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애론(4)

7

사랑에 대한 일반적 서술

의지는 선과의 관계에 있어서 대단히 큰 친화력親和力을 가지고 있어서 의지가 선을 깨닫거나 파악하자마자, 즉시 선에로 기울어져 거기서 즐거움을 누기면서 마치 의지에게 가장 잘 맞는 대상인듯 선에서 머문다. 의지는 이 선과 밀접히 일치됨으로써 의지의 본질은 의지가 선과 맺어지는 관계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설명될 수 없게 되며, 이것은 또한 그 선이 의지와 더불어 유지하고 있는 친화력적親和力的인 인척 관계에 의하지 않고는 도저히 선의 본질이 설명될 수 없음과 똑같다. 테오티모여,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즉, 각자가 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의지란 또 무엇이냐? 선을 이끌어 오며 선으로 향하게 하는 기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혹은 의지가 이러저러하다고 평가하는 곳으로 향하게 하는 능력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결국 의지는 지능의 중개를 통하여 선을 깨닫게 되고 느끼게 되며, 이 지능은 의지에게 선을 제공해주며, 그 상호관계에 따라 즉시 즐거움과 희열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선으로 의지를 움직여서 부드럽고 세차게, 사랑겨운 대상을 향하게 하여 그것과 일치시킨다. 이러한 일치에 이르게 하도록 의지는 선에 가장 고유한 온갖 방법을 찾아보게 만든다.

그러므로 의지는 선과 더불어 가장 밀접한 적합성을 가짐으로써, 기쁨의 만족감을 발산하는데 이것은 의지가 선을 파악하고 느끼고 실감하는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희열과 만족은 의지를 선으로 향하게 하며, 이 운동은 일치를 지향한다. 그리고 일치를 향하며 움직이는 의지는 이를 달성하려는 온갖 수단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사랑은 그런 모든 것을 다 내포하고 있다. 사랑은 마치 한 아름다운 나무와 같다. 이 나무의 뿌리는 선을 향한 의지의 적합성이며, 그 밑뿌리는 희열이고, 그 줄기는 충동이며, 이를 위한 모색과 추구와 다른 노력들은 가지와 같으며, 일치와 향락은 그 열매나 다름없다. 이처럼 사랑이란 이 다섯 가지 근본적인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부분 밑에서는 다른 수많은 작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것들을 이제 앞으로 하나하나 보게 될 것이다.

그럼, 이제 쇳조각과 지남철 사이에 있는 비감각적인 사랑의 작용에 대해서 잠깐 고찰해보기로 하자. 왜냐하면 이것은 감각적이며 의지적인 사랑의 참된 모상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좀 말할 필요도 없지는 않다. 쇠는 지남철과 더불어 한가지 친화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쇠가 자력을 포착하게 되면 즉시 자석, 즉 지남철로 기울어져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갑자기 쇠는 전율하여 움직임으로써 즐거운 만족을 드러낸다. 그리고 쇠는 자석으로 옮겨가서 자석과 일치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찾아 부착하려 한다. 그러니 비록 무생물일망정 여기서 뜨거운 사랑의 온갖 과정을 얼마나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가?

그렇지만, 테오티모여, 엄밀히 말하면 희열과 사랑의 대상에 대한 의지의 충동 혹은 주입注入이라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즉, 희열이란 사랑의 시초에 불과하며, 또 이에 따르는 마음의 움직임이나 유입流入은 참으로 본질적인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둘 다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겠으나 사랑에는 또한 여러 가지 명칭을 붙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새벽은 낮의 시작이라, 동틀 때도 낮이라고 할 수 있듯, 이 첫 희열도 사랑하는 대상 속에서 처음 느끼게 되는 것이니, 역시 사랑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낮의 중심적 한계는 여명이 지난 후부터 해질 때까지이듯이, 사랑의 참된 본질은 마음의 움직임과 주입에 있는 것으로서, 이 마음이란 것은 즉각적으로 희열을 느끼며 일치에서 결실을 보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 희열이란 선이 의지에 일으키는 첫 움직임 또는 정서이며, 이러한 정서情緖는 감동과 주입에 의해 생기게 되고, 이런 감동과 주입에 의해서 영혼은 그 사랑하는 것으로 접근하게 되니 이러한 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본래의 의미인 사랑이라 하겠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를 표현할 수 있겠다. 즉, “선은 희열로써 마음을 사로잡아 묶지만, 사랑으로써 잡아당기고 이끌어 제게로 데려온다. 희열로써 선은 마음을 출발시키지만, 사랑으로서는 이미 출발한 길을 걷고 여행을 마치게 하는 것이라.”라고. 또 희열은 마음의 일깨움이고, 사랑은 마음의 활동이다. 희열은 마음을 일어나게 하지만 사랑은 마음을 걷게 한다. 마음은 희열로써 제 날개를 펴나, 사랑은 마음의 날음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구별지어 똑똑히 말한다면, 그것은 선에 대한 마음의 충동, 주입, 및 전진하는 것 외에 다름이 아니다.

많은 위인도 사랑이란 희열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는데(신학대전 Ia IIae,q. XXV, a,2 및 同 q, XXVI, a, 2) 얼른 보기에는 그들 나름의 많은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충동은 마음이 선과 만났을 때 최초로 느끼는 희열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물에 대한 일치로써 마음에 일어나는 희열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충동은 희열로써 지속되는 것이므로, 그 어머니이며 양육자인 그 희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만일 희열이 갑자기 그쳤다면 이는 곧 사랑이 그친 것이 된다. 또 이는 마치 꿀벌이 꿀 속에서 태어나서 꿀로 양육되며, 꿀이 아니고는 원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도 희열에서 태어나서 희열을 통하여 유지되며, 또 희열을 지향하고 있게 마련이다. 사물이 지닌 무게는 그것을 움직여 운동시키고 정지시킨다. 돌이 지닌 무게는 장애물이 없어지자 바로 돌을 흔들고 움직여 아래로 떨어지게 한다. 또한 아래로 내려가는 움직임을 계속하게 하는 것도 바로 사물의 무게다. 따라서 한 사물이 제자리에 닿게 되면 멈추어 서서 안식하게 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 지니고 있는 중량重量, 곧 무게에 의해서다.

이와같이 의지를 자극하는 것은 희열이다. 이것은 의지를 움직이며, 의지가 사랑하는 사물과 일치하자 곧, 희열에 의해서 거기 머문다. 그러므로 사랑의 이러한 충동은 그 사랑의 탄생과 유지보전과 완성과 함께 이 희열에 의존케 되며 항상 이에 붙여서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위대한 사고력을 지녔던 이들이 사랑과 희열을 동일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겠다. 사실, 사랑은 영혼의 참된 격정이어서, 단순한 희열일 수는 없다. 그것이 비록 거기에서 발산해 나오는 필요성을 지녔다고는 해도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희열일 수는 없다. 그런데 희열로써 일어난 이 충동은 일치나 혹은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데까지 계속된다.

그러므로 이 운동이 현존하는 선에로 향하게 될 때, 그것은 사랑하는 대상으로 마음을 밀어주고 죄어들이며 꼭 붙여 결합시키는 작용만을 하게 된다. 이리하여 마음은 그 희열을 즐기게 되며 따라서 그것을 희열의 사랑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늘 첫 희열에서 태어나서 둘째 희열에서 끝맺어지는데, 이 둘째의 것이란 바로 사랑이 결합되고 마음이 일치되어 있는 현존하는 대상 속에서 받게 되는 것이다. 느리나 한가지 선으로 마음이 향해지고 기울어지고 움직여져 있는 그 선이 멀어지거나 없어져서 미래에나 존재하는 것이 되거나, 또한 열망하는 대로 그렇듯 완전한 일치가 될 수 없을 때, 이 결여된 대상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고 요구시키는 사랑의 충동을 바로 열망이라 부른다, 사실 이 열망이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려는 욕구, 탐욕, 또는 욕심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방법으로도 기대할 수도, 요구할 수도 없는 것을 바라게 하는 어떤 유의 사랑의 충동이 있으니, 예컨대, — 나는 왜 지금 천국에 있지 못할까? 내가 임금이라면 좋을 것을! 하느님께서 제발 나를 다시 젊어지게 해 주셨으면!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 하는 등의 말로 표현되는 것들이다. 이러한 것도 역시 열망이라고 하겠으나, 내 생각에는 본래의 뜻으로 볼 때, 차라리 소원, 또는 동경憧憬(wishings, souhaits)이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정情은 열망처럼 표현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열망하는 것을 표현할 때, “나는 열렬히 원한다, 또는 바란다(I desire, Je desire)”라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좀 불완전한 열망을 표현할 때 우리는 흔히, “나는 무엇을 어떻게 했으면 한다”라느니, 또는 “하려고 한다”라는 식의 말투를 쓰게 된다. 우리는 흔히, “좀 젊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젊어지기를 열망한다”라고는 하지 않으니 이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충동을 소원이니, 동경이니 하고 부르는 것이며, 또 스콜라 학파에서는 이를 염원(念願, velleity, velleitas란 생각으로 원하고 기다리며 바라되, 그리 강력한 열망은 없는 것으로서, 동경憧憬과 비슷한 의미로 쓰고 있다)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의욕意慾의 시초에 불과한 것으로서, 계속하여 일어나는 충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실현 불가능이나 극단의 어려움을 알기 때문에 의지는 자기의 움직임을 계속하지 않고 중지시키며, 소원이라는 이 단순한 정情 속에서 제 작용을 끝맺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의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바라보고는 있으나 얻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이 선이 퍽 내 마음에 들어서 내가 그것을 뜻하거나 바랄 수 없기는 할망정, 내 애정이 너무나 그리로 쏠려있으니 만일 내가 그것을 뜻할 수 있고 바랄 수만 있는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그것을 열망하여 “「원할 것」이라고.”

간단히 말하면, 이러한 소원, 또는 염원이란 것은 작은 사랑에 지나지 않으므로, 사소하고 단순한 승인의 사랑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영혼이, 스스로 인정한 선을 승인하기는 하지만, 무슨 요구 같은 것은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상, 그것을 바랄 수 없기 때문에, 만일 바랄 수만 있다면, 기쁘게 바랄 것이라는 것과 그 선이 참으로 바람직한 것이 되기를 언명하는 것이다.

테오티모여, 이상 말한 것이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것들 말고도 더 많은 불완전한 열망이나 염원 같은 것이 있으며, 이러한 것들의 충동은 불가능성이나 극단의 어려움으로 인하여 중지되지는 못하지만, 보다 더 강하고 힘 있는 열망이나 원욕과 더불어 갖게 되는 병존불가능성(並存不可能性-병존불가능 또는 상극相剋이란 말로 번역되는 원어는, 라틴어의 incompatibilitas, 영어로 incompatibility로서 서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고, 견딜 수 없으니, 물과 불, 사랑과 미움은 상극이라고 할 수 있다)에 의해서만은 중단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말하면, 한 병자가 버섯이나 수박을 몹시 먹고 싶어 하는데, 하필이면 그것이 다 의사한테서 금지된 것들이면, 비록 먹고는 싶어도 안 먹을 것이니, 이유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이다. 이런 때, 이 병자에게 두 가지 열망이 대립하는데, 하나는 먹고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치료하여 낫겠다는 것이며, 치료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하므로 버섯을 먹겠다는 열망을 누르고 숨지게 함으로써 실제로는 아무런 결과적 행동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입타는 자기 딸을 미리 보전하고자 하였다.(참조. 판관 11,31)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허원을 준수하려는 열망과 병존불가능한 것이었으므로 좀 난처하여, 그는 자기가 원치 않은 바를 뜻 먹게 되었으니, 즉 딸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었고, 반대로 뜻하지 않은 바를 원하게 되었으니, 곧 자기의 딸을 바치지 않고 보전하는 것이었다. 빌라도와 헤로데도 두 원의를 지녔었으니, 전자는 구세주를, 후자는 구세주의 선구자를 각각 구출하고자 하였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 소원은 서로 용납될 수 없는 상극相剋을 지니고 있었으니, 전자는 유다인들과 카이사르 황제를 기쁘게 하려 함이었고 후자는 자기의 딸 헤로디아를 기쁘게 하려 함이었다.

물론 이러한 소원 내지 원의는 헛되고 무익한 것들임을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비례에 있어서 우리의 소원이나 염원과 상극이 되는 것들은 덜 열망함직한 것이니만큼, 소원은 더욱 불완전한 열망임으로 중지를 당하게 되며, 약자는 상반된 강자에 의해 억압을 받는 것이다. 이와같이 세자 요한을 목 베지 않으려던 헤로데의 염원은 구세주를 석방하려던 빌라도의 소원에 비겨 훨씬 불완전한 것이라 하겠으니 후자는 백성들과 카이사르 황제의 모략과 격분을 무서워했고, 전자는 오로지 한 계집아이를 실망하게 할까 걱정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가능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보다 더 센 상극적相剋的 열망에 의해서 장애를 받은 그러한 염원은 참으로 소원이니 열망이니 하고 불리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헛되고 질식되고 유해무익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므로 실현불가능한 것을 우리가 소원할 때 우리는 “원하기는 하지만 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성취 가능한 소원에 대해서는, “원하기는 하지만 뜻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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