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거로울/괴로워할 번煩

‘불 화火’에 ‘정’이라고도 발음하는 ‘머리 혈頁’이 합해져서 ‘번거로울/괴로워할 번煩’이라는 글자가 생겨난다. ‘불 화火’는 부수로 묘사될 때 ‘연화발 화灬’라는 모양새로서 장작더미 같은 것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 모양을 그린 것이다. 혹자가 머리와 눈, 다리가 함께 그려진 사람 모습이라 하기도 하는 ‘머리 혈頁’이라는 글자는 위로부터 머리카락, 마음의 창인 눈(눈 목目), 턱밑의 수염을 차례로 그려서 만들어진 글자로서 다른 글자와 합하여 머리나 얼굴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하는 글자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그렇다면 ‘번거로울/괴로워할 번煩’은 열받은 사람의 머리이다. 요샛말로는 머리에 쥐가 난다든가, 열받아 뚜껑이 열리는 상황이다. 여기에 ‘섞일 잡雜’이 붙으면 여기저기, 이것저것, 잡다한 것이 뒤섞이면서 ‘번잡煩雜’이 되고, ‘괴로워할 뇌惱’가 붙으면 ‘번뇌煩惱’가 되며, 마음 문이 닫혀 숨 막히고 속 태우는 ‘답답할 민悶’이 더해지면 머리에 열나고 가슴이 답답한 ‘번민煩悶’이 된다.(*이미지출처-위;네이버 한자 사전 / 아래;동아일보, 한자뿌리읽기, 278회)

이미 내심으로 짐작하고 왔었지만 귀국한 뒤로 해가 바뀌면서 생각과 주변, 내면이 번잡하다. 뉴욕이라고 했지만 한적한 곳, 숲과 호수가 있던 곳, 여러 동물이 편안하게 인간과 공존하던 공원 같은 곳에서 몇 년을 살다가 와서 더 그렇다. 좁은 나라에서 간격이 좁게 많은 이가 함께 부대껴서일까, 일도 많고 사건·사고도 많은 다이내믹 코리아여서일까?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어서 설령 만나더라도 얼굴마저 기억 못 할 동창이 카톡으로 어렵게 나를 찾아 이제는 지긋한 나이이니 동창회 구성원들과 인사라도 하며 살자고 공동 카톡방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는데, 애써 이를 말렸다. 내가 살아가는 현실과 세속이 달라서이겠지만, 예전의 비슷한 경험으로 보아 경조사 알림, 출처가 나름대로인 건강 정보나 좋다는 글 조각이나 이미지 퍼 나르기,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갑론을박, 추억팔이나 얄궂고 농담도 아닌 우스개, 자기 좋아하는 것을 서로에게 강요하는 정도의 일상사, 이를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거부할 수 없는 알림음, 가끔 반가운 얼굴을 보더라도 소주 몇 잔에 취해 은근한 경계심 너머로 너스레를 떨어대는 과정…이런 것들이 번잡스러워서였다.

번잡스러울 때가 꼭 아니어도 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만 살아서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전원주택의 삶을 동경하고 꽃밭과 채마菜麻 밭을 상상하며, 바닷가 오막살이의 한가함을 떠올리고, 동물들의 배설물 냄새 속에서도 옷을 짓고 들에서 먹거리를 거두는 소박함을 늘 그리워한다. 그렇지만, 억울함이나 분노, 인간 간의 갈등이나 좌절감이 찾아올 때, 그리고 큰 상처로 움츠러들 때, 그리움은 은둔隱遁이 되고 외로움이 되며 고립이 되고 도피가 된다. 도피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로부터 시작해서 패러디되고 변조되면서 널리 퍼져 또 다른 무리를 형성하려는 갈망 속에서 자신을 한 번 더 소외한다. 세상에 내가 그리 양질의 이바지를 하는 삶은 아닐 것이라는 좌괴감自愧感이 들 때, 내가 없어도 또 내가 무엇을 하든 하지 않든 세상은 그대로라는 생각이 엄습할 때, 가장 쉽게 보이는 해결책은 자신을 셧다운하고 닫아버리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꼭 나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식으로만 본다면, 사람은 한편에서 목가적인 동경과 해변으로의 탈출을 꿈꾸면서 서로를 건드리다가 움츠러들고 자신의 창窓들을 하나씩 닫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사회가 얼마나 엉망진창이고 끝장 드라마이며, 정치가 형편없는 대본만을 써 대고, 타인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가득하며, 그런데도 우리는 사회를 유지하며 발전시켜 가고 서로가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래도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서로에게서 좋은 것들을 많이 끌어내고 발견하며, 서로가 배려하고 서로를 더 낫게 만들어 가는지를 보려고 애쓰는 보통 사람들의 놀라운 성실함이다. 그런 놀라움은 서로에게 힘이 된다. 그럴 때면 냉소적이거나 비아냥 속에서만 인생을 살아가고 싶지는 않으며, 열린 마음과 서로에 대한 열망, 그리고 부드러운 시선을 잃지 않고 싶어진다.

실망 속에서도 새로운 아름다움과 경험, 그리고 우정을 받아들일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관점의 문제일 것이다. 유·무형의 비용이 많이 드는 차단과 철수보다는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체험과 순간은 누군가와 함께였을 때였음을 상기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안겨 줄 수 있지만,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 훨씬 더 큰 것임을 깨우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지지하는 힘을 주며 사랑을 느끼게 한다. 사랑스럽지 않은 이를 사랑하는 것, 원치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라도 내가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 진정으로 내가 기쁨을 나눌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서로에게 선사하는 선물은 같다. 그럴듯하든 그럴듯하지 않든 우리는 서로에게 좋다. 타인을 향해 이러한 열림이 없을 때 우리 각자는 우리가 안고 있는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One thought on “번거로울/괴로워할 번煩

  1. 실망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경험, 서로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킴, 타인을 향한 열림 안에서 온전한 잠재력 발휘와 함께 서로에게 선사하는 선물의 표현은 “천사”란 한 단어를 떠 오르게 한다. 알게, 알지 못하게, 순간 순간 천사들을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머물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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