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록(1)

3410. 인간, 당신 창조계의 작은 조각 하나가 당신을 찬미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을 찬미하며 즐기라고 일깨우시는 이는 당신이시니, 당신을 향해서 저희를 만들어놓으셨으므로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저희 마음이 안달을 합니다. 주님 당신을 부름이 먼저인지 당신을 찬미함이 먼저인지, 또 당신을 아는 일이 먼저인지 당신을 부르는 일이 먼저인지 제가 알고 깨닫게 해 주십시오.(1-1.1)

3411. 당신이 찾아오시기에는, 제 영혼의 집이 옹색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넓혀주십시오. 무너져가는 집입니다.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당신 눈에 거슬릴 것들이 있습니다.(1-5.6)

3412. 글을 배우라고 학교에 들여보내졌는데 가엾게도 저는 글을 배워 무슨 소용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로마에서는 ‘회초리에 손바닥을 내밀다’manum ferulae subducere’라는 말이 ‘학교에 다니다’와 동의어가 될 정도로 매질이 심했다)(1-9.14)

3413. 저지르고 넘어간 제 패악과 육체적 부패를 저의 영혼에서 기억해내려고 합니다. 그것들을 좋아서가 아니라, 저의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서입니다.…속임수 없는 감미로움, 행복하고 안전한 감미로움, 분산되지 않게 저를 가다듬는 감미로움 말입니다. 일자一者이신 당신을 등지고 다자多者를 향해 스러지면서(ad uno ad multa – 플로티누스 사상가에 따르면 만유의 존재론적 타락은 일자一者로부터 멀어짐이고 구제의 길은 일자에로 돌아감으로 표현된다) 제가 산산조각으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청소년 시절(그의 나이 16세 되던 370년, 학비가 떨어져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다우라 읍내의 공부를 중단하고 고향 타가스테에 돌아와 있었다) 저는 저 밑바닥 것들로 허기를 채우는데 몸을 불살랐으며, 다채롭고 그늘진 애정행각에 우거지게 뒤얽혔으며, 그러는 사이 제 용모는 시들고, 저 스스로 만족하게 즐기고 사람들의 눈에 들기를 꾀하다 보니 당신 눈앞엔 썩어 문드러지고 말았습니다.(2-1.1)

3414. 저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곤 사랑하는 일과 사랑받는 일 말고 무엇이겠습니까?(amare et amarti – 본서 13-9.10의 명구, “저의 중심은 저의 사랑입니다amor meus pondus meum. 사랑으로 어디로 이끌리든 그리로 제가 끌려갑니다.”를 예고한다)…사랑의 청명함이라는 것을 욕정의 짙은 안개와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 둘 다 혼란스러운 열기를 뿜어냈고, 유약한 나이에 정욕의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는 방탕의 구렁텅이 속으로 가라앉게 잠그는 것이었습니다.…제가 제 사욕邪慾에 흔들리고 나둥그러지고 들볶이면서도 한편으로 우쭐대는데도 당신께서는 잠자코 계셨습니다. 오, 더디신 저의 즐거움이시여!(O tardum gaudium! – “저에게 순결과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금방은 말고sed noli modo”라는 글귀를 연상시키면서 – 본서 8-7.17 –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유언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sero te amavi! 그토록 오래고 그토록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 10-27.38 –라는 심경도 연상시킨다) 당신께서는 그때는 침묵만 하고 계셨고, 그래서 저는 자꾸만 당신을 멀리하고 고통의 ‘결실 없는 씨앗’sterilia semina을 향해 더욱더 치달았습니다. 저의 오만한 실의失意와 불안한 권태 때문이었습니다.(2-2.2)

3415. 뒤집힌 의지, 아주 낮은 것들로 기우는 의지(교부는 윤리악의 원천을 ‘전도되고 아주 낮은 것으로 기우는 의지perversa atque inclinata in ima voluntas’라고 정의하고 있다), 자기 의지의 보이지 않는 포도주에서 오는 취기입니다.…어머니는 제가 아직 신자가 아니었지만 혹시 제가 비뚤어진 길, 당신께로 얼굴을 돌리지 않고 등을 돌리는(예레 2,27 참조 ; 교부는 자신과 뭇 인간의 인생 여정을 ‘하느님을 등지는 배향背向aversio’과 ‘하느님을 향하는 전향轉向conversio’으로 구분한다) 사람들이 걷는 그런 길을 가지나 않을까, 경건한 설렘을 안고서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2-3.6)

3416. 어머니를 통해서 당신께서는 저에게 침묵하지 않으셨는데, 저는 당신께서는 침묵을 지키고 계시고 어머니만 말을 하신다고 여겼습니다. 그이 안에서 저에게 무시를 당하시는 것은 당신이셨습니다. 그이의 자식, 당신 여종의 자식, 당신 종놈한테서 무시를 당하고 계셨습니다.(시편 116,16 참조) 그것도 모른 채로 저는 지독한 맹목tanta caecitate(교부는 자기의 정신적 도덕적 타락을 누차 ‘맹목’으로 명명한다)으로 곤두박질치며 나아가고 있었습니다.…(2-3.7)

3417. 보십시오. 제가 어떤 패거리와 바빌론의 한길platea Babyloniae(참조. 묵시 18,2 –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에는 타락한 세상의 전형으로 자주, 특히 ‘신국론’에서 바빌론을 언명한다)을 쏘다니고 다녔는지, 흙탕 속을, 마치 계피 향과 값비싼 향유 속인 양 뒹굴고 있었는지 보십시오.(2-3.8)

3418. (장난으로 설익은 배를 도둑질한 행위에 대하여) 정의에 대한 빈곤과 싫증, 불의로 살찐 것 말고 딴 이유가 없었습니다.…하지 말라면 더 해보고 싶은 심보로(오비디우스의 명구 – ‘우린 금지되면 늘 하려 애쓰고 안 주겠다면 탐한다.nitimur in vetitum semper cupimusque negata.’) 저지른 일입니다.…저의 결손缺損(모든 행위는 주체의 완성을 향하는 작용per-fectus인데 악행은 행위 주체에 손상 곧 ‘결손de-fectus’을 가져오고 그 행위에 응당 있어야 할 선의 ‘결핍privatio’이어서 악의 본질은 자기모순이다)이 좋았습니다. 제가 결손을 입게 만드는 대상을 좋아한 것이 아니고 저의 결손 그 자체를 좋아했으며, 저는 추루한 영혼이었고, 당신의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에서 파멸에로 튕겨 나간 영혼, 파렴치하게 무엇을 탐한 것이 아니라 파렴치 자체를 탐하는 영혼이었습니다.(2-5.9)

3419. 결함투성이인 멋, 기만적인 악덕들의 그늘 밑에 살아남는 멋이라도 있을 법한데 극성마저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만조차도 지고함을 본뜨는 무엇입니다. 당신 홀로 만유 위에 지존하신 하느님이신데 말입니다. 야망도 영예와 영광 아니고 무엇을 탐하겠습니까? 당신께서 만유에 앞서 영예를 입으셔야 하고 당신 홀로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신데 말입니다. 권력의 잔혹성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려는 것인데, 한 분 하느님 말고 과연 누구를 두려워해야 마땅하겠습니까? 과연 무엇이 언제 어디서 어디로 또 누구에 의해서 당신의 권세를 벗어나 빠져나갈 수 있겠습니까? 방종한 자들의 유혹은 사랑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사랑보다 더 매혹적인 것이 없으며, 모든 것보다 곱고 빛나는 당신의 진리가 사랑받는 일보다 유익한 것은 없습니다. 또 호기심은 지식의 연구에 집착하는 듯이 보이는데 당신이야말로 만사를 또 최고로 알고 계십니다.(호기심이라는 악덕도 진리를 탐구하는 굴절된 양상이다) 무지와 우매함까지도 단순함과 무구함의 이름으로 덮이는 수가 있는 당신보다 단순한 그 무엇도 눈에 띄지 않습니다.(유일하게 단순한 선善, 그 점에서 유일하게 불변하는 선이 존재하느니 곧 하느님이다) 악인들에게는 자기 행위가 곧 원수인데(opera sua malis inimica – ‘모든 죄악은 당하는 자보다 행하는 자를 더 해친다’는 신념이 교부에게는 있었다. ‘죄란 이처럼 질서지워 있으니 죄짓는 사람에게 쾌감이 되었던 바로 그것이 벌하시는 주님께는 책벌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당신보다 무구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태만은 마치 안식을 갈구하는 듯합니다만 주님 말고는 충만한 안식이 어디 있습니까? 사치는 만족스러움과 풍요함이라고 스스로 불리기 탐합니다. 당신이야말로 충만함이시오, 부패하지 않는 감미로움이 결코 다하지 않게 풍부하심입니다. 낭비는 너그러움의 허울을 씁니다. 그런데 모든 선을 더없이 너그럽게 베푸시는 이는 당신이십니다. 인색함은 많은 것을 차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당신이야말로 모든 것을 차지하고 계십니다. 질투는 우열을 두고 다툽니다. 그렇지만 무엇이 당신보다 탁월합니까? 분노는 앙갚음을 도모합니다만 당신보다 정의롭게 갚아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공포는 낯설고 갑작스러운 것들을 두려워하며, 안전을 도모하노라 자기가 좋아하는 사물들에 훼방을 끼치는 것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당신께 갑작스러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당신께 낯설겠습니까?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누가 당신께로부터 떼어놓겠습니까? 굳건한 안전이야말로 당신한테서 아니면 어디 있겠습니까? 탐욕이 스스로 누리던 사물을 상실하고 나면 슬픔이 옵니다. 당신한테서 아무것도 앗아갈 수 없듯이 자기한테서도 무엇이 앗기는 일이 싫기 때문입니다.(2-6.13)

※ 총 13권 278장으로 이루어진 <고백록>을 권위 있게 맨 먼저 우리말로 소개해 주신 분은 최민순 신부님으로서 1965년에 바오로딸을 통해서였다. 여기서는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Confessiones, 성염 역, 경세원, 2016년>을 따랐다. 각 문단의 앞머리 번호는 원문에 없는 개인의 분류 번호이니 독자들은 괘념치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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