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8,21-35(연중 제24주일 ‘가’해)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마태 18,35)

일반적으로 마태오복음에는 예수님의 다섯 가지 긴 설교가 수록되어 있다고 말하는데(산상설교 5-7장, 제자들 파견에 따른 설교 10장, 비유들을 통한 설교 13장, 공동체에 관한 설교 18장, 종말에 관한 설교 24장), 우리는 지난 주에 이어 오늘 복음으로 네 번째 설교인 공동체와 교회에 관한 설교 중에 펼쳐지는 가르침을 듣는다.

1.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복음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로 시작한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어떤 상황을 가정하여 가르침을 청하는 상황이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지난주 복음에서 보았듯이 공동체의 형제‧자매들 간에 죄짓는 형제나 자매를 어떻게 깨우치고 타이르며 용서할 것인가 하는(참조. 마태 18,15-20) 가르침을 주셨었다. 그저 인내하고 사랑하며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간절히 함께 기도하며 그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잘 알아들었다는 듯이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하고 여쭌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과 베드로 스스로 전제하는 답을 이용하여 제자들에게 하늘 나라에서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대하시는가에 관한 비유를 말씀해 주신다. 이 비유의 말씀은 공동체와 교회 생활에 관한 결정적인 가르침이다. 이 말씀을 기쁘게 자주 읽어서 이 말씀을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우리의 한계를 자주 묵상해야만 한다.

2.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베드로는 나에게 잘못한 형제에게 “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라고 여쭌다. “일곱”은 완전한 숫자이고 부족함이 없는 전체를 가리키는 숫자이다. 꼭 일곱 번을 용서해야 하느냐고 용서의 횟수를 여쭙는다기보다 ‘어떤 이가 계속 같은 잘못으로 나를 괴롭히더라도 계속 용서해야만 합니까?’라는 물음이라 할 수 있다. 베드로는 분명 카인의 후손이었던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카인을 해친 자가 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면 라멕을 해친 자는 일흔일곱 갑절로 앙갚음을 받는다.”(창세 4,24) 하던 내용을 염두에 둔 듯이 질문을 하였을 것이다. 베드로가 말한 대로 거듭되는 잘못을 “일곱 번까지” 용서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대단히 힘든 일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하시며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고 엄중하게 말씀하신다. 그 어떤 가정이나 전제 조건이 없이, 횟수에 상관없이 용서해야 한다고 하신다.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해하기조차 힘든 말씀임이 틀림없다. 예수님께서 너무 과도하게 말씀하신 것은 아닐까?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그렇게 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비유를 들어 당신께서 의도하신 바를 명확히 설명해 주신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자체가 분명한 계시(revelation)이듯이 인간 앞에서 베일(veil)을 다시(re-) 걷어 올려 하느님과 하느님의 행동 방식을 설명해 주신다. 비유는 임금과 임금에게 빚진 종, 그리고 그 종에게 빚진 자를 상정하고 3단계로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예수님의 결론(35절)으로 맺어진다: ① 임금과 임금 앞에 끌려온 어떤 빚진 자의 대면(23-27절) ② 임금에게 빚진 자와 그 빚진 자에게 빚진 다른 동료의 대면(28-31절) ③ 임금과 임금에게 빚진 자의 재再대면(32-34절)

비유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 앞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마태 18,24)라고 시작한다. “만 탈렌트”는 당시 하루 품값이 1데나리온인 상황에서 ‘1억 데나리온’에 해당하므로 종의 신분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액수이다. “자신과 아내와 자식(들을 노예로 팔고) 그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도”(마태 18,25) 평생 깊을 길이 없는 거금이다. 당시 갈릴래아 전체의 세입이 이백 탈렌트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종은 임금 앞에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8,26) 감당할 수도 없는 것을 “참아 달라”며 애절하게 간청한다. 이에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마태 18,27) 임금인 주인은 “가엾은 마음”, 자비심, 측은지심으로 놓아주고 빚도 탕감해 준다. 자신이 곧 법이고 법의 집행자인 임금이지만 그 앞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한 인간을 만나 법대로만은 할 수가 없고 법보다는 자비로 다스려야 하는 상황에서 실제로 왕은 그렇게 한다. 임금은 자기 종이 겪는 참담함으로 오히려 자기 마음에 상처를 입고 아파했다고 하겠다.

비유의 장면이 바뀐다. 임금의 자비로 간신히 자기 아내와 자식들까지도 구하게 되어 날아갈 듯이 기뻤고 해방을 맛보며 죽음에서 살아났던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마태 18,28) 종이 다른 동료 종을 만난다. 그 친구는 고작 한 3개월만 일하면 갚을 수 있는 빚을 진 동료였다. 그렇게 친구를 만나자마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마태 18,28-29) 그 동료가 했던 말은 임금 앞에서 자신이 했던 말과 같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마태 18,30) 임금의 용서와 자비를 얻었던 이가 다른 형제요 동료를 용서하지 않고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좀스럽고 무자비하다. 현대사회는 이를 ‘갑질’이라 한다.

두 빚진 자의 처지가 세 번째 장면에서 달라진다. 이런 내용을 모두 보고 들어서 알고 있던 다른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다시)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1-33) 바로 이 부분에서 ‘용서’에 관한 기초, 곧 ‘용서받은 자’라는 대명제가 계시된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용서받은 자, 기대하지도 않았던 은혜를 입은 자임을 아는 사람이다. 하느님께로부터 엄청난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감히 자기에게 비교할 수도 없이 아주 조금의 잘못을 저질렀던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다.

3.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이런 이유로 이 비유는 용서의 횟수에 관한 비유라기보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큰 용서를 받은 존재인가, 따라서 같은 형제나 자매들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비유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계산하지 않고 용서할 수 없거나 횟수에 상관없이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은 존재인가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용서하시고, 그저 은총으로 품어 안아 주시는 분이시니, 우리가 입은 하느님의 용서를 확산하고 확장하는 공짜 은혜와 선, 베풂의 논리를 살아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비유의 결론으로 삼아 말씀하신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라는 구절을 이해하게 된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다섯 번째 청원,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마태 6,12)라는 구절과 내용상 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이다.

우리가 우리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는 길이 하늘에 계신 그분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유일한 길이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시고 나서도 마지막에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4-15)라고 하신다.

그러나 『내 의지만으로 용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마음이 함께 가지 않는다. 마음은 계속 쓰라림과 증오로 차 있게 된다. 온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용서를 알아야 하고, 그로부터 용서하는 능력을 배워야 한다. 나의 죄와 잘못을 포함하여 나 전체가 조건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가슴 깊이 체험한다면, 용서도 가슴에서 흘러나올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건너뛰어서는 안 된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용서에 동참하도록 감정이 변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은총을 기도해야 한다.(안셀름 그륀, ‘예수, 구원의 스승’, 127쪽)』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 편에서 우리를 용서하실 길이 없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자비를 행하지 않는다면 항상 우리를 용서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통째로 용서해주신 분께서 엄청난 빚을 탕감받았다가 다시 그분 앞에 끌려가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던”(마태 18,34) 그 종처럼 우리에게서 당신의 용서를 거두어가실 것이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고백하고 알아 모시는 우리의 하느님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교회는 용서받은 자가 다른 이를 용서하는 공동체이다. 그런 이유로 교회 공동체의 마음 한가운데에는 죄의 용서를 기념하고 기리는 성체성사가 있다. 교회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경험하면서 서로서로 그 용서와 자비를 이뤄가는 장이다.

성인은 한없는 용서의 은총을 입은 자들이 『‘왼 눈을 빼 가면 오른 눈의 사랑으로, 오른 눈을 빼 가면 가슴의 사랑으로’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용서할 일이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1567~1665년)』라고 한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님께 ‘전 단 한 번의 잘못으로 이렇게 영원한 벌 속에 있는데, 왜 그렇게 사람들을 그저 용서만 해 주시는 것입니까?’ 할 것이고, 이에 예수님께서는 ‘넌 단 한 번도 내게 용서를 청하지 않지 않는가?’ 하실 것이다.

이 부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요한 1,18)라고 요한 복음사가가 알려준 참하느님의 얼굴을 어떻게 식별할 수 있는가, 그리고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준 그 결정적이고도 마지막이었던 하느님의 얼굴을 우리가 어떻게 다른 이의 얼굴을 통해 볼 것인가 하는 점에 관하여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들었던 벌하시고 청을 들어주시지 않으며 용서하시지 않는 하느님의 얼굴을 굳이 감추거나 잊을 필요는 없다. 모세에게 전해진 주님의 이름은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탈출 34,6-7)와 같은 분이었고, 예언자 나훔에게 전해진 하느님은 “주님은 열정을 지니신 분, 보복하시는 하느님. 주님은 보복하시는 분, 진노하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당신의 적들에게 보복하시는 분 당신의 원수들에게 화를 터뜨리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분노에 더디시고 힘이 뛰어나신 분, 그러나 벌하지 않으신 채 내버려 두지는 않으신다.”(나훔 1,2-3) 하는 분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으로 최종적이고도 결정적인 하느님의 모습을 알려주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는,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하는 하느님은 자비의 하느님이시고, 그 자비는 하느님께서 스스로 자신과 통교하시는 방식이요 특성이며, 당신의 전능을 드러내시는 방식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받아들이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모든 종교가 역사를 통해서 정의를 이루시는 하느님, 악을 벌하시고 응징하시는 하느님을 강조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인간적인 정의’의 개념을 우리 안에 스스로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 투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8.10) 하고 간파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였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 우리가 아직 그분을 거슬러 죄인이었을 때에도 우리를 용서하신 하느님, 우리가 거부하고 모른다고 했을 때도 여전히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을 보여주시고 계시하여 주신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하고 간곡히 말씀하셨던 까닭이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19,19;22,39 레위 19,18) 하던 구약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새로움을 얻은 까닭이다. 많은 빚을 졌던 종의 주인인 임금이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듯이” 그리스도인이 그 어느 대가도 바라지 않고 조건 없이 그저 베푸는 용서와 사랑은 주 예수님께 드리는 순종이다. 그리스도인이 앞뒤를 계산하면서 용서한다면 그것은 말뿐인 용서, 말이 앞서는 용서로 자신의 용서를 평가절하하는 일일 뿐이다. 용서할 수 없는 것unforgivable을 용서하는 것forgive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용서의 유일한 기준이다.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첫째는 다른 이를 용서해야 한다고 믿으면서 그러하지 아니하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둘째는 다른 이를 용서해야 한다고 믿되 그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이미 용서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전자의 그룹이 압도적으로 많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교회의 쇄신 여부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동이 가능한가에 달려있다. 우리가 영원한 본향에 가 닿을 수 있기 위하여, 우리는 하느님 사랑이라는 날개 한쪽과 형제들 간의 용서라는 날개 한쪽, 두 날개로 난다. 아멘!

One thought on “마태 18,21-35(연중 제24주일 ‘가’해)

  1. 하느님께 허물 많은 삶을 용서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나, 남의 잘못에 너그러움을 베풀지 못한 나를 되돌아 보게 됩니다. 용서하는 것에 인색한 제 자신을 되돌아보며 반성해 봅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