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 말씀은 마르코 복음만이 전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에서(요즘 말로 외국에서) 이사야 예언자에 의해 예언되었던 표징 중 하나(제1독서)를 완성하신다. 치유과정은 매우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묘사는 그리스도교의 입교 예식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마르 7,31) 지리적인 이동 경로를 밝힌다기보다 호수 동쪽, 곧 이교도들의 땅에서 사건이 일어났음을 밝힌다. 티로는 갈릴래아 지방 지중해변에 위치한 카르멜 산에서 북쪽으로 55Km 떨어진 항구도시로 현재는 레바논 공화국에 속한다. 시돈 역시 티로의 북쪽 항구도시이다. 데카폴리스는 요르단 강 유역 10개 도시를 일컫는 총칭이다. “데카폴리스”라는 말마디 자체가 ‘열 도시’라는 뜻이다. 그 지역 대다수 주민은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자들이었고, 주로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의 문화가 유다인들의 문화(유목문화)와 달라서 그렇게 구별된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도 이방인이었음이 암시된다.
1. “귀먹고 말 더듬는 이…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갈릴래아 호수 지역으로 돌아오신 예수님께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7,32) 사람들은 예수님의 기도와 하느님의 에너지와 축복을 전하는 ‘안수’를 청한다. 이교도인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신체적이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이를 다른 이에게 전할 수 없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장애를 입은 상황이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계시를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고, 하느님을 고백하며 찬미하고 싶어도 이를 온전히 이룰 수 없는 사람이다. 인간적으로도 상호 간 온전한 소통이 불가능한 사람이다.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어서 고통스러운 고립과 외로움을 겪어야만 하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마르 7,33) 예수님의 몸이 다른 사람의 병들어 있는 몸에 가 닿는다. 귀를 열기 위해 그의 귀에 당신 손가락을 넣으시고, 입 맞추는 행위와도 같이 침을 바른 손으로 그의 혀를 만지시어 당신의 침이 그의 침과 섞이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이사 50,4-5) 하는 말씀처럼 “제자의 귀”를 열어주시고 “제자의 혀”를 주시고자 한다. 귀, 손, 침, 입, 혀라는 신체 부위들을 지칭하는 말마디들은 예수님께서 아픈 이에게 보이시는 신뢰와 안타까움의 표출이고, 동시에 아픈 이의 생명과 직결되는 모든 감각을 일깨워 생명을 되찾아주시려는 몸짓이다. 사랑스러운 어루만짐과 보살핌, 예수님의 손끝에서 번지는 신뢰와 연민, 그리고 예수님의 생명이 병든 이의 생명이 된다. 거침없이 그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예수님과 함께 어우러졌던 공동체와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피부적으로 느끼고 그렇게 생생하게 체험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이는 누구나 예수님에 의해 만져져야(touch) 하고, 그분께서 하시는 기도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그분의 명령을 받아야 하고, 그분의 말씀을 공개적으로 들어야만 할 필요가 있다. 듣지 못하는 이를 듣게 하시고 말하지 못하는 이를 말하게 하시는 것이 구원을 찾는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일이다.
2. “에파타!(열려라!)”
예수님의 동작은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 쉬신 다음”(마르 7,34)이라는 동작으로 이어진다. 아픈 이의 고통에 동참하며 구원을 청하는 몸짓이다. 예수님의 기도 자세이다. 예수님의 “한숨”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숨”이다. 그분의 “한숨”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아픔이고 동참이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2-23) 하는 말씀처럼 “우리”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탄식”에 깊이 동참하시고 연대하신다. 그래서 그 아픈 이의 해방을 위해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34) 단지 그의 귀와 입을 두고 명령하시지 않고, 그 사람 존재 자체, 전체를 두고 명령하신다.
예수님께서 취하신 동작과 과정을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①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와 당신 곁에 있게 하신다.(불안하고 두려운 이를 따로 떼어 긴장을 풀어주시고 개인적인 관계를 위해 준비시키신다.) ② (지금까지 들었던 소리는 그만두고 영혼의 소리를 들으라는 듯이)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어 상처를 만지신다. ③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신다.”(입맞춤 하듯이 사랑의 관계를 맺으신다) ④ “하늘을 우러러”(하늘의 도움을 기도하시며 장차 하늘을 보는 이가 될 것이라 하신다) ⑤ “한숨을 내쉬시고”(하느님의 숨과 인간의 숨이 하나 된다) ⑥ “열려라!” 명령하신다.(하느님의 명령으로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린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과 행적은 우리 교회의 역사와 전례에 자리를 잡기도 하였다. 고대 로마의 세례식을 비롯하여 밀라노의 세례식은 귀와 코를 여는 의식으로 시작하였고, 이는 오늘의 세례 의식에까지 일명 ‘에파타 의식’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입증되었고 세례 지원 시기에 실행되었을 이 의식은 초창기에 마귀를 쫓는 의식이었지만 은총을 전하는 행위이기도 하였다. 영적인 감각들을 불러일으켜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생명을 살고자 하는 은총을 갈망하는 행위이다. 성 암브로시우스(340?~397년)는 『귀를 여는 신비의 실행으로 여러분에게 불어 넣어진 영원한 삶의 향기를 들이마십시오. 우리가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할 때 여러분에게 이를 암시하는 것입니다.(신비 1.3)』라고 한다. 에파타 예식은 세례 전 첫 단계인 예비 기간과 예비자로 받아들이는 예식이다.
자신을 열어 타인에게, 그리고 하느님에게까지 나아가는 길은 혼자 스스로 알아서 가는 길이 아니다.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야 하고 배워야 하며, 실행에 옮겨야만 하는 길이다. 치유는 그렇게 이루어지고 구원은 그렇게 얻어진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손으로 우리를 만지시고 우리도 우리 몸과 온 존재를 다해 타인을 만나고 헌신하며 보살피라 하신다. 아무리 거룩한 생각이고 적절한 느낌이라 하더라도 생각이나 감정, 그리고 말이나 느낌만으로는 부족하다. 내 몸이 움직여야 하고 구체적으로 내 몸이 타인의 몸과 만나야만 하고 맞닿아야만 한다. 이것만이 단순한 육체적 치유가 아니라 실존적 치유와 일치를 위한 길이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타인과 소통이 불가능한 사람이었고, 그 자신의 목소리도 스스로 들을 수 없는 존재였으며, 자신의 느낌과 필요마저도 타인에게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오늘 복음의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제1독서인 이사 35,6에 언급되는 사람이다. 마르코는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하는 구원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묘사한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인간의 고독한 처지를 대변한다. 인간의 교만과 바벨탑의 비극(참조. 창세 1,1-9)으로 시작한 불통이 바야흐로 예수님의 “열려라!” 하시는 한 마디로 해결된다. 바로 이것이 열림과 풀림의 신비요, 통교의 신비이다.
불통이 만연한 세상이다 : ①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내면의 불통 – 생각과 마음, 욕구와 행동, 꿈과 현실, 느낌과 표현, 억제와 분출의 교란과 혼란이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로마 7,15-24)” ② 가정 안의 불통 – 부모와 자녀, 부부간 삶의 건강과 기쁨에 역행하는 갈등 ③ 사회 안의 각종 불통 – 경제, 문화, 정치, 계층, 이해집단 간에 야기된 불평등, 불의, 빈부의 격차, 당파싸움, 나아가 전쟁으로까지 이어지는 갈등 ④ 인간과 자연 간의 갈등 –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로마 8,19-22) 우리가 이러한 불통의 처지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치유와 회복의 출발이다.
우리를 듣지 못하게 하고 다른 이들과의 관계 안에서 불통하도록 하는 것에는 이기심, 교만, 원한, 분노, 질투, 다른 이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고정관념, 선입견, 일방통행, 성급함, 과도한 요구와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는 조급함, 지배와 소유를 위한 힘, 권력이 그 안에 있다.
3.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더욱더 널리 알렸다”
예수님을 만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마르 7,35)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예사롭지 않은 상황을 목격한 그와 주변에 있던 이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마르 7,36) 치유를 받은 이를 비롯하여 주변에 있던 이교도들은 메시아를 기다린 것도 아니고 종말론적인 예언자를 기다린 것도 아니었으므로 신앙 고백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눈으로 보게 된 사실에 근거하여 일어난 일, 곧 예수라는 분이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이’를 듣게 하고 말하게 하셨다며 이를 “더욱더 널리 알렸다.” 그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 한다. 예수님을 향한 신앙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인정하고 알아본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유다인들은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이사 35,1.5) 하던 오래된 종말론적 예언이 비로소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보았어야 했다.
귀는 모든 소리와 음성이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자리이고, 혀는 인간의 소리가 꼴을 갖추어 외면으로 나오는 자리이다. 우리는 들음과 말함으로써 타인을 알고 이해하며, 하느님을 들음으로써 그분을 알아 그분을 고백하게 된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로마 10,17)라는 말씀 그대로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를 말한다. 우리에게 귀가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고 입이 있는 것은 하느님을 고백하기 위함이다. 귀와 혀를 열어주시고 풀어주심은 예수님의 복음을 “제대로” 듣고 다른 이에게 선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믿음이 들음에서 비롯되었고 고백으로 이루어진다 함은 우리의 믿음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임을 밝혀주기도 한다. 진정한 들음은 내가 곧 공동체의 진정한 구성원이라는 사실도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의 끝 구절은 그를 데리고 온 이방인들과 군중이 ‘모두 함께’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 하면서 예수님께서 베푸신 하느님의 구원을 보고 그것을 선포했다고 기록한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마침내 현실을 판단하여 옳고 그름을 가려내고 그와 동시에 억압적인 상황을 비판하고 단죄하며, 변화의 길을 선포할 수 있게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선포하기 위해서, 그리고 말 없는 침묵의 증거만이 아니라 힘 있는 웅변의 증거를 하기 위해 세례를 받았다. 우리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그들의 귀를 열어야 하고,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그들의 입과 묶인 혀를 풀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것이 들을 수 있는 귀와 말할 수 있는 입을 가진 부모들의 사명이다. 설령 육신의 귀와 입이 잘못되었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귀와 선포하는 입을 가진 부모들의 임무이다. 『기도를 사랑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공부보다도, 같이 즐겁게 노는 것보다도 중요합니다.(돈 보스코, 1815~1888년)』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신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방자이신 예수님의 행적을 우리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 재현해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말씀은 그저 전달하고 선포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이 장애가 있다면, 그들의 장애를 풀어 정말이지 듣게 하고 다시 말하게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우리 교회나 공동체에는 어떤 의미에서 말하는 이들만 말하고 말 더듬는 이들이 말할 수 있도록 하지도 않고, 또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충분한 인내로 그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야만 할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에 우리들의 공동체나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언어 장애를 치유하는 곳이 아니라 그저 침묵하는 상태로 남을 때가 많다. 흡사 머리가 온통 입으로만 되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만 계속 말하는 상태에서 말 더듬는 이들이라는 다수의 침묵이 강요되는 상태는 어떤 의미에서 폭력의 현장일 수도 있다.
“에파타!” 곧 “열려라!” 하는 말씀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 각자가 들어야 하는 주님의 초대이다. 이는 동시에 우리가 다른 이들과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며 전해야 하는 초대기도 하다. 이는 오늘 우리들의 공동체와 교회의 여정에서 소통에서 나눔으로, 나눔에서 공동체로, 공동체에서 일치로 시급히 나아가라는 초대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