하겠다고 나서면서 늘 자신만만하고 열심이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났던 베드로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영적으로 완숙에 이르고 진정으로 겸손한 자 되었으며, 불어닥치는 바람에 언제라도 부서질 수 있는 바위요 반석임을 알아서 가식과 꾸밈없는 베드로가 되어갔다. 그에게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었으며, 이로써 그는 잃어버린 양들과 양들의 목자가 될 수 있었다.
사랑에 관한 대화 끝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열정이 충만하고 자신만만하게)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였고, 또 가고 싶은 대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너의 주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니) 네가 (네 혼자 할 수 없어 다른 이의 도움에 의지하고자)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옷을 입혀주고)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가고 싶지 않아도)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요한 21,18) 하고 베드로의 앞날을 예견하듯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베드로의 앞길에 놓인 순교를 예상하며) 가리키신 것이다.”(요한 21,ㄱ) 이 말씀은 분명 순교로 마감될 베드로의 일생을 내다보신 말씀이지만, 매일매일 하루하루 원하지 않는 결정을 해야만 하는 ‘일상의 순교’와도 관련된 말씀이기도 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노년에 겪어야 하는 이러한 ‘백색白色의 순교’는 누구나 겪어야 하고 또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베드로에게 인생을 어떻게 마감할 것인지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19ㄴ) 하면서 오늘 복음이 끝난다. “나를 따라라” 하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제자들을 만나 베드로를 부르셨을 때 하셨던 바로 그 말씀이기도 하다.(참조. 요한 1,42-43) 그저 소극적이고도 수동적으로 ‘따르면서(따르기만 하면서)’, 실패 속에서도, 다른 이가 이끌어가는 과정을 살면서도, 주님의 부르심을 살아갈 수 있다.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제멋대로 다루었던”(마르 9,13 마태 17,12) 것처럼 그렇게 죽기까지 시달리는 부르심, 예수님처럼 모욕과 수치스러운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는 부르심도 있지만, 모두가 꼭 그런 부르심만을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한 번 “나를 따라라.” 하시면 그 부르심은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말을 주고받는 베드로 곁에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할 때 베드로는 그 다른 제자와 어떤 관계로 남아있는 것일까?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다음 대목에 따르면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느닷없이)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요한 21,21) 한다.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요한 21,22) 예수님의 답은 다소 냉정한 듯하지만 분명하다. “사랑하시는 제자”는 제자대로,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각자 자기의 몫을 살아내야 하고 증거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장차 “어린양들” 가운데에서 목자로서 살아야 할 베드로의 몫은 그 몫대로 존중받아야 하고 인정되어야만 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