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소명 사이에서

by YDG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8 루카 10,2) 하신다.

주님의 일꾼들을 자처하는 이들은 회심선교라는 두 축 사이의 어딘가에서 살아간다. 주님을 만난 감격이 회심이라면 그 회심은 결코 그대로 머물 수 없어서 누구에게라도 그 감격을 전하려는 선교의 열망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하느님을 만난 체험과 그에 빠져든 사랑, 그 체험과 사랑이 분출되는 기쁨과 소명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누군가는 사랑이 먼저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소명이 먼저라고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소명은 이처럼 서로를 떼어 구별하는 법이 없이 연결선 상에 있고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며 이쪽저쪽이다.

성경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계시의 아름다움을 본 사람들이고, 누군가를 위해 그 보았던 것을 전하는 사람들이다. 모세는 불타는 가시덤불을 보았다가 이집트로 돌아가 약속의 땅으로까지 민족을 이끌었으며, 이사야 예언자는 성전의 황홀함 안에서 자신의 죄를 자각하다가 은총을 입어 예언의 고된 길을 걸었고, 사울은 부활하신 주님의 빛으로 땅바닥에 엎어졌다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러 나선 사도가 되었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Hans Urs von Balthasar은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보는 이의 내면에 자기가 본 것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욕구를 심는다.(The beautiful stops the viewer in his tracks and then plants within him a desire to speak to others of what he has seen.)”라고 말한다.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고, 그것을 전하고 싶은 나의 욕구는 어디까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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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당신 안에서 쉬기까지 우리 마음은 얼마나 불안한가?” 하고 말합니다. 떼제 공동체 The Taize Community(종파를 초월한 기독교 공동체로 프랑스 남부 테제에서 설립) 설립자인 로제 Roger. Louis Schutz-Marsauche 수사도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에게서 멀어진 모든 것을 당신께 넘겨주기까지 내 마음은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존재를 규정합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이며,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도덕적 변화 이전에 정체성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사랑받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과 이루어야 할 소명이 상호작용하는 인생이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소명의 강을 건너야 하고, 우리의 소명은 정체성 안에 정박해야 합니다.

정체성과 소명 중 하나를 잃어버릴 때, 우리 인생은 침몰하거나 영원히 한 곳에 머무를 위험에 처합니다.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내적 무게가 없어 침몰해버립니다. 폭풍우로부터 배를 지켜주는 용골이 없는 셈이지요. 반대로 자기 소명, 즉 세상에서 해야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돛을 달지 않은 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항해할 수 없습니다.

해야 할 일만 중요하게 여기면 이런저런 요구의 폭풍우에 휘말려 삶이 전복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면 자기 비하에 빠집니다. “내 일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나는 못난 인간이야” 하며 좌절하지요. 반대로 있는 그대로의 존재만 중요하게 여기면 자기 위안 속에서 영원한 무기력증에 걸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면 침체의 늪에 빠지지요.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 있는 그대로의 나로 충분하니까!” 하고 말입니다. 자기 비하와 자기 위안, 둘 다 옳지 않습니다.

존재와 당위가 건강하게 상호작용 할 때, 울림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격려와 요구는 우리 인생에 필요한 두 가지 힘입니다. 우리는 자기 비하와 자기 위안에 똑같이 저항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애쓸 때, 우리 삶은 자신의 울타리를 넘어서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부름받은 ‘초월超越’입니다.

필요와 소명은 랍비의 지헤에 인상적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폰 살란트는 “네 이웃의 물질적 곤궁(필요)은 너의 영적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영성은 우리 의식이 더 깊은 단계로, 더 높은 단계로 확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영성은 우리 의식이 소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소명은 이웃의 필요를 헤아려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이 무엇보다 분명히 해야 할 물음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 삶이 어떤 사람 또는 무엇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지 묻는 것이지요. 나는 하느님을 알게 해 달라고 요구하기보다 하느님이 오늘 내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창조했기 때문입니다.(마틴 슐레스케, 가문비나무의 노래, 유영미 옮김, 니케북스, 2013년 초판, 2024년 특별판 1쇄, 72-73;117-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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