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에는 마르코복음을 따라가는 것이 원칙이다. 이에 따라 지난주 연중 제16주일까지 마르코복음이 계속 낭독되었다. 그러나 ‘나’해의 연중 제17주일부터 21주일까지 다섯 주 주일은 요한복음 6장에서 복음을 취한다. 마르코복음의 순서를 따라가되 내용상으로 더욱더 풍부한 요한복음을 취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연중 제22주일에는 다시 마르코복음 7장으로 돌아와 연중 제33주일까지 마르코복음이 주일 복음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은 원래 빵에 관한 기적으로서 가장 오래된 서술이라 할 수 있는 마르 6,35-44를 읽어야 할 터인데 요한 6,1-15를 읽는 셈이다.
원만한 이해를 위해서는 요한복음 6장에 대한 간략한 도입이 필요하다. 요한복음 6장은 “생명의 빵”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으면서 요한복음 전체로 보아 다소 독립된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미루어 짐작하건대, 최후의 만찬을 기록한 요한 복음사가의 기록에서 성체성사의 제정에 관한 내용 대신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예수님(참조. 요한 13,1-17)을 기록하느라 건너뛰었다고 볼 수 있는 성체성사 제정에 관한 교리를 복음사가 요한이 속했던 교회 안에 피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 추가된 부분일 것이다. 복음의 여느 부분이라도 중요하지 않을 수 없지만, 요한복음 6장은 그 자체로 보아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성체성사에 관한 이해를 통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단지 갈릴래아 사람이며 “요셉의 아들”(요한 6,42)인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지를 고백하고,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요한 6,57)라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선언하시며,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마침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왔고…”(요한 6,69)를 고백하며 믿음에 이르는 장면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빵의 기적 이야기는 1장에서 12장에 이르는 이른바 ‘표징의 책’에 천지창조 7일처럼 등장하는 총 7개의 기적 이야기 ① 포도주 변화 ② 고관의 아들 치유 ③ 벳자타 못가의 병자 치유 ④ 오천 명을 먹이심 ⑤ 물 위를 걸으심 ⑥ 태생 소경의 치유 ⑦ 라자로의 소생 중 4번째의 기적이다. 다른 복음보다 요한은 이 빵의 기적 이야기를 시기와 장소,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든 동기 분석에 이르기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네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는 모두 여섯 개의 빵에 관한 기적(마태 14,13-21;15,32-39 마르 6,30-44;8,1-10 루카 9,10-17 요한 6,1-15)을 듣는다. 이는 마태오와 마르코가 두 번씩이나 전해주기 때문인데, 이는 마태오나 마르코가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고 수난 전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주심으로써 마치 ‘특권’처럼 받게 된 성체성사의 내용이 중요하다고 여겨 두 가지의 전승을 모두 보존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여섯 가지 기록 중에서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통해서 얻게 되는 영원한 생명의 은총에 관해 상대적으로 아주 분명한 “표징”으로서 성체성사를 기록한다.
1. “갈릴래아…건너편…많은 군중…산에 오르시어”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요한 6,1)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 서쪽으로 방향을 잡으셨다. 아마도 그곳에서 휴식과 기도의 장소를 찾으려 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많은 군중”이 뒤따른다. 요한 복음사가는 그 이유가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요한 6,2)이라고 밝혀준다. 실로 그분의 행적과 말씀이 많은 이들에게 놀라움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예수님의 행적이 상당히 성공적인 결실을 거둔 때로 여겨지는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가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 간의 계약을 위해 시나이 산에 올랐던 것처럼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요한 6,3) 복음사가는 “마침 (그때가)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요한 6,4)라고 하면서 성체성사의 제정 때가 파스카 전야였던 것처럼 빵을 많게 하신 오늘 복음의 사건 역시 “파스카가 가까운 때”라고 기록한다. 사실 빵을 많게 하신 이 행적은 분명히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절 표징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곳, “산에 앉으시어”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신다.”(요한 6,5) 그리고 당신 편에서 먼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요한 3,16) 하느님 사랑에 관한 표징을 일으키시고자 작정하시고, 당신의 제자 필립보를 불러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 6,5) 하고 물으신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하느님과의 친교로 얻어진 열매에서 당신이 무엇을 어떻게 이루실지를 알고 계신다. 필립보에게 물으신 것은 “필립보를 (단지)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요한 6,6) 그런데 필립보는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 하고 대답한다. 이렇게 필립보가 비용을 산술적으로 계산하는 중에 다른 제자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는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하면서 얼토당토않다는 절대적 부족을 예수님께 여쭌다.
각자가 속한 매일의 일상사 안에서, 그리고 시대와 상황과 문화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때 우리에게도 오늘날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기에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해 오신다. 그러나 그 해답은 예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신다. 우리의 대답과 응답은 필립보처럼 그리고 안드레아처럼 고작 산술적이고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답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늘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최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계신다는 것을 다시금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 에피소드는 구체적인 사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곧, 사람들은 배가 고팠으며,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배고픔을 충족시키도록 제자들을 이끄셨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인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군중에게 선물해주시는 분으로 그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 위로, 구원, 마지막으로 당신의 생명까지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이런 일도 하셨습니다. 곧, 그분께서는 육체를 위해 음식도 소중히 다루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척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의 가장 단순한 요청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구체적인 실존적 상황 가까이 다가서서 초월적 가치(valori superiori)에 대해 말할 때 기꺼이 들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8년 7월 29일 삼종기도)』
오천 명 앞에 보리 빵 다섯 개이든 아니든 그것을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내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밖에 없음을 말씀드릴 것이다. 나머지는 주님께서 다 하실 일이다.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 6,9) 하는 말은 인간적인 산술의 계산이요 아둔함이다. 주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이다. 겸손하게 내어 놓을 것을 내어 놓았으면 그만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미약함을 손에 드시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우리의 정성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먹이실지는 주님이 생각하실 것이다. 얼마인가 하는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 드실만한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정성과 겸손한 자들의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를 드리실 것이며 만백성이 먹고도 남을 양식으로 삼으시는 분이시다.
2. “자리 잡게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가진 음식이 충분하기라도 한 듯이, “주님은 나의 목자…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시편 23,1-2) 하는 것처럼, 자기 양들을 이끌어 풀밭에 쉬게 하듯이, 제자들에게 일러 “풀이 많은” 자리에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요한 6,10)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우카리스테사스, εὐχαριστήσας, eucharistésas),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요한 6,11) 정확하게 최후의 만찬 시 성체성사를 제정하실 때와 같은 동작이 알려진다.
–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 감사를 드리신 다음
(이를 마태오와 마르코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이라 한다.)
– 나누어
– 주셨다
그리스도 주님께서 다섯 개의 빵을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는”(요한 6,10)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다.(디에도켄, διέδωκεν, diédoken)” 모두 “배불리 먹는다.”(요한 6,12) 전적으로 주도권을 쥐고 모두 배불리 먹이신 주님께서는 마침내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라고 선언하실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나타날 예언자 엘리사가 백 명을 먹인 것(2열왕 4,42-44)보다 비교가 안 될 만큼 뛰어난 예언자로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엘리사는 그저 한때 인간이 살기 위해서 먹어야만 하는 굶주림을 해결한 예언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시어 당신의 몸을 내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빵은 인간이 살기 위해 먹어야만 하는 필요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육신에게 빵을 주시는 분”(시편 136,25)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행적은 인간의 필요 충족에 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저 공짜 은총이요 무상이며, 남을 만큼 풍족하고, 대가나 보상을 요구하지 않으며, 오로지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것만을 요구한다.
3. “남은 조각…임금…혼자서 산으로”
모두 “배불리 먹은 다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요한 6,12) 하신다.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빵을 나누는 것에는 풍족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공동체에는 언제나 보살펴야 하고 연대해야 할 누군가 다른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남은 조각”은 축적과 비축이 아닌 다른 이의 빵이다. 구약의 “만나”는 욕심 많은 축적이 되어 버려졌다. 그러나 예수님의 거룩한 빵은 결코 버려지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마라.’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그것을 아침까지 남겨 두었다. 그랬더니 거기에서 구더기가 꾀고 고약한 냄새가 났다. 모세가 그들에게 화를 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침마다, 제가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였다. 해가 뜨거워지면 그것은 녹아 버렸다.”(탈출 16,19-21)
그러나 빵을 많게 하신 예수님의 이 표징 이야기는 사람들의 오해로 결말이 지어지고 만다. 이 표징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인간 구원의 역사 안에서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계시하시고, 당신이 예언자요 메시아이시며,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신 하느님의 표징이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계시하고자 하신 것인데, 군중은 예수님을 이렇게 이해하는 대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께 투덜대며, 급기야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피해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한 6,13)라는 귀결로 마감된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요한 6,14)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군중은 “억지로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삼으려”(요한 6,13) 하였다. 군중이 얼핏 예수님에 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진정한 신분과 그분의 행적을 어떻게 왜곡하고 심지어 배신하게까지 되는가 하는 사실이 드러난다.
예수님을 세상의 권력을 지닌 여느 임금처럼 여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아버지로부터 받은 임무를 부정하고 세상의 왕자인 사탄의 계략에 동의하는 것이 된다. 빌라도가 장차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요한 19,19)라는 명패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머리 위에 달 것이지만, 그 임금은 하염없이 약하고 무기력하게 온갖 인간의 고통을 지닌 모습으로, 인간과 세상의 미움을 온몸에 받은 희생양의 모습으로, 억압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 역사에서 소외된 모든 이들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임금이시다. 많은 군중이, 심지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이들조차도 예수님을 오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이 하느님의 계획은 무시하고 자기들 식대로, 자기들이 이해하는 방식으로만 예언자요 메시아를 받아들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복음사가 요한이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라고 표현한 것에서 감히 하느님을 하나의 목적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인간을 본다. 이는 인간이 자기들의 원의에 따라 자기들 식대로, 세상 기준으로 만들고자 했던 또 다른 우상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주는 권력과 힘이 당신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진정한 힘이 아니므로 이를 간파하시고 거부하신다. 광야에서 사탄이 제안했던 권력의 유혹(참조. 마르 1,12-13 마태 4,1-11 루카 4,1-13)을 단호히 뿌리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환호하는 군중을 피하시고, 성공처럼 비치는 환상을 뿌리치시며, 이를 원하거나 받아들이지도 않으신다. 제자들도 없이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신다.” 그리고 군중의 오해에 대해 깊이 묵상하시고, 다시 한번 아버지께 의탁하시며, 당신의 뜻과 행적을 알아듣지 못하는 군중과 제자들을 아버지께 맡기신다.
여기까지가 오늘 복음이다.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주일의 복음부터 4주간 동안 나누어 듣게 되는 예수님의 긴 담화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계시하신 풍성한 빵의 표징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인간의 풍요로운 생명을 위해 주시고자 하는 당신이라는 빵임을 역설하시게 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