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날 봉逢

전날 밤, 내 마음에는 자꾸만 ‘만날 봉(逢)’이라는 글자가 맴돌았다. 십 년도 넘게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면서도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다. 찾으려 했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를 찾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만나야 할 때가 되어서일까,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일처럼,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설렘 속에 다시 마주했다.
만나야 할 사람은 결국 만나게 되고, 알아야 할 것은 마침내 알게 되며, 걸어야 할 길은 끝내 걸어야만 인생도 비로소 제 길을 다하는 것일지 모른다.
아무리 애써 찾아도 끝내 만나지 못하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찾지 않아도 때가 이르면 우리 앞에 문득 나타나는 인연이 있다. 아무리 알려고 애를 써도 끝내 알 수 없는 것이 있는가 하면, 굳이 알려 하지 않아도 어느 날 삶이 스스로 가르쳐 주는 진실도 있다. 가고 싶지 않아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이 있는가 하면, 간절히 가고 싶어도 끝내 허락되지 않는 길도 있다.
어쩌면 인생은 내가 선택한 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고, 때가 되어 열리는 진실을 받아들이며, 마침내 걸어야 할 길을 걸어내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을 나타내는 한자에는 ‘만날 봉(逢)’이 있다. ‘상봉(相逢)’의 그 ‘봉’이다. 우연히 마주치는 만남을 ‘조우(遭遇)’라 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다시 만나는 일을 ‘해후(邂逅)’라 하며, 반갑게 서로 만나는 일을 ‘상봉(相逢)’이라 한다. 사람의 삶은 만남으로 이루어지고, 만남 없는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을 만나고, 세상을 만나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과도 만나며 살아간다.
동양의 전통에서는 만남을 인연과 하늘의 뜻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고, 서양의 전통에서는 인간의 의지와 선택을 더 강조하는 흐름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러한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동양의 사유에는 ‘만남을 기다리는 지혜’가, 서양의 사유에는 ‘만남을 만들어가는 의지’가 조금 더 짙게 배어 있는 듯하다.
만남은 우연처럼 시작되지만, 시간이 흐르면 필연으로 읽히고, 마침내 인연으로 기억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삶에는 과연 우연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우연이라 부르는 것조차 아직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필연일 뿐일까? 아니면 삶은 우연처럼 찾아온 사건들 속에서 조금씩 필연의 의미를 발견해 가는 여정일까?
그리스도인은 우연을 믿지 않는다. 인간의 눈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일지라도 하느님의 눈에는 오래전부터 준비된 섭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는 우연이 없다. 인간의 눈에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과 헤어짐, 기쁨과 상실, 성공과 실패조차도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는 저마다의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훗날 “그때 그 사람을 만난 것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우연이라 불렀던 것이 은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연처럼 은총이 다가온 ‘만남의 기록’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으셨고, 불타는 떨기 앞에서 모세를 부르셨으며,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고, 돌무화과나무 위의 자캐오를 불러 내려오게 하셨으며,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에게는 먼저 다가가셨다. 그렇게 성경은 인간이 하느님을 찾아간 이야기보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을 찾아오신 이야기를 그린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만남도 하느님께서 오래전부터 준비하신 하나의 ‘봉(逢)’일지 모른다. 인간은 그것을 우연이라 부르지만, 하느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준비하신 섭리라 부르신다. 그리고 그 섭리란, 언제나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느님의 발걸음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