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칠은聖靈七恩

* “성령”-동방교회 아이콘, 이미지 출처-ilblogdienzobianchi.it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령의 일곱 가지 선물은 지혜, 통찰, 의견, 용기, 지식, 공경과 하느님에 대한 경외이다. 다윗의 후손이신 그리스도는  이 성령의 선물들을 완전히 갖추셨다. 성령의 선물은 그것을 받는 사람들의 덕을 보충하고 완전하게 한다. 이 선물들은 열심인 신자들을 하느님의 감도에 기꺼이 순종하게 한다.(1831항)』라고 가르친다. 이들에 대한 기본적인 일반 해석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4/25~1274년)께서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 수록한 다음의 내용에 근거한다.

지혜wisdom는 하느님에 관한 거룩한 내용에 관한 인식과 판단력, 그리고 거룩한 진리에 따라 인간사를 헤아리고 판단하여 인도하는 능력이다.(I/I.1.6; I/II.69.3; II/II.8.6; II/II.45.1–5)

통찰(이해)understanding은 사물의 본질, 특히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필요한 더 높은 진리들, 직관적으로 꿰뚫어 하느님을 ‘보는’ 능력이다.(I/I.12.5; I/II.69.2; II/II.8.1–3)

의견(자문)counsel은 어떤 이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들로 하느님에 의해 인도되도록 한다.(II/II.52.1)

용기fortitude는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려는 확고한 마음, 특히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거나 위험할 때, 영생에 대한 확신 덕분에 모든 장애, 심지어 치명적인 장애라 하더라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확신이다.(I/II .61.3, II/II.123.2, II/II.139.1)

지식knowledge은 절대 방황하지 않고 믿음과 올바른 길에서 바른 행동으로 나아가도록 판단하는 능력이다.(II/II.9.3)

공경piety(신심)은 원칙적으로 자녀다운 애정으로 하느님을 섬기면서 할 바를 다하는 것이다.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녀들이므로 그들에게 해야 할 바를 다하고 성인聖人들을 존경하며 성경을 배반하지 않는 것이다. 영어 piety는 라틴어 pietas에서 오는데, 이는 나의 아버지와 조국에 대한 존경심을 뜻하는 말이다. 하느님은 모든 이의 아버지이시므로 하느님 공경 역시 piety라고 부른다.(I/II.68.4; II/II.121.1)

하느님에 대한 경외fear of God는 여기서 ‘자녀다운filial(효성스러운)’, 혹은 건전한 두려움으로서 하느님을 공경하면서 행여 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떨어져 나갈까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처벌받을까를 두려워하는 두려움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I/II.67.4; II/II.19.9)

성령의 놀라운 이 은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지니고 계시면서도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당신 몸의 지체인 교회의 구성원들과도 나누고자 하시는 특별한 은총들이다. 이러한 은총은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받을 때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부여되고, 7가지 덕의 실천으로 연마되며, 견진성사의 은총으로 봉인된다. 일곱 가지의 이 은사는 그리스도인을 성화하시는 성령의 은총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삶 안에서 성령의 속삭임을 순순히 따라 거룩함 안에 자라게 하시며 하느님의 나라에 적합한 이들이 되도록 도우시는 은총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에 따르면 이 은사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완전perfection’을 향하여 인간이 나아가도록 하신 과정에서 초자연적인 도우심으로 마련해주신 ‘습관habits’이며 ‘본능instincts’이자 ‘성향dispositions’이다. 이 은사들은 인간의 이성과 본성이 지닌 한계를 넘어 그리스도께서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라며 약속하신 대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은사들이 인간 스스로 성취할 수 없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은사는 지혜(현명·슬기로움), 정의(의로움), 용기, 절제와 같은 4추덕四樞德이나 윤리적인 덕이라 불리는 덕, 그리고 믿음, 희망, 사랑과 같은 세 가지 신학적인 덕을 ‘완전’하게 하는 데 이바지한다. 사랑이라는 덕은 세례를 받은 후에 영혼에 내재하게 되는 일곱 가지 은사가 지닌 잠재적인 능력을 풀어 여는 열쇠가 된다.

『은총은 본성 위에 세워지므로(신학대전 I/I.2.3)』 일곱 가지 은사는 앞서 언급한 일곱 가지의 덕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 그리고 진복팔단과 함께 어우러져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성령의 일곱 은사는 덕의 실천이나 실행으로 드러나고 여기에 은사의 효력이 되먹임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완성되어 간다. 은사가 적절하게 발휘되면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와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빚어진다. 이처럼  은사그리고 열매가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내는 공동 지향점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산 위에서 설파하신 진복팔단(참조. 마태 5,3-10)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일곱 가지 은사는 역사적으로 가톨릭교회의 교의 중 소홀히 다루어진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그저 이 일곱 은사의 이름만을 기계적으로 외우거나 성령 강림 대축일에 은사 나눔을 하는 이벤트의 쪽지 정도로만 기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견진성사로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가 임하시어 보다 더 완성된 성숙이 된다는 사실은 잊고 사는 것이 대부분이다. 견진성사를 받는 날은 세례 후에 그저 지나가고 마는 또 다른 이벤트가 아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교회는 견진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은사를 입어 진정으로 완벽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장武裝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고, 하늘의 은사로 거기에 걸맞은 덕을 두루 갖추어 뽐내도록 매일 분기충천憤氣沖天한 군사답게 연마해 나가기를 선포하는 날이라고 가르쳤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배웠다.

문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의 교리 교육은 견진성사를 앞둔 젊은 신자들에게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가 무엇인지 이를 생생하게 가르치는 데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사실과 함께 적어도 이전의 교육 방식이 하느님을 모르는 무신론자들 앞에서 신자들이 용감하게 순교를 각오할 정도로 용감무쌍한 태도를 간직하도록 교육했다는 사실만큼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이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호전적好戰的(?)인 교육은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관련 위원회의 여러 조사와 보고에 따라 그러한 교리 교육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견진성사까지도 받은 이들이 냉담자가 되며 신앙을 잃어가는 이러한 현실 앞에서 과연 지난 수십 년간의 교리 교육 방식이 제대로 된 것이었는가를 심각하게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그러한 교육 방식이 이상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식의 일방적이고 피상적인 처방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지는 않았을까를 자문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미주리주 성 루이즈에 있는 아퀴나스 신학 연구소 소장인 챨스 E. 부차드Charles E. Bouchard라는 도미니코회 신부는 <윤리 신학에서 성령의 일곱 가지 은사의 복구에 관하여Recovering the Gifts of the Holy Spirit in Moral Theology>라는 2002년 9월의 논문에서 성령의 일곱 은사에 관한 전통적인 가톨릭 교리 교육이 지녔던 특별한 약점들을 지적한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께서는 성령칠은과 사추덕 및 신학적인 덕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강조하였는데, 이를 간과한 측면이 있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께서는 성령칠은의 실제적이며 현실적인 윤리 신학의 영역을 지적했는데, 공교롭게도 성령칠은을 금욕적이거나 내밀한 신비적인 영성의 영역으로만 격하시킨 측면이 있다.

– 성령칠은에 관한 신학적 연구가 사제들이나 수도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인 것처럼 영적인 일종의 엘리트주의적인 시각에서만 다루어진 측면이 있다. 성령칠은은 배움과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조차도 해당하는 소중한 영성 자산이요 말 그대로 은사이다.

– 성령칠은에 관한 신학의 성경 배경이 되는 근거를 무시한 경향이 있다. 특별히 성령칠은의 원초적인 기원이면서 예언적으로 그리스도께 연결되는 이사야서 11장과도 같은 경우이다.

비근한 예로 1992년에 발행된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부분적으로나마 그리스도인의 기본 덕목 및 윤리 생활과 성령칠은 사이의 상관관계를 언급하고는 있으나 성령칠은의 개별 은사를 정의하거나 세부적으로 다루는 것을 놓친다. 성령칠은에 관해서는 단지 6개항(1285-1287, 1830-1831, 1845)에서만 언급하는 데에 그치면서,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인의 덕목에 관해서는 무려 40개 항(1803-1829, 1832-1844)을 언급한다. 아마도 이 부분이 오늘날 각종 교리교육 교재들이 성령칠은을 이해하는 부분에서 다소 혼란스러운 배치를 보이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아마도 이 때문에 많은 교재가 성령칠은에 관하여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통적인 내용을 부정확하게 부분적으로만 소개한다거나 개인적인 경험이나 상상으로만 소개하고 만다.

성령칠은, 영적인 무기고

그저 어렵게만 느껴지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원전原典의 무조건적인 복원이나 현대 문화적 배경 안에서만 이해하려는 측면에서 벗어나 일종의 제3의 길이라 할 수 있는 원천인 성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성령칠은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잘 알다시피 성령칠은에 관해 개별 은사들의 특성을 다루는 것으로 우리가 이해해온 성경의 대목은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① 지혜wisdom와 ② 슬기understanding의 영 ③ 경륜counsel과 ④ 용맹strength의 영 ⑤ 지식knowledge의 영과 (⑥ 공경의 영,) 주님을 ⑦ 경외함fear of the LORD(의 영)이다.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이사 11,1-3ㄱ)라는 ‘메시아와 평화의 왕국’에 관한 예언을 담은 부분이다.

* 한편, ‘성령칠은’이라 하는데,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경의 본문에서는 분명 6가지의 은사만이 보인다. 여기에서 ‘공경’은 왜 빠진 것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대중 라틴어 번역인 불가타 성경의 원문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번역본이 『et requiescet super eum spiritus Domini spiritus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① sapientiae et ② intellectus spiritus지혜와 슬기의 영 ③ consilii et ④ fortitudinis spiritus경륜과 용맹의 영 ⑤ scientiae et ⑥ pietatis지식과 공경의 영 et replebit eum spiritus ⑦ timoris Domini주님을 경외함의 영이다. non secundum visionem oculorum iudicabit neque secundum auditum aurium arguet.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라면서 여섯 번째 ‘공경의 영’을 삽입하고 있음에 따른 것일 것이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공경’과 ‘주님을 경외함’을 나누지 않고 한 마디로 번역하고 있기도 하지만, 교회의 전통은 로마 12,3-8 1코린 12-14장 에페 4,7-13 1베드 4,10-11 등을 두루 종합하여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사를 일곱 가지로 이해해왔다.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의 역사 안에서 성령칠은에 관해 언급하는 사람은 위의 이사야서 대목을 가르침의 근원으로 삼았지만, 그 누구도 이 일곱 가지 개념이 이사야서와 같은 예언서적인 배경과 함께 구약의 욥기, 잠언, 집회서, 아가서, 시편, 코헬렛, 지혜서 등과 같은 고대 이스라엘 ‘지혜문학적인 전통 안에서 통합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예언서의 대목이면서도 지혜문학의 배경도 고려하여 함께 이해했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이사야서 11,1-3은 역사적, 예언적, 신비적, 은유적인 주제로 다가올 메시아 왕국을 노래하는 대목이면서 동시에 경제, 사랑과 결혼, 자녀 양육, 대인관계, 권력의 사용과 남용처럼 일상생활 안에서 요구되는 윤리적 요구를 담은 내용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면을 통합하여 강조한다고 해서 계시의 내용이 상반되고 이율배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서로 보충 보완하면서 야훼 하느님과 이스라엘 민족 간의 계약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그 계약이 실생활 안에서 세세하게 어떻게 실천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앞서 인용한 이사야서 11장의 첫 대목은 왕국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는데, 이에 이어지는 대목에서는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 11,3ㄴ-4.9)라면서 그 일곱 특성을 지닌 이사이의 햇순이 이룰 세상이 금욕적이며 신비적인 체험의 영역이 아니라 실제적이며 현실적인 일상의 영역임을 여실히 밝혀준다.

메시아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서는 인간의 사고, 계획, 작업, 투쟁, 용기, 인내, 항구함, 겸손-손을 더럽히는 일까지도-과 같은 내용이 모두 망라되어야만 하고 필요하다. 이렇게 본다면 성령칠은께서 성숙한, 혹은 성숙해가는 그리스도인의 삶 안에서 이루어내시는 역할을 가늠해볼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교 안에는 일정 부분 다가올 내세만을 그리워하면서 현세를 배제하고 이 세상에서 이탈해야만 영생이 보장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성경의 강조점이 현실 세계를 초월하는 것만이 아니라 창조 질서 안에서 구체적으로 이 현실 세계를 변화 및 변형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했다.(참조. 계시헌장 17, 교의헌장 5 사목헌장 39)

성령칠은은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투쟁에 없어서는 안 될 자산이며, 어떤 의미에서 영적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할 때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전쟁에 임하면서도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사람이라면 막상 전쟁이 코앞에 닥쳤을 때 자신이 무방비 상태라는 것에 대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나의 친구들이나 나 자신이 성령의 특별한 은총의 힘을 얻지도 못했고 느껴보지도 못했다면, 틀림없이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성령칠은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례 때부터-설령 유아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부여받은 은사로서 그리스도인이 지니게 된 고유의 유산이며 성사의 은총과 함께 삶 안에서 체험하고 발전시켜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은사이다. 이러한 은사들은 저절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덕스러운 삶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열매를 맺는다. 영적 전쟁은 영원한 싸움이므로 그러한 열매가 한번 맺혔다고 해서 은사가 거두어지는 것도 아니다.

성령칠은은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을 변화 내지 변형시킬 목적으로 사용하라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총이다. 이사야서 11장은 1-2절에서 7가지의 은사를 거론한 뒤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이러한 은사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한마디로 각자가 처한 시간과 장소라는 현실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각자에게 허락하신 부르심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영적 투쟁에 나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매우 죄스러운 존재이며 하염없이 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주어진 부르심과 사명을 받아들여 원수들의 책략에 맞서기 위해 온갖 지혜를 다하고, 앞뒤를 살펴 슬기롭고도 신중하게 처신하며, 필요하다면 전략을 자유자재로 바꾸어 가면서까지 나 자신을 경륜으로 다스리며, 악의 세력에 맞서 힘찬 용맹의 기개를 잃지 않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필요한 지식이라면 그 무엇도 놓치지 않고(특별히 성경의 지식을 바탕으로), 이 모든 것이 주님을 공경하고 그분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신하여 흐뭇해한다. 이러한 영적인 전쟁에서 경험과 열매가 쌓여가면 쌓여갈수록 그리스도인은 더욱 노련한 장수將帥나 전사戰士가 되어 이 타락한 세상에 하느님의 다스림이 펼쳐지게 하도록 노력하면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큰 계획을 점점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더욱 자신감이 붙으며, 능숙하고 성공적인 사명을 수행해가게 된다.

그리스도의 군사

이 개념은 세례를 받고 견진성사를 받았음에도 아직 영유아기 신자로 남아 있거나 성인成人 신자가 되지 못하고 있으며, 적어도 성령칠은과 관련한 교리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한 내용이다. 사실 교회 안에서 견진성사를 받을 수 있는 적정 연령에 관한 논란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앞서 언급한 성령칠은에 관한 교리 교육의 문제성과 같은 내용이 여전히 신자들의 성숙에 저해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덕과 성령칠은 사이의 통합효과를 간과하거나 이에 관한 관심의 부족이 성령칠은의 이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중요한 요인이다. 물론 성령칠은에 관해 성경의 가르침에 입각한 확실하고도 조직적인 교리 지식을 배제하고 그저 막연하게 성령칠은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극히 제한적인 일부분인양 제시하는 것 현실도 젊은 세대에게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피상적인 기도, 판에 박힌 교리 교육이나 잘 준비되지 않은 정체불명의 유사類似 묵상 지도와 같은 기존의 방식은 죽음의 문화가 팽배한 현대 사회 안에서 경쟁력을 지니지 못한다.

성령의 일곱 은사라는 영적 무기고를 가능한 한 서둘러 성숙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성령칠은이 오랜 기간 교회의 대부분 역사 안에서 교회에 훌륭한 안내자이셨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가능한 일이다. 세례 받은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불렀으나 그렇게 부르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진 표현이라면서 고상하지 못한 논리로 버렸거나 방치했던 그 호칭을 회복해야 하고 그에 관한 교리 교육을 복구하는 것이 시급한 시점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시대가 상호 배타성이나 공격성, 투쟁성을 지양해야 한다는 논조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엄연히 이를 강조하고 있으며, 그동안 우리의 경험으로 보아서 그런 식의 논조로 우리가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한 예로서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조용한 비폭력 전투가 없었다면 소련의 붕괴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성령칠은은 실로 우리 일상에서 우리가 치열하게 치르고 있는 영적 전쟁의 무기고이다.

“아폴로가 코린토에 있는 동안, 바오로는 여러 내륙 지방을 거쳐 에페소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제자 몇 사람을 만나, ‘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묻자, 그들이 ‘받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오로가 다시 ‘그러면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요한의 세례입니다.’ 바오로가 말하였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분 곧 예수님을 믿으라고 백성에게 일렀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사도 19,1-6)

이처럼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자신이 받은 세례가 “성령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한” “요한의 세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책임은 세례 받아 성령칠은의 은사를 입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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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생명수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 이것은 마음이 준비되어 있는 이에게만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새로운 종류의 생명수입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성령의 은총을 물이라고 합니까? 이는 모든 것이 물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물은 풀을 자라게 하고 생명체를 만들어 줍니다. 물은 비로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물은 언제나 같은 형태로 내려오지만, 그 효과는 다양합니다. 그것은 팔마 나무에 미치는 효과가 다르고 포도나무에 미치는 효과가 달라도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됩니다. 물 그 자체는 항상 같은 것이고 변함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는 아무 변함이 없이 내립니다. 그러나 물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물의 성질에 적응하여 각각 적합한 것으로 됩니다.

성령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이시고 한 본성이시며 나뉨이 없으시지만, 각자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은총을 나누어 주십니다. 마른 나무가 물을 받으면 새싹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에 빠진 영혼도 회개함으로써 성령의 은총을 받으면 정의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은 비록 본성상 하나이지만 하느님의 뜻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양한 효과를 일으킵니다.

성령께서는 지혜를 주시기 위해 사람의 입을 사용하시고 예언의 은혜로 다른 이의 이해력을 비추어 주시며 또 다른 이에게는 악마를 쫓는 권능을 또 다른 이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분은 어떤 이에게 절제심을 강하게 해 주시고, 다른 이에게는 자비심을, 또 다른 이에게는 단식하고 고행하는 것을, 또 다른 이에게는 육신의 것들을 멸시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또 다른 이에게는 순교의 용기를 주십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그것들을 따로따로 나누어 주십니다.”(1코린 12,4-7.11)라는 말씀대로 그분 자신은 변화되지 않으시지만 여러 사람 안에서 각각 다르게 활동하십니다.…(Cat. 16, De Spiritu Sancto 1,11-12. 16: PG 33,931-935. 939-942-부활 제7주간 월요일 성무일도 독서 기도 제2독서에서)

https://www.catholic.com/magazine/print-edition/the-seven-gifts-of-the-holy-spirit의 내용을 번역하였으며, 종반부는 번역자의 의도에 따라 더 추가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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