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 오류 및 모순과 광기

이성적 사고에 따라 어떤 내용을 이치에 맞게 이끌어가는 과정이나 원리를 ‘논리’라고 한다. 그러한 논리에 반대되는 말은 오류나 모순이다. 그 오류나 모순을 혼자 즐기면 독선獨善이거나 제멋에 겨운 혼자만의 춤이며, 이를 주변과 사회에 강요할 때는 광기狂氣이며 미친 짓이다.

아리스토텔레스(Ἀριστοτέλης, BC 384~322년)의 제1원리는 “자체로 모든 사물의 근원”이요 “참된 보편”으로서 이는 어떤 것으로부터 합리적으로 도출되거나 도달할 수는 있지만, 무엇인가에로 자기 합리화를 향하여 나아갈 수는 없다.(can be rationalized from but not rationalized to) 제1원리는 합리적인 논리 전개를 위해 미리 전제되어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모든 논리는 기초나 근거가 없는 구름 위의 집이거나 모래 위의 누각에 불과하다.

체스터톤(G.K. Chesterton, 1874~1936년)은 ‘광인狂人과의 논쟁’에서 「미치광이와 논쟁을 벌이면 최악의 상황을 맞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왜냐하면 미치광이의 정신이 올바른 판단을 하느라고 이렇게 저렇게 머뭇거릴 여유가 없이 잽싸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미치광이는 유머 감각이나 명료성, 경험이라는 멍청한 확신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는 분명하고도 건전한 사랑을 상실하는 데에 훨씬 더 논리적이다. 사실 광기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은 이런 면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 미친 녀석은 자기 이성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그의 이성 말고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다.(If you argue with a madman, it is extremely probable that you will get the worst of it; for in many ways his mind moves all the quicker for not being delayed by things that go with good judgment. He is not hampered by a sense of humour or by clarity, or by the dumb certainties of experience. He is the more logical for losing certain sane affections. Indeed, the common phrase for insanity is in this respect a misleading one. The madman is not the man who has lost his reason. The madman is the man who has lost everything except his reason.) – (G.K. Chesterton, Orthodoxy, New York: John Lane Co., 1909, 32쪽)」

미치광이는 상식을 축소하면서 자기만의 이성을 확장하여 거기에 매몰된다. “이성이 실패할 때 악마가 돕는다.(When reason fails, the devil helps.)”라는 말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식으로 말한다면 인간의 이성적이며 참다운 합리적 사고는 인간 사회의 바른 전통, 교의, 하느님의 계시, 심지어 상식들이라는 제1원리에 반드시 기반하여 합당한 목표를 설정해야만 하고, 자기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사실이나 진리를 향해야만 한다. 궁극에서 인간은 진리이신 하느님을 향해야만 한다. 근거와 기반이 없으며 목표와 목적이 없는 논리 아닌 논리의 미치광이는 자신을 이성의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로 설정한다. 그의 이성은 자신의 가정假定(거짓 가假)과 전제를 바탕으로 구축되어 자신의 만족을 지향한다. 사실상 그는 자신을 하느님과 감히 대체하며, 이것이야말로  정확히 악마의 목표이다.

귀도 다 몬테펠트로

단테 알리기에리(Durante degli Alighieri, 1265~1321년)의 <신곡神曲>은 1308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1321년 작가가 죽기 전에 완성한 작품이다. 단테 자신과 베르길리우스가 지옥에 내려가 편력遍歷한다. 두 시인이 길을 떠나려 할 때 불에 휩싸인 다른 영혼이 다가와 길을 막는다. 이 영혼은 두 시인을 금방 지옥에 떨어진 망령으로 알았다. 두 시인이 롬바르디아 방언(베르길리우스의 고향)을 말하는 것을 엿들으며 자신의 고향 로마냐(이탈리아 동북부)의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묻는다. 단테는 로마냐 지방에 폭력과 독재가 난무하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답한다. 단테가 그 망령에게 누구냐고 묻자, 그 망령은 “나는 무사일러니 그 뒤 수도자가 되어 허리 묶인 몸으로 속죄하기를 바랐었고…나를 옛 죄악으로 뒷걸음치게 한 자에게 화 있을진저” 하면서 자신의 이름과 사연을 밝힌다. 귀도 다 몬테펠트로Guido da Montefeltro(1223~1298년)이다.

귀도는 “내 행실이란 사자보다 여우의 짓이었더니라. 갖은 꾀와 술수를 모르는 것이 없어 나는 어찌나 그 재주를 잘 부렸던지 땅끝까지 소문이 퍼졌더니만…” 하면서 자기의 내력을 밝힌다. 군사 전문가였으며 모략가였던 그는 종교적 회심을 하여 나이 70이 넘어 프란시스코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런데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찾아와 자기의 선출에 반대했다가 팔레스트리나 지방의 요새(로마에서 20리 정도 거리)로 빠져나갔던 족속을 정복할 계책을 요청한다. 귀도는 단테에게 교황의 “무게 있는 논리가 나를 움직여 이 마당에 침묵은 가장 나쁜 것이다 싶기에” 협조했다고 변명하면서 그 죄로 자신은 지옥에 떨어져 지금처럼 고통을 받고 있다고 설명한다.

Joseph Anton Koch, Guido Da Montefeltre, 1803년

귀도가 죽었을 때, 성 프란시스코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지옥에 왔었지만, 지옥의 문지기 중 한 놈이 “못 데려간다, 성가시게 하지 말라. 저놈은 능청스러운 꾀를 이바지한 탓으로 내 졸개들 속으로 빠져들어 가야 한다. 이미 나는 저놈의 머리채를 틀어쥐었노라. 무릇 뉘우치지 않는 자는 죄를 벗지 못하고, 뉘우침과 제멋대로는 서로 어긋나는 모순이기에 함께 있을 수 없느니라.(죄를 뉘우치는 마음과 죄를 범하려는 의지는 서로 어울릴 수 없다)” 하면서 자신을 놔주지 않았다고 한다. 귀도는 “오호, 가엾은 이 몸이여! 그놈이 나를 붙들고 ‘넌 내가 논리가임을 정녕코 짐작 못 했지?’ 하였을 때 나는 얼마나 떨었던고!” 하며 단테에게 토로하면서, 그다음에 지옥의 재판관 미노스 앞으로 끌려갔는데, 미노스가 “등에다 꼬리를 여덟 번 휘감고 나서(지옥의 제8환에 던지는 신호) 미쳐 날뛰고 그것을 깨물며 말하더라. ‘요건 도적불(火-도적불은 죄인들을 덮어 감추는 불)의 죄수 종낙이군.’ 그리하여 너 보다시피 여기에 빠진 바 되어 이런 옷(불의 옷)을 입고 비탄 속에 지내노라.”라고 단테에게 말한다. 이렇게 몬테펠트로를 만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지옥의 “이간질 때문에 짐을 지게 된 자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길을 떠난다.(*따옴표 안의 내용은 최민순 신부 역, 신곡神曲, 지옥편-27곡, 을유문화사, 1987년, 205-212쪽에서 따왔으며 원만한 이해를 위해 신부님의 각주를 괄호 안에 삽입하였음)

오스트리아의 화가 요셉 안톤 코흐Joseph Anton Koch(1768~1839년)가 이 장면을 그린다. 그림에서 날개와 꼬리가 달린 악마가 한 손은 귀도의 허리띠를 움켜쥐고 다른 손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향해 흔들어댄다. “사자보다 여우”였으며 “갖은 꾀와 술수를 모르는 것이 없어 어찌나 그 재주를 잘 부렸던지 땅끝까지 소문이 퍼졌다”고 스스로 밝히는 귀도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악마는 그러한 귀도를 붙들고 “넌 내가 논리가임을 정녕코 짐작 못 했지?” 하며 귀도의 등에 꼬리를 여덟 번이나 감아 그를 같은 죄를 지은 자들이 있는 곳으로 던져 영원한 고통에 빠져들게 한다. 지옥에 도착한 뒤에야 귀도는 악마가 자신보다 훨씬 교활한 “논리가”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무릇 뉘우치지 않는 자는 죄를 벗지 못하고, 뉘우침과 제 멋대로와는 서로 어긋나는 모순이기에 함께 있을 수 없느니라.”라는 악마의 말 그대로 귀도는 나이 먹어 회심하고 수도자까지 되었으나 “뉘우침”이 없었다. 그래서 지옥에 떨어진다. 자신의 죄를 아파하는 진정한 통회의 뉘우침이 없다는 것은 수도자의 옷을 입더라도 모든 것이 자기의 행실을 둘러싼 자기변명이요 자기 합리화이며, 자기모순이고 오류이며, 결국 악마의 간계에 넘어간 “제멋대로”의 광기일 뿐이다.

라스콜니코프

광기를 다룬, 논리 아닌 논리의 분명한 또 다른 예 중 하나는 아마도 도스토옙스키(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Достое́вский, 1821~1881년)의 1866년 작품인 <죄와 벌>에 나오는 주인공 라스콜니코프일 것이다. 그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빈민가의 가난한 법대생으로서 늙은 전당포 주인을 도끼로 살해한다. 이후 그는 자기 행위의 정당성과 이유, 그리고 자기 합리화의 논리를 펼쳐나간다. 현대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분열증 환자의 망상’ 정도일 것이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더럽고 가난하며 어두운 세계는 본질에서 냉정한 이성적 사고를 갈망하다가 광기에 빠진 주인공의 정신세계요 마음이다.

라스콜니코프는 범행을 계획하면서 학생들을 갈취하고 노처녀 여동생 리자베타를 학대하기까지 하는 전당포 노파 알료나가 불쌍하다며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면서 ‘기계의 톱니바퀴(cogs of a machine)’와 같은 외부의 힘에 자신이 끌려가는 것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러다가 자신이 의도한 대로 되지 않아 반쯤 정신이 나가 즉흥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는 논리의 모순에 빠져 “이성이 실패할 때 악마가 돕는구나!(When reason fails, the devil helps!)” 하고 생각한다. 사람의 합리화라는 것이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금 빠르거나 늦거나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람은 금세 비이성적인 힘에 휘말리고 만다. 라스콜니코프의 경우에 이러한 힘은 용기도 아니었고 희생도 아니었다. 단지 질투와 교만이었을 뿐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전당포의 노파뿐이 아니라 무고한 그녀의 동생까지 살해한다. 그는 귀중품을 훔치는 데 성공하지만,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공터의 돌 밑에 전리품을 묻는다. 그리고 수사관의 추적을 받으면서 자기 증오와 자기 정당화(self-hatred & self-justification)의 소용돌이에서 싸운다. 자살도 고민하지만, 자살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는 자신이 지닌 높은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도덕적 제약을 버려야만 했다고 믿으면서 소위 역사적 위인으로 남았었던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대왕과 자신을 비교도 한다. 그는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하려고 계속 노력하지만, 점점 더 비이성적으로 변해간다. 결국 그는 자수하여 시베리아의 수용소로 이송된다. 그곳에 도착해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우친다. 그리고 그는 감옥에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

소설의 끝 무렵에 라스콜니코프는 유럽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전염병에 걸린다는 꿈 하나를 꾼다. 그 대목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이 환자들만큼 자신들이 지성적이면서 진리를 완전하게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다시 없었다. 자신들의 결정이나 과학적 귀결, 도덕적 신념을 두고 그처럼 무오류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없었다.……모두 흥분했으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각자 자신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다른 이들을 보면서는 비참해하며 가슴을 치고 울며 손으로 쥐어뜯었다. 그들은 판단하는 법을 몰랐고, 무엇이 악이며 무엇이 선인지 동의할 수 없었으며,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를 정당화할지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일종의 무의미한 증오심으로 서로를 죽였다.」

이는 사랑과 동떨어진 이성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경고이다. 놀랍게도 우리는 도스토옙스키의 통찰이 1917년 공산주의자들이 러시아를 점령하고 소련이 피비린내 나는 통치를 시작했을 때의 자기 동족을 향한 예언이자 섬뜩한 경고였었다는 사실을 뒤늦은 역사적 교훈으로 알고 있다.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순수 이성(pure reason)”이라는 유토피아의 추상적 개념에 제물로 학살을 당해야만 했다. 그때 진짜 논리는 패했다. 악마가 도왔다. 그리고 악마가 통치했다.

***

인간이 반드시 비이성적 논리, 오류, 모순, 그리고 광기라는 함정에 빠지기로 결정된 것은 아니다. 은총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우리의 이성을 더 나은 것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강도를 만나 반쯤 초주검이 되었던 사람을 피해 길 반대쪽으로 가며 자기 스스로를 합리화하던 사제나 레위인처럼 반드시 그렇게 될 필요는 없다.(참조. 루카 10,29-37) 통회를 모르고 회개하기 전의 모습이었던 귀도 다 몬테펠트로나 라스콜니코프일 필요도 없다.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아픔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보고 사랑에 이끌려 다가가 “가엾은 마음이 들어” 스스로 누군가의 이웃이 될 수는 있다. 악마가 논리적이고 교활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악마보다 더 똑똑하고 스마트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악마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일 수는 있다.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

(*이 글은 L.W. Blakely의 글 ‘악마는 논리가論理家(The Devil Is a Logician)’라는 글을 바탕으로 썼음을 밝힙니다. 참고한 글 출처-https://www.wordonfire.org/articles/the-devil-is-a-logic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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