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1,28-32(연중 제26주일 ‘가’해)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 21,31

복음의 전후 맥락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바야흐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마치셨다.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도성에 제자들과 함께 군중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시며 “다윗의 자손”이신 메시아이심을 알리셨고(마태 21,1-11), 성전에 들어가셔서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하게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내시고”, “강도들의 소굴로 만드는구나” 하시며 야단치셨고(마태 21,12-17), 상징적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즉시 말라버리게” 하셨다.(마태 21,18-22)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도성과 성전을 중심으로 기득권층이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로부터 깊은 반감을 산다. 그들은 예수님께 공공연하게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하며 따지고 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요한의 세례” 운동에 관해 반문하시며 그 요한의 사명이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곧 ‘하느님의 뜻이었느냐, 아니면 요한 스스로 고안해 낸 것이냐’ 하고 물으신다.(마태 21,23-27)

이러한 예수님의 물음이 답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비유(두 아들, 포도밭 소작인, 혼인 잔치)를 연달아 말씀하신다.(마태 21,28-22,14) 기득권층에 있던 못 된 이들은 생각을 고쳐먹고 회개하기는커녕 더욱 분개하면서 이러한 비유들이 자기들을 향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이 더욱 완악해져 예수님을 향해 적대감을 키운다. 오늘의 두 아들 비유는 마태오만이 전한다.

1.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오늘 복음은 앞서 말한 세 비유 중 첫 번째 비유이다. 비유는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마태 21,28)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예수님의 질문은 비유를 듣고 난 뒤에 비유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하고도 결정적인 대답을 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생각해보고 헤아려보라는 초대이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마태 21,28-29) 아버지의 부탁을 듣고 맏아들은 처음에 아주 분명하게 의식적으로 싫다고 대답을 하면서 순종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중에 감히 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자기 생각을 바꾸어 포도밭으로 일하러 간다. 그렇게 맏아들은 되짚어 생각하고 자기 생각을 바꾸어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형제들의 이야기는 보통으로 갈등, 불신, 오해, 경쟁, 그리고 긴장의 사이일 때가 많다. 이는 야곱과 에사우, 이사악과 이스마엘, 혹은 요셉과 그의 형제들만 거론하더라도 분명하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성경의 배경을 안고 당신의 가르침을 주시고자 형제 둘을 상정하시어 비유를 시작하신다.

궁극적으로 하느님 앞에서 인간 실존이 살아가야 할 인생의 패턴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루카복음 15장 11-32절에 나오는 두 아들의 이야기와 비교한다면, 루카복음에서는 작은아들이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여기 마태오 복음에서는 맏아들이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간다. “생각을 바꾸어” 대신에 “뉘우치고”로 옮기기도 한다.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가는 것”은 ‘회개’이다. 자기 의지의 비움이다. ‘회개’를 두고 에제키엘 예언자는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6-28)라고 말한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가는가 그러지 아니하는가이며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하느님 앞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겉치레의 대답도 아니고 좋은 생각이나 지향도 아니며 입으로 하는 말만은 더욱 아니다. “일하러 가는” 실제 행동이고 실천이다. 말보다 행동이 더 크게 말한다!(Actions speak louder than words!)

인간은 하느님 앞에 감히 스스로 거부의 대답을 할 수 있는 존재이며, 스스로 생각을 고쳐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문장 자체 안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도대체 무엇이 맏아들의 마음을 바꾸게 하였는지를 추적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효심의 발로였는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죄책감이었는지, 아니면 자기밖에 일할 사람이 없다는 상속자로서의 자각과 책임감에서였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의 처지에서 거역할 수 없는 어떤 다른 이유에서였는지를 가정해 볼 수 있다.

2. “‘가겠습니다, 아버지!’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어서 비유는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마태 21,30)라는 내용으로 장면이 바뀐다. 이 아들은 “다른 아들”이지만 맏아들과 비교해 작은아들임이 틀림없다. 다른 경우에도 작은아들은 성경에서 못된 아들로 묘사되기도 한다.(참조. 루카 15장의 작은아들) 신앙인 중에서도 매일 미사와 주일 미사 때마다 하느님의 제단 앞에서 “가겠습니다, 아버지!”를 외치고 대답하면서도 가지 않고 행하지 않는 신자들이 많다. 여기 나오는 작은 아들은 직접적으로는 ① 유다인들(특히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같은 지도자들)이고, 나아가 ② 우리 자신들(예수님의 뜻과 계명을 접했던 그리스도인들)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아들”, 곧 작은아들은 일단 아버지를 존중하며 아버지를 ‘아버지’(원문에서는 ‘주님’)라고 부른다.(맏아들은 아무 호칭도 없이 그냥 ‘싫다’라고만 대답한다) 다른 아들의 순순한 대답과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어쩌면 감히 ‘싫다’라고 대답할 용기가 없는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아버지의 말씀에는 무조건 ‘예’라고 대답해야 한다는 식의 딱딱한 규범과 관습에 따라 엄한 교육을 받은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기가 그렇게 포도밭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나중에 알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거나, 응석받이로 자라 그렇게 행동해도 나중에 아무렇지도 않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이 아들은 대답은 해 놓고 실천하지는 않는다.…여러 가능성이 있겠지만 우리는 큰아들처럼 작은아들이 그렇게 행동했던 그 정확한 동기를 파악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남는다. 두 번째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말로는 ‘예!’라고 하면서 자기 말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이 비유와 같은 상황이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에서 일어났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공동체에서도 일어났고,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도 일어난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하는 말씀처럼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주님!” 하면서도 그분의 뜻은 실행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참석하고 주님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도 그분의 뜻을 실천하지 않고(참조. 마태 7,22-23 루카 13,25-27) 그분을 따르는 제자로서 그분의 생활 양식에 자기 삶을 맞추려고 구체적인 노력과 행동하는 삶을 살지 않는 이들, 제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그저 십자가나 목에 걸치고 유니폼만 걸친 군인 아닌 군인 같은, 때와 편의에 따라 그 군복이나 십자가마저도 입었다 벗었다 하는 삶을 사는 이들의 가면을 벗기고자 한다.

이 비유 덕분으로 우리는 오늘날 “맏아들”과 “다른 아들”로 대표되는 이들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수많은 종교인이 신앙을 고백하고 말에 말을 쏟아내고 있으면서도 그 말을 일상에서 실현하지 못하고, 세상에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합리화 속에서 말을 말대로 살지 못하며 오직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행동만이 중요한 것처럼 그렇게 산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하느님 앞에 분명하게 신앙을 고백하지도 않고 항상 익명의 존재로만 남아 있으며 거듭 ‘No!’라고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에서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이름 없이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미카 6,8)으로 주님의 뜻을 묵묵히 실천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두 아들의 경우를 말씀하신 것으로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고 물으시고, 사제들과 원로들인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속으로는 뜨끔하면서) 대답”(마태 21,31) 한다.

2016년 12월 1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비유를 두고 그리스도인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세 가지 유형의 저항을 지적한다. 『① 한다고 하면서 하지 않는 빈말(empty words)로 하는 저항 ② 온갖 이유를 들이대며 합리화, 정당화하는 말(justificatory words)로 하는 저항 ③ 남에게만 탓을 돌리는 비난하는 말(accusatory words)로 하는 저항』 등이다. 팔순을 넘겨 걸음을 잘 걷지 못하는 어느 자매는 『예수님 포도밭으로 가는 길이 멀고 또 멀더라도, 아둔한 기도라도 바치며, 계속 가야지요.』 한다.

3.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예수님께서는 그 대답 끝에 이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 하고 덧붙이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돌직구이며 강하고 엄하다. 그 말씀을 듣는 이들을 감히 세리와 창녀에게 견주어 판단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했을까?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죄인으로 드러나고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보다도 못할 수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오히려 그 말을 듣는 이들이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을 느껴 다른 이들이 경멸하고 단죄하는 죄 많은 삶에서 벗어나 삶을 바꾸라고 하시는 의도적인 역설이었을까?

“세리”는 직업상의 죄인이고 “창녀”는 윤리상의 죄인을 상징한다. 세리는 다른 이를 속이고, 창녀는 성적인 죄를 저지른다. 이 두 직업은 당시 정복자인 로마군에 밀착하여 벌이하는 이들이었다. 세리는 정복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세금을 거두어들였고, 창녀는 자주 로마군들에게도 그들의 몸을 팔았다.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면서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루카 18,11)라고 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23절)” 앞에서 “세리와 창녀들”을 들먹이시고 당신 말씀을 더욱 선명하게 대비하며 얘기를 풀어 가신다. 그런 까닭으로 여기의 “너희”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기분이 몹시 상할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종교인들, 여기서는 “사제들과 원로들”, 예수님과 토론하고 따지며 심지어 공격까지 일삼는 이들겉으로는 경건한 사람으로 보였지만 죄를 숨기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모든 이가 존경하고 부러워하는 지위를 누리면서 삶을 바꾸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의 엄한 말씀 앞에서 그들은 한편으로 회개의 초대를 받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서 회개라는 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그들의 위선, 완고함, 결코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서 다른 이들은 판단하고 감시하는 속성이 싹튼다. 더구나 그들은 대중이 옳고 모범적이라고까지 생각해 주고 있으므로 언제나 자기 합리화를 할 근거를 가진 이들이고 빠져나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었다.

『저는 제가 따라야 할 길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당신께 가까이 가기 위하여 제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 안의 삶에 대해서 멋있게 가르치고 말할 줄도 압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은 망설이고 저의 내면 깊숙한 자아는 여전히 저를 붙잡고 있으며, 뭔가를 흥정하고 싶어 하며, ‘예, 하지만….’하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헨리 나웬, ‘오직 한가지’ 중 미출간 수기 기도문에서)』

숨어 죄를 짓고 죄를 숨기는 이들은 다른 이의 꾸지람으로 회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이미 그럴듯하여 타인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마저 받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대부분 사람이 지닌 질병과도 같은 것이면서도 특히 종교적이거나 다른 이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이들 사이에 널리 자리 잡은 현상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반대로 공개적으로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른 이의 판단과 눈초리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오히려 내심 변화에 대한 강한 욕구를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욕구는 “주님께서는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주신다.”(시편 34,19) 하는 말씀처럼 “마음이 부서진 이들” 안에 있다.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시편 51,19) “마음이 부서진 이들”(시편 147,3)은 다른 말로 “생각을 바꾸는 것”, 뉘우치는 마음, 곧 ‘통회’의 시작이다. 뉘우치는 마음을 지닌 인간만이 하느님의 현존에 민감해질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32) 하신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요청했을 때 공적으로 죄인이라 취급받던 이들이 적극적으로 이에 응답하였고, 사제나 원로들처럼 기득권을 누리면서 모범적이라고 칭송을 받던 이들이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를 듣고 다른 사람들의 회개를 보면서도 침묵하고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과연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는가’ 하고 질문하신다. 우리 각자는 우리가 하는 신앙 고백의 크기를 외형적으로 인정받는다고 생각하는 그만큼, 더욱더, 말로만 그렇게 신앙을 고백하고 있지나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심판의 날”, “종말의 날”에는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께서 말씀하신 대로 『당연히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들은 밖에 있고, 밖에 있으려니 했던 이들은 안에 있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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