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6,7-13(연중 제15주일 ‘나’해)

“둘씩 짝지어 파견”(마르 6,7) by Odile Escolier

오늘 복음은 공관복음이 공통으로 전하는 복음이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을 예수님이 자기 고향인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고, 또 세례자 요한이 죽음을 당한 다음에 배치한다. 이는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셨다는 이야기가 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파견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기 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사명 수행에서 지녀야 할 생활 방식과 태도에 대하여 당부하신다. 어려움 속에서 이루어진 파견이었지만, 제자들의 사명 수행으로 많은 이들이 복음을 받아 회개하고 치유를 받는다. 이 복음은 다음 주 예수님과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빴다는 이야기, 이어서 그다음 주 파견에서 돌아온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는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이야기로 이어진다.

1.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예언자가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 존경받지 못할”(마르 6,4) 때 예언자는 물러가고 자기를 들어줄 다른 이를 찾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예언자도 히브리인들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가 그들과 함께 그들 가운데 묵으며 ‘말씀’의 전달자로서, 그리고 그들에게 선익을 가져다주는 이로서 활약할 수밖에 없었다.(참조. 하나의 예로서 1열왕기 17장과 2열왕기 5장에 등장하는 엘리야와 엘리세오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파견된 자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소리’요 대변인으로서, 당신 사명을 제때 정확히 완수하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고향 나자렛에서 사람들로부터 거부를 당하시고 도전에 직면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시지만”(마르 6,6), 이내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며 가르치셨다.”(마르 6,7) 그러던 중 어느 순간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마르 6,7) 말씀 선포의 사명을 사도들과 그 공동체를 통하여 확장하시고자 결정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기로 하신 동기는 분명했다. 당신 사명에 제자들을 참여시키는 한편 언젠가 제자들이 당신 없이도 그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잠시 멈추고 이에 대해서 한 발 떨어져 다시 되짚어보시기 위함도 포함되었다 하겠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갈릴래아 여러 마을로 파견하시면서, 당신께서 몸소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며 시작하셨던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신다.

2.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다. 이는 복음이 사사로운 개인의 것이 아니고, 공유와 공동 책임, 그리고 상호 도움과 깨어 있음 안에서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파견된 이들이 오직 유일한 파견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의존된 존재들로서, 행하는 모든 것과 소유하는 모든 것을 “둘씩 짝지어” 공유하고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공관복음이 공동으로 전하는 제자들의 파견 이야기에서 오직 마르코 복음만이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냈다고 전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하셨듯이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며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공동 책임상호 나눔, 도움, 협력으로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다. 당시 심부름꾼을 둘씩 보내는 것이 관례였고, 이것이 초대교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던 것을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사도 8,14;9,38;13,2;15,2.22.36-39 루카 10,1 1코린 9,2-6 참조) 이는 사명 이행의 객관성과 신빙성을 보장하고, 여행 동안 신변 안전과 윤리적 보호의 필요성 때문이기도 하였다. 유다인들에게는 두 증인으로 법적 최종결정이 내려진다는 법적 관행도 있었다.(신명 17,6;19,15)

이처럼 예수님의 사명 수행은 공동체적 성격을 띤다. “혼자보다는 둘이 나으니 자신들의 노고에 대하여 좋은 보상을 받기 때문이다.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일으켜 준다. 그러나 외톨이가 넘어지면 그에게는 불행! 그를 일으켜 줄 다른 사람이 없다. 또한 둘이 함께 누우면 따뜻해지지만, 외톨이는 어떻게 따뜻해질 수 있으랴? 누가 하나를 공격하면 둘이서 그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으로 꼬인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코헬 4,9-12) 현대인들의 슬픔과 비극은 모든 것을 혼자 하려는 개인주의에서 비롯된다. 악마는 하느님을 믿지 말라고 속삭이는 대신 혼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속삭인다. 그런 의미로 개인주의는 현대사회와 현대인들이 경계해야 할 가장 무서운 무신론이다.

선교의 사명이 이처럼 철저한 공유이고 가시적인 친교의 나눔이라면 이는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증명되어야만 한다. 메시지는 실로 그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과 그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양식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내가 전하는 말을 내가 살지 못하면서 그 말을 제대로 전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누군가가 어떤 말씀을 선포할 때 그 말씀을 제대로 살지 않는 이가 전하는 말씀이 권위가 있다고 한들 그 권위가 대체 어떤 권위일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부터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몹시 놀랐다.”(마르 1,22.27) 이는 그분께서 사는 대로 말씀하시고 말씀하시는 대로 사셨기 때문이었다. 이것만이 믿음을 일으키는 권위가 된다. 그렇지 않은 이의 가르침과 선포는 그 말씀을 듣는 이의 믿음에 장애가 될 뿐 아니라 물의를 일으키게 될 뿐이다. 그럴 바에는 그러한 소임을 맡았다고 하더라도 차라리 그러한 소임에서 물러나야 하고 입을 닥치는 것이 더 낫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설파하시는 메시지의 내용에 대해 주저함이 없으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나 파견된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만 하고 처신해야만 하는지를 직설적으로 말씀하신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을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마르 6,8-10) 하신다. 파견된 자들이 청빈, 불확실성, 단호함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선교의 사명이 영혼들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첫 번째 수혜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 버려진 이들, 끝자리에 있는 이들, 죄인들…과 같은 이들에게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아름다운 표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삶을 통한 증거는 우리가 아직 다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분의 말씀을 통한 증거보다도 더욱 강력한 것이었다.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 하신다. 당시 옷을 껴입는 것은 부자들이 하는 짓이므로 금하신다. 이 모든 것은 필수 불가결한 것 외에는 일체를 떨쳐버리고 홀가분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으로 전도에 헌신하라는 것이다. 『“두 벌은 껴입지 말라.”(마르 6,9) 하신 이 말씀에 담긴 뜻이 무엇입니까? 이중적(duplicity)으로 처신하지 말고 단순(simplicity)하게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354~430년)』 화려하거나 보통 사람과 다른 옷차림은 즉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만들고, 사람들에게서 떨어진 존재임을 알리고 구분되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속성을 지닌다.

이어서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마르 6,10) 하신다. 여기 “집”은 선교사를 받아들여 접대하는 집을 가리킨다.(마르 7,24 참조) 선교 시 베이스 캠프가 되는 집이다.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행에서 구체적인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사도 17,1-9;18,1-11 참조) 더 좋은 집을 찾아다니지 말고, 형편이 좋아 보이는 곳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말라는 얘기다. 이는 제자들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특권의식이나 질투, 경쟁심을 막기 위함이다. 또한, 오래도록 그 집에 정착하지 말고 떠남을 전제로 하는 머묾이어야 한다는 말씀이고, 머무는 그 집의 식구가 되어 일상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철저히 현지의 일원이 되라는 선교사의 토착화에 대한 실마리를 엿볼 수 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소위 ‘복음화’, 새로운 복음화와 선교에 관하여 말에 말을 거듭해 온 것이 사실이고, 이러한 주제를 다루지 않는 교회의 모임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에서 우리가 설파하고 전하는 복음을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소홀히 했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항상 어떻게 강론할 것인가, 스타일과 단어나 어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어떤 책이나 기사를 인용할 것인가에 관해서 노심초사하고, 뭔가 새로운 얘기를 하기 위해 사목 잡지나 웹사이트를 열심히 기웃거린 것도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삶을 통한 증거, 누군가가 우리의 삶을 통해 복음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등한시했고, 많은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다.

하지만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응용할 수 있는 이러저러한 직접적인 지침이나 규정을 주시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지침들은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들이 처한 지리적 위치, 기후와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 어떤 이상주의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처럼 예수님과 같이 되기 위해 전설적인 청빈의 모범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모범을 살아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의 주목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보이도록 하는 표징이 되도록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스타일은 무엇보다도 먼저 복음을 설파하는 선교사들, 그들의 삶, 그들의 업적, 그들의 공동체, 그들의 움직임을 통한 증거가 아니라 그저 은총이요 공짜인 복음의 무상성,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소유하고 있는 수단과 방법이나 매체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그 수단을 최소화하면서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로마 1,16)인 복음의 힘에 철저하게 의존하는 증거이다. 너무 많은 무게와 불필요한 짐을 줄여 단순하고 홀가분하게 사는 이탈, 가진 것을 나누고 주어진 것을 나누는 능력의 청빈, 비축하지 않고 예비하지 않으며 안전장치를 벗어버리는 홀가분 속에서 섭리를 믿는 증거이다. 귀에는 달콤하게 들려서 사람들이 놀라게 하거나 매력에 빠져들게는 하면서도 마음에는 파고들지 못하여 아무도 회심하게 하지 못하는 빈말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선교사에게 가장 큰 시험이요 어려움이랄 수 있는 실패, 확신에 찬 큰 노력이나 수고와 헌신에도 불구하고 닥쳐오는 실패를 선선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의 증거이다.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0-11) 하였던 그대로 예수님도 수난의 시간에 이르러 혼자이셨고, 버림받으셨으며, 당신을 돌봐주는 그 어떤 제자가 없었다. 그분의 파견을 받은 이가 어찌 그분과 다른 길을 갈 수 있을 것인가?

3.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이러한 인식 안에서 파견을 받은 사람은 여기저기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 아니라 거절까지 당하고 말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려라.”(마르 6,11) 하시는 말씀대로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음’을 밝히고 떠날 뿐이다. 그렇게 다시 여기저기 다른 곳에서, “세상 끝날까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교회는 태어나고 또다시 태어날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설령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는 몰라도 괜찮다. 하느님에 관해 거창하고 유려한 담론을 펼칠 수 있는지 없는지, 혹은 이성적인 논리로 세련되게 표현하는 교리인지 아닌지는 관건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속이면서 그리스도교가 일종의 문화 현상일 뿐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사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스타일로 단순하게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사람들 가운데에서 한 인간으로 사셨던 것처럼 사람 사이에서 사람들이 다시 걷도록, 다시 일어나도록, 악으로부터 치유하면서, 오직 사랑만이 구원이며 죽음이 더는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그렇게 신뢰를 주고 희망을 주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악마를 쫓아내어 그들이 발붙일 곳이 없게 하시고, 그렇게 해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특별한 은총으로 다시 시작하고, 다시 살고, 다시 희망하고, 다시 사랑하는 힘으로 인간을 다스리시도록 하셨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실 때 이는 어떤 무장 세력이나 선전선동가가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복음의 다스림을 받는 복음의 증인이 되고,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신 분의 또 다른 이야기가 되도록 하신 것이다. 초대교회의 디다케라는 문서는 『주님께로부터 파견된 자는 영감을 받아 말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길을 지닌 자이다.』라고 말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스스로 자문해야만 한다. 복음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복음을 선포한답시고 말과 삶 사이의 괴리를 살면서 정신 분열을 발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교의를 사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이상을 사는 것도 아니며, 어떤 영적인 치료 방식을 사는 것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보살피는 것을 목표로 사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같은 삶을 사는 삶이다. 아멘!

One thought on “마르 6,7-13(연중 제15주일 ‘나’해)

  1. 예수님의 삶과 같은 삶.
    예수님은 단순한 삶을. 사셨으니
    저두
    저두요.
    그렇게 살아볼래요.
    노력해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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