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 10월 20일, 당시 신부였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Jorge Mario Bergoglio, 故 프란치스코 교황, 1936~2025년)는 아르헨티나 교회의 역사가였던 살레시오회 카예타노 브루노Cayetano Bruno 신부에게 긴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당신 부모님의 혼배성사를 집전하셨고, 1936년 12월 25일 자신에게 세례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남매들의 세례성사에 이르기까지 가족의 대소사를 함께 하면서 가족의 친구로서 가족의 영적 여정을 동반하였던 살레시오회 신부 엔리케 포쫄리Enrique Pozzoli(1885~1961년) 신부를 회상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6페이지 분량의 편지글을 일단 마친 후, 베르골리오 신부는 추가로 5페이지를 덧붙였고, 여기에는 특히 1949년, 그가 13세 때 부에노스아이레스 광역시의 라모스 메히아에 있는 ‘거룩한 천사들의 윌프리드 바론 학교’에 다녔던 시절의 “살레시오 회상(Salesian memories)”이 담겼다. 원래 스페인어로 작성된 이 글에서 베르골리오 신부는 살레시오회로부터 받은 영성과 “인생을 준비하게 해준” 참된 “가톨릭 문화” 교육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다.
아래는 2014년 1월 마지막 주에 교황청 공식 기관지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L’Osservatore Romano> 주간지에 게재된 베르골리오 신부의 옛 편지글을 당시 교황청 소식을 전하던 온라인 웹사이트 https://zenit.org/가 영어로 번역하였는데, 이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문단 앞에 3부터 13에 이르는 이해가 가지 않는 숫자들(쪽 번호로 추정)이 있는데, 영어 번역문에 있는 것이어서 그대로 표기하였다. 영어 번역문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zenit.org/2014/02/04/father-bergoglio-s-1990-recollection-of-his-salesian-education/
*여기 게재된 내용 중 일부는 우리말로 번역된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서전 <프란치스코 교황·카를로 무쏘, 희망(Spera), 가톨릭출판사, 2025년, 166-171쪽>에서도 보충하여 읽을 수 있다.

***
저는 방금 엔리케 포졸리 신부에 대한 기억을 정리하여 보고서를 마쳤습니다. 이제 저와 살레시오회와의 만남에 대한 추억도 약속대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약간 볼테르 풍의 일화 하나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1976년, 우리는 관구 본부를 산미겔로 옮겼습니다. 새로운 성소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관구관이 양성소 가까이에 있어야 좋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곧 학업 프로그램 개편을 시작했는데, 2년 과정의 소신학교 과정(지금은 없어진)을 없애고, 철학과 신학을 분리하여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커리큘럼’이라고 부르는 과정에서 철학과 신학이 뒤섞인 상태로 가르쳤는데, 거기서는 헤겔부터 배우기 시작했었습니다.
산미겔에 있으면서 저는 사목적으로 배려되지 않는 지역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점에 대해서 염려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어린이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토요일 오후에는 교리교육을 하고, 이어서 놀이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우리 교수들도 아이들과 많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서원을 했다는 것을 깨우치면서, 학생들과 함께 저부터 직접 교리교육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활동이 점점 커져 갔습니다. 이에 큰 성당이 다섯 개나 세워졌고, 지역의 아이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단지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오전 사목만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활동에 대해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수회 고유의 사도직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제가 ‘살레시오화(!) 된 양성’을 받았다는 비판이 일었고, 친 살레시오 예수회 회원이라는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아마 이런 이유로 제가 지금 이 기억을 조금 편향되게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 글을 읽게 되실 분이 친 예수회적 살레시오회 신부이시니, 잘 식별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제가 살레시오회를 두고 애정을 담아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 가족이 산카를로스 살레시오회로부터 영적으로 양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때 이미 ‘도움이신 마리아 행렬’과 멕시코 거리의 ‘성 안토니오 행렬’에 참석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할머니 댁에 있을 때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라토리오에도 다녔습니다.(저에 이어서 현재 항공대 교목인 알베르토 델라 토레 신부도 그곳 출신입니다) 당연히 저는 살레시오회(로렌조 마싸Lorenzo Massa 신부)가 처음 조직하여 나중에 지역 프로 축구팀으로, (그리고 오늘날 아르헨티나 5대 축구팀으로까지) 성장한 산 로렌조 축구팀의 열혈 팬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뭔가 부족했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최근까지 저는 마싸 신부님이 쓰셨을 것(이라고 믿는) <산 로렌조 클럽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라 프렌사”라는 신문의 가톨릭 기자이며 산 로렌조의 열혈 팬이신 후고 찬타다 신부에게 주었습니다. 그 책을 지금은 그 신부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저는 어린이 때부터 산 카를로스의 유명한 고해 신부들, 몬탈도 신부, 푼토 신부, 카를로스 스칸드롤리오 신부, 포쫄리 신부를 알았습니다. 또 어린이로서 저는 모레트 신부의 <종교적 가르침>이라는 책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살레시오 신부들 곁에서 떨어질 때마다 신부님들은 제게 “도움이신 마리아 강복”을 청하라고 가르쳤습니다.
3. 살레시안들과의 가장 강렬한 체험은 1949년, 라모스 메히아의 윌프리드 바론에 있는 거룩한 천사들 학교 기숙사에서 6학년을 다녔던 때였습니다. 교장 신부는 에밀리오 칸타루티 신부였고, 생활지도는 플라시도 아빌레스 신부가 맡았습니다. 교리 선생님은 이시도로 홀로바티 신부였고, 경리 담당은 이시드로 푸에요 신부였으며, 행정 부서 책임자는 페르난데스 씨였습니다. 신학생 중에서는 (레오나르도 또는 레안드로) 칸지아니 씨와 루벤 베이가 씨를 기억합니다. 연로한 신부님들로는 어셔 신부, 람브루스키니 신부, 칭골라니 신부 등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의 학교를 단순하게 부분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의 생애에서 맞았던 이 1년의 삶을 오랜 세월 여러 번 되돌아보았고, 그제야 조금씩 조금씩 전체적인 모양새를 그려갈 수 있었으며, 바로 지금 이 자리에 그 학교를 펼쳐 보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로서는 지금 저의 얘기가 단순하면서도 신선한 얘깃거리를 넘어서 다소 지적인 내용으로 채워지고 말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제 체험에서 출발하여 저의 견해와 목표를 담아 점진적으로 발전해가면서 그려낸 저의 통합적인 (교육사목적) 비전을 객관적으로 정리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4. 학교생활은 제 삶의 모든 것이요 ‘전체’였습니다. 저는 도저히 게으를 권리가 없이 인생을 준비하는 길에 빠져들었습니다. 하루가 화살처럼 지나갔고,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이 (교육적 자산으로) 만들어지도록 조작되고 있는 세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조작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침마다 미사에 가는 것, 아침 식사, 공부, 수업, 오락 시간의 놀이, 원장 신부님의 저녁 말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 같이 매우 자연스러웠습니다. 우리 각자는 삶의 다양한 다른 측면을 살도록 만들어졌고, 이것이 제 안에 저만의 양심을 형성하였습니다. 도덕적인 양심뿐만이 아니라 (사회적, 해학적, 예술적 등등) 일종의 인간적 양심 말입니다. 달리 말해보자면, 학교의 모든 활동이 사물들의 진정한 의미들을 중심으로 의식적으로 엮어져 (전혀 편견이 없고 빗나가지 않은) 진정한 가톨릭 문화를 형성해냈던 것입니다.
공부, 함께 사는 사회적 가치,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향한 사회적 연대(저는 그 학교에서 저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저 자신이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기억합니다), 스포츠, 건전한 경쟁, 신앙심……모든 것이 실제였고, 모든 것이 몸에 붙도록(습관이 되도록) 하면서 모든 것이 삶을 준비하는 훈련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저세상의 초월성에 열려있었습니다. 이렇게 준비된 저에게는 (교육 심리학적인 의미에서) 다른 현실인 중등학교 단계로 넘어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가 무척 쉬웠습니다. 이는 단순하게 말해서 제가 그 초등학교에서 비뚤어지지 않고 현실적인 감각을 가지고 책임감과 함께 초월의 지평 안에서 잘 지낼 수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가톨릭 문화야말로 제가 라모스 메히아에서 받았던 최고의 것이었습니다.
5. 모든 것이 의미로 행해졌습니다. 의미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적어도 기초적인 질서, 어떤 교육자들이나 일상사 안에서 인내하지 못 하는 행동들, 작은 불상사 등이 우연히 발생할 수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저는 그곳에서 거의 부지불식간에 사물들의 의미를 찾도록 배웠습니다.(I learned there, almost unwittingly, to seek the meaning of things.) 의미를 찾는 이러한 학습의 중요한 순간 중 하나는 일반적으로 원장 신부님께서 주셨던 ‘저녁 말씀’이었습니다. 어떨 때는 학교를 방문하시던 관구장 신부님께서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저는 당시 관구장이셨던 미구엘 라스판티 몬시뇰께서 어느 날 주셨던 저녁 말씀을 마치 오늘 말씀인 것처럼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날은 1949년 10월 초였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어머님께서 9월 29일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장례를 치르고 코르도바에서 돌아오시던 길이었습니다. 관구장 신부님께서는 죽음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거의 쉰네 살이 된 저에게 죽음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그날 이후 그날 밤의 저녁 말씀이 지금까지 제 삶에서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저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두려움 없이 느꼈고, 그것이 무척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1년인가 2년 뒤에 이시도로 홀로와티 신부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수요일에 포쫄리 신부님께서 살레시오회원들에게 고백성사를 주러 가셨고, 고백성사 안에서 포쫄로 신부님이 이시도로 신부님의 위장병을 알게 되시고 병원에 가라고 명령하실 때까지 이시도로 신부님이 얼마나 오랜 기간 위장병으로 고통을 참아 받으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이시도로 신부님은 간호사였습니다) 저로서는 살레시오 회원들이 이런 식으로 덕을 연마하면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 달리 기억에 남는 저녁 말씀은 칸타루티 신부님께서 누군가가 자신의 성소를 잘 알 수 있기 위해서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 기도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관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그날 밤 제가 침실에 가서 열심히 기도했던 것을 기억합니다.(사실 그로부터 이틀 뒤 아빌레스 신부님께서 저에게 제 성소에 대해서 한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습니다)……그날 저녁 이후 저는 기도하지 않고 잠자리에 눕지 않았습니다. 매일이라는 날과 사물에 의미를 새기는 법에 적응하는 내면의 전환점이었습니다.
6. 저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침묵 속에서 공부 시간에 집중하는 습관, 그리고 산만해지는 것을 강하게 자제하는 법을 학습했습니다. 항상 선생님들의 도우심과 함께 저는 학습 방법을 배웠고, 연상 기법 등을 배웠습니다. 스포츠(운동)는 삶의 기본적인 측면 중 하나였습니다. 누군가는 잘했고 많이 했습니다. 스포츠는 (건강에 더해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가르칩니다. 스포츠에서 건전한 경쟁이라는 차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잘’ 경쟁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경쟁해야 함을 배웁니다. 나중에 오랫동안 인생의 경쟁이라는 측면에 대해 비판하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이상하게도 경쟁의 교육적 측면에서 “해방된(자유로워진)” 이들이 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상에서 돈이나 권력 때문에 서로를 학살하면서 경쟁하였고……그리스도인으로서 경쟁한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7. 이어지는 학습 기간에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저는 저의 능력이 크게 바람직한 방향으로 향상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저의 이 모든 기초가 그때의 그 기숙학교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감성을 그때 그곳에서 살레시오 회원들이 양성했습니다. 살레시오 회원들은 이 점에 관하여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감상주의’를 얘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고유 가치인 ‘감성’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는 스스로 느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8. 신앙(심) 교육은 또 다른 중요한 차원입니다. 저는 시대에 맞는 강한 신심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를 향한 신심은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습니다. 살레시안들은 이 신심에 관해 제게 불같은 열성을 주었고, 제가 기억하는 한 저의 동료들에게도 그러하였습니다. 우리 성모님께 의탁하는 것은 인생에서 필수적입니다. 하늘에 계신 저의 어머니께서 저를 보살피고 계신다는 인식에서부터 성모송을 세 번 외우는 것,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동정녀께서는 우리 마음을 떠나지 않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남아계십니다.
우리는 또한 교황님을 향한 존경과 사랑을 배웠고 이 또한 깊이 남았습니다. 때때로 저는 제가 학교에서 배운 이러한 신심에 대해서 (해가 흘러가면서) 비판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습니다만, 이는 학생 때처럼 항상 미사에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지껄이는 일반적인 횡설수설이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문제를 잘못 짚은 비판입니다. 이러한 비판은 청소년기의 반항이나 성장기의 문제를 신심 교육 분야에 옮겨 놓거나 대치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9.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를 향한 신심에 젖어있고 이를 사랑하는 이들은 정결을 사랑합니다. 동정녀 신심과 정결이라는 연관성(저는 돈 보스코의 예방 교육 체계를 믿습니다)에 관해서 대단히 큰 오해가 있습니다. 저는 그 어떤 강박도 없이 정결을 사랑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적어도 제가 기숙학교에 있었던 그해 그 학교에 성적인 강박이나 문제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성적인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들을 발견한 것은 오히려 노골적으로 무관심하고 태연한 척하는 태도를 보이는 심리학자들이나 교육자들로부터였습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서 어디에나 성性이 만연한 것으로 보는 프로이트적인 사고에 마음 깊숙이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10. 제가 다녔던 기숙학교에는 취미 생활이나 공예방, 개인적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방들도 있었습니다. 람부르스키니 신부님은 우리에게 노래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고, 아빌레스 신부님에게서는 문서 복사하는 기계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우크라이나 신부님(에스테반 신부님)께서는 우크라이나 전례 양식에 따라 제대를 차리고 복사하는 법을 가르쳐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우리들의 취미와 고민을 담아낼 수 있는 다른 많은 것들(연극, 선수권 대회 조직, 학예회-아카데미아, 박제 등등)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창의력을 발휘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11. 우리 선생님들은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셨을까요? 선생님들께서는 우리가 선생님들을 신뢰할 수 있는 분들로 느낄 수 있도록 하셨으며, 선생님들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선생님들은 우리를 들어주실 줄 알았고 적절하고도 훌륭한 조언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는 청소년기의 반항적인 기질이나 우울함에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12.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하나의 가톨릭 문화를 형성했고, 저의 중학교 시절과 인생을 준비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한 (신앙적) 진리는 결코 타협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죄에 대한 것입니다. 죄책감(죄의식)은 가톨릭 문화의 일부입니다.…집에서 생겨난 죄의식이 학교에 와서 강화되었고 꼴을 갖추었으며 분명해졌습니다. (죄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이는 반항아가 되고 무신론자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어떻든 죄의식이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그저 만사를 쉽게 쉽게 해결하자고 진리를 집어던질 수는 없습니다.
제가 가톨릭 문화를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행하고 배우는 모든 것이 조화로운 통일성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하나되어, 하나를 향해 가듯 하나로 말했다는 뜻) (누구는 이렇게 말하고 또 누구는 저렇게 말하고 하는 식의) 편파성은 없었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와 어울려 서로를 완성해냈습니다.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은연중에 조화롭게 성장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보니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에서 모든 것이 놀라울 정도로 실제적이었습니다.
13. 제가 인생이라는 기억에서 부정적이거나 어려웠던 학교생활은 제쳐두고 그중에서 장밋빛 추억이나 들춰내어 옛날 학생 시절의 향수나 프루스트 같은 심정에 젖어보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당시 학교에는 부족한 부분도 있었습니다만 교육 구조 자체는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앞 단락들에서 기록한 그대로입니다. 1949년의 내용을 두고 볼 때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1990년에 적용할 수 없는 내용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그러나 1930년의 내용이 1949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었던 것처럼 1949년의 살레시오 문화유산 역시 오늘 1990년의 학생들에게도 그대로 실현하고 적용할 수 있는 가톨릭의 문화라고 확신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작년 말 저를 슬프게 하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제가 매우 존경하는 어떤 살레시오회 신부님께서 저와 얘기를 나누시면서 몇몇 학교를 평신도에게 맡기려고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게 성소 부족 때문이냐고 여쭤보았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젊은 살레시오 회원들이 학교에서 봉사하는 사도직에 흥미를 잃고 학교에서 더는 일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큰 이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신부님께 젊은 예수회 회원들에게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들이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전통 보수주의자들인 것도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지난 18년간 예수회의 아르젠티나 관구는 본당 학교 형태로 여러 학교를 개설했으며, 제가 막시모의 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에도 해당 지역에 두 개의 학교, 하나는 기술 교육 학교였고 다른 하나는 성인 교육 학교였던 – 가 새로 문을 열었다는 내용도 말씀드렸습니다.(사실은 지금은 세 번째 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또 다른 이유로, 곧 “삶의 현장에 투신하는 모습”을 취하기 위해 학교를 떠나기로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목적 선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제가 살레시오 학교에서 만났던 살레시오회 형제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분들이 과연 “삶의 현장에 투신하는 모습”을 보였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분명히 아는 것은 그분들이 온종일 헌신하며 잠시 쉴 겨를조차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살레시오 학교에서 만났던 분들, – 저는 이 생각으로 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 그분들이 가톨릭 문화를 조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들이 신앙을 지녔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어느 정도 신앙의 힘과 어느 정도의 담대함으로 복음을 “선포”할 용기를 발휘하셨습니다. 말로, 자신들의 삶으로, 그리고 자신들이 맡은 일로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언어, 세상 사람들에게는 수치와 어리석음으로 보이는 그 언어 때문에 겪어야 했던 수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저로서는 저 자신에게 묻습니다. 어떤 일이 시들해지고 그 풍미와 반죽을 부풀리는 힘을 잃게 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다른 선택들, 곧 심리적이나 사회적, 혹은 사목적 선택들로 대체된 까닭은 아니었을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저는 문제를 너무 단순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사회적 참여와 투신이라는 과격한 행동을 취하려는 과정에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 교육을 포함한 어떤 환경에서든 그저 삶의 현장에 뛰어드는 것만을 목표로 삼아야 하고, 그렇게 가톨릭 문화를 건설하러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현실이 결코 가볍게 만은 여겨지지 않습니다.
————————
※ 다음 링크에서는 원래 돈 보스코의 고장인 피에몬테 아스티 지역 출신으로서 베르골리오 신부네 가족이 어떻게 아르헨티나로 이주해서 정착하게 되었는지, 그때부터 위에서 언급한 엔리케 포쫄리 신부와 베르골리오 가족 간에 어떤 관계와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는지 생생한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성소 이야기 The Story of a Vocation by Pope Francis
https://www.catholicculture.org/culture/library/view.cfm?recnum=10419
————————
※ 다음 링크에서는 최근 CNN 기사로서 교황님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 있다.
아, 소중한 증언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교회를 열렬히 사랑하신 교황님의 살레시오 학교경험에 대한 증언이네요.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을 더 사랑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웅적 헌신을 위해 일상의 순교를 거부했던 나의 모습도 고백합니다. 살레시오 영성의 진수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