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시기를 끝나고 연중 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두 대축일, 곧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고 이제 ‘나’해의 복음인 마르코의 복음으로 돌아와 연중 제10주일을 맞는다.
바야흐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신뢰할 수 있는 스승으로 인정받고 계셨으며,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잇는 예언자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고독하게 살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제자들을 모아 무리를 이루셨으며, 그들 중에는 예수님과 함께 동고동락하는 열두 제자들이 두드러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였음을 선포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과 병자들을 보살피고 치유하시는 행적은 많은 군중을 끌어모으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성공적인 설교 여정은 예수님과 그분의 공동체가 “음식을 들 수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1.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있는 “집으로” 가셨을 때 어디로 가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던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마르 3,20) 예수님의 이러한 명성은 예수님의 친척이나 가족들, 그리고 예수님이 속해 있던 종교적 공동체에 걱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복음사가 마르코는 예수님의 가족이나 친지들, 그리고 동향 출신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적대적인 불신을 가졌다고 감히 증언한다. 예수님께서는 가까운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리석고 미쳤다고까지 생각할 수 있는 삶의 선택을 하셨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가족과 고향을 버렸고 떠돌이 생활을 하였으며 당시 문화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독신을 선택하여 사셨으며 일단 성공적으로 보이는 여정에서 종교적 권위를 가진 이들이 우려와 적대감을 느끼도록 했다.
가히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그의 행보는 마땅히 저지당해야만 되었다. 그렇지만 예언적인 삶을 사는 이들의 삶은 “저 예언자는 어리석다. 영을 받은 저 사람은 미쳤다.”(호세 9,7)라고 하는 것처럼 늘 이런 운명이 아니었을까? 예언자들의 생활 방식과 말투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미쳤거나 망상적이라고 판단하며 심지어 물리적으로 제거하려고까지 든다. 예수님에 대한 가족들의 우려에는 법적인 권위를 지닌 당국의 적대감까지 더해졌다.
2. “율법 학자들이…성령을 모독하는 자”
“예루살렘에서 (갈릴래아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마르 3,22)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듣는 군중을 염려하였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반면, 율법 학자들은 마귀 대장인 베엘제불에 사로잡혀 그 힘을 발휘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마저도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해방하시고 치유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옭아매고 구속하여 노예 상태에 있도록 하는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생각하면서 예수님 안에 그 마귀 대장, 곧 베엘제불(Βεελζεβουλ, 문자 그대로 풀면 ‘파리의 군주Lord of the Flies’, ‘똥의 주인the Lord of the dung’)이 들어앉았다고 말하고, 이것이 예수님이 속한 종교적 공동체의 권위자들이 계산하는 추측이자 판단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에게로)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마르 3,23-2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몹시 분명하다. 율법 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당신이 사탄의 우두머리이고 그래서 사탄들을 쫓아내는 것이라면 사탄들의 권세가 궁극에 몰락하고 말 것이 아니냐는 말씀이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마르 3,27)라고 하시면서 더는 논란할 것 없다는 듯이 못 박아 말씀하신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물에 당신을 담그시어 하늘의 소리를 들으셨고(마르 1,9-11), 광야에서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으나(마르 1,12-13) 그를 묶으시어 꼼짝 못 하게 만드셨으므로 사탄을 쫓아내실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두고 세례자 요한이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마르 1,7)이라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을 부여받아 “권위(ἐξουσία, exousía)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분”(마르 1,22)이시어서 진정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마르 1,27) 안에서 사탄에게 명령하실 수 있는 분으로 이미 선포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아멘!)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8-29)라면서 엄숙하고도 심각하게 경고의 말씀을 남기신다. 성령을 거스르는 죄에 관하여 제멋대로의 환상이나 상상에 머물지 말고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말씀이다.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는 대단히 강하고 엄중한 말씀이지만 실제로는 그 말씀의 엄중함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사탄이 짓는 죄이겠거니 하면서 우리와는 별 상관없다는 듯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말씀이다.
질투와 시기에서 나오는 죄는 다른 이가 선을 행하였거나 행한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하면서, 그 선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싶어 하며, 그 선을 사탄의 장난인 양 돌리면서 자기 혼자서만 선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죄이다. 예수님께 다가온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선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하느님의 영으로 이루어진 일로 인정하기보다는 일부러 사탄의 일인 것처럼 사탄에게 전가한다. 하느님의 일을 인정하지 않고, 성령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시선과 판단을 왜곡하여 선한 일을 사탄에게 돌리는 그들의 작태가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죄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종교인들이 종종 저지르는 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누가 내 어머니이고 형제들이냐?”
예수님께 이런 부정적인 판단이 있었다는 것을 보충하여 강조하기 위해 마르코 복음사가는 그러한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있었다면서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마르 3,31)라고 기록을 이어간다. 이러한 내용이 친척들이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해서 그분을 붙잡으러” 온 그 친척들의 이야기인지(마르 3,21), 아니면 마르코 복음사가가 앞선 “친척”이라는 말 대신에 “어머니와 형제들이”라는 말을 삽입하면서 별도의 내용을 밝히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찌 되었든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마르 3,32) 하면서 “밖에 서서”, “밖에서”라는 말로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 “밖에(ἔξω, éxō, out, out of, outside)” 어머님과 형제들, 누이들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만나러 움직이시지 않는다. 예수님 “군중이 앉아 있는” 공동체 한가운데에 예수님께서는 그대로 앉아 계시면서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3-35) 하신다.
이런 내용으로 예수님께서는 살과 피로 생겨난 가족, 곧 역사적인 가족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새로운 가족, 제자들의 공동체를 가족으로 알고 살아간다고 선언하신다. 이제 예수님과의 인연은 부모나 혈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일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로서 형제애로 서로 사랑하면서 하느님의 뜻과 그 뜻의 실현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예수님과의 일치와 관계라는 공간에서 과연 누가 안에 있고, 또 누가 밖에 있는 이들인지를 진지하게 물어야만 한다.
한편에서 오늘 복음의 대목은 다소 엄중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님과의 이러한 만남을 평생 어떻게 살아 내셨는지도 깊이 묵상해보아야 한다. 성모님께서 오로지 믿음으로 이 만남을 살아 내셨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어찌 보면 다소 가혹한 장면으로 다가오는 오늘 복음의 장면은 성모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성모님의 위대함을 드러내주는 장면이 된다. 성모님만큼 하느님의 뜻을 깊이 묵상하고 온전히 실행한 이가 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성모님은 오롯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분으로서 예수님의 육신을 주시기에 실로 합당한 분이셨다.
오늘 복음 대목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살아가면서 가족의 불신과 반대를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고, 내가 속한 종교의 권위권자들로부터 적대감을 받을 날도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이 된다. 제자의 길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뜻을 실현하며, 그분께서 먼저 베풀어주시는 자비에 의탁할 때만 경험할 수 있는 예수님과의 일치 안에 내가 서 있는지 아니면 밖에 서 있는지를 끊임없이 스스로 되물어야만 하는 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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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일의 복음(마르 3,20-35 참조)은 예수님께서 직면하셔야 했던 두 가지 종류의 오해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곧 율법 학자들의 오해와 예수님 친척들의 오해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성경에 정통한 사람들이었고 백성에게 성경을 해설할 책임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 율법 학자들은 군중 앞에서 예수님의 신용을 떨어뜨리려고, 예수님의 명성이 퍼지기 시작했던 갈릴래아로 예루살렘에서 왔습니다. 험담을 퍼뜨리는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신용을 떨어뜨리고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런 일을 행하기 위해 파견됐습니다. 더구나 이 율법학자들은 끔찍하고도 명확한 고발내용을 가지고 왔고(이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22절)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분을 부추기는 자가 마귀들의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이를테면 “이 사람은 마귀가 들렸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치유하셨지만, 율법 학자들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영을 통해서가 아니라 악마의 영을 통해서, 곧 마귀의 힘을 통해서 그런 일을 행하신다고 믿게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강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반응하셨고, 이런 류의 거짓 증언을 참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율법 학자들은, 아마도 스스로는 깨닫지 못하지만, 가장 심각한 죄에 빠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 안에 현존하시며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부정하고, 신성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게다가 성령을 거슬러 모독하는 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용서를 받지 못하는 유일한 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마음을 닫는 행동으로부터 기인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떤 사람의 선행이나 착한 마음에 대한 강한 질투로 인해 거짓으로 고발하도록 부추겨지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정말로 치명적인 독이 있습니다. 악의(惡意, malizia)를 품은 사람은 타인의 훌륭한 명성을 계획적으로 파괴하고 싶어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무서운 유혹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양심을 성찰하면서, 이러한 나쁜 풀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그것이) 더 자라나고 더는 치유할 수 없는 악한 결과를 낳기 전에, 고백성사를 통해 즉시 이를 고백하러 가도록 합시다. 이런 행동은 가족, 우정, 공동체, 사회까지 파괴하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관련된 아주 다른 또 다른 오해, 곧 그분 친척들의 오해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떠돌아다니는 예수님의 새로운 삶이 그들에게는 미쳐 보였기 때문에, 친척들은 걱정에 사로잡혔습니다(21절 참조). 사실 그분께서는 음식을 먹을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사람들을 위해서, 특히 병자들과 죄인들을 위해서 기꺼이 도와주려는 태도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사람들이 먼저였습니다.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사람들을 돕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치료했습니다. 모두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먹을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친척들은 그분을 나자렛으로, 집으로 데려가려고 결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던 장소에 도착하자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습니다(31절 참조).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32절). 그러자 그분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시며 그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분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을 둘러보시고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3-34절). 예수님께서는 혈연관계에 바탕을 둔 가족이 아니라, 그분께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성령 안에서, 우리를 받아들이고 우리를 서로 일치시켜주는 그분의 사랑에 바탕을 둔 새로운 가족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요 그들은 서로 형제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를 서로 형제가 되게 하고, 예수님의 가족이 되게 합니다. 다른 이들을 험담하고 다른 이들의 명성을 파괴하는 것은, 우리가 마귀의 가족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그분의 어머니와 그분의 친척들을 존중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성모님에 대해서는 특별히 존중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이야말로 모든 면에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 완벽한 제자였기 때문입니다.…(교황 프란치스코, 삼종기도 훈화, 2018년 6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