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형제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에 한 형제가 사막교부의 이야기 한 토막을 전해준다. 온갖 걱정과 산만함으로 시달리는 젊은 제자가 고명하신 스승님께 “저는 처자식도 없이 세상을 떠나 이처럼 사막에 사는데, 왜 이리 산만합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스승님께서 “너에게 ‘처자식’은 없어도 ‘저 자식’이 있잖아? 떠났어도 떠난 것이 아니지.” 하시더라는 것이다.
우스개로 들었지만, 우리는 늘 함께 사는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부정적으로 달고 살면서 떠나지 못하고 떨치지 못하며 떠났어도 떠나지 못한 채 산다.
오십이 채 덜된 자매 수녀님들이 있다. 한 분은 아마존에서, 다른 한 분은 에티오피아에서 벌써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하신다. 언니 수녀님은 어린 시절부터 알았다. 몇 년 만에 둘이 맞춰 함께 온 석 달 휴가라고 했지만, 남자들 식으로 거나하게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회포를 풀 수도 없는 처지라 안타깝고, 그분들의 휴가가 곧 끝나가는 것을 나도 모르게 내가 의식하면서 조바심이 인다.
떠남은 잃어버릴 준비가 된다는 것, 발가벗을 준비가 된다는 것, 자신의 확실성이 망가지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 의심을 받을 준비가 된다는 것, 한마디로 자신을 드러낼 준비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짐, 이것저것 잡동사니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생각이라는 짐이 없이 떠날 수는 없지만, 무엇보다도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이를 다시 짜 맞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길을 나선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겸손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고, 결과적으로는 침묵할 준비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알몸과 침묵은 ‘길’이 결코 피상성에 그치거나 공허로 남지 않기 위해 필수 불가결이다.
시인은 말한다: “네가 바른길을 걷게 하도록 모든 것을 벗어라. 무장을 갖춘 백 명의 용사라도 벌거벗은 이를 더 벗길 수는 없다.”(<이 세상은 어린 신부新婦>에서, 유누스 엠레Yunus Emre, 1238~1320년, *유누스 엠레 문화원이라는 이름이나 튀르키예 200리라 지폐 뒷면 인물에서 그를 볼 수 있다)
기원전의 철학자도 말한다: “당신은 당신에게만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믿고, 기나긴 여행, 방문했던 여러 곳에도 불구하고 슬픔과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이상하다는 듯이 놀라워한다. 당신이 머리 위에 이고 사는 하늘이 아니라 당신의 정신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 비르길리오가 말하는 것처럼 ‘당신의 등 뒤로 땅과 도시들을 남겨놓고’ 광활한 바다를 건너더라도, 그 어디를 가더라도 당신의 악덕이 당신을 따라갈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불평을 하는 이들에게 ‘당신은 여행이 당신을 기쁘게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디를 가나 당신이 당신 자신을 데려가고, 그래서 당신이 당신을 밖으로 내몰았던 그 악에 계속 쫒기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새로운 장소나 도시에 대한 지식, 색다른 풍경들이 당신에게 뭔가 어떤 기쁨을 주기나 할까? 그러한 뒤척임은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탈출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를 당신 자신에게 물어보라. 항상 당신 자신과 함께 탈출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영혼에 당신이 지고 있는 짐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그 어디를 가더라도 기쁘지 않을 것이다. …… 그러나 당신을 뒤따르는 그 악을 뿌리 뽑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그 곳곳이 당신에게 기쁨을 줄 것이다. 설령 가장 멀고 낯선 야만인의 땅에 내팽개쳐진다 해도, 그 어느 곳이라도 그곳이 당신을 반갑게 맞아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도착하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신으로 그곳에 도착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그 어떤 장소에도 묶어놓아서는 안 된다. …… 그러니 이제 당신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들이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힘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당신을 민 것이니, 어디에 가든 행복할 것이다.(세네카Seneca, 기원전 4~65년, 루칠리오에게 보낸 편지 28)
신부님의 사랑어린 조바심에서부터 마지막에 쓰신 “어딜 가든 행복할 것이라”는 축복까지 감동투성이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자신”을 싸 짊어지고 떠나느라 애를 먹을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에티오피아수녀-
잃어버릴 준비가 되었는지, 벌거벗을 준비가 되었는지 다시 짐을 싸고 있는 제게 울림이 되네요. 이번에는 못했지만 다음엔 거나하게 뭐든 한잔해요! ㅎㅎ 고맙습니다, 신부님!!! -아마존수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