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시기에 접어드는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전례 복음의 첫 구절을 통하여)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 6,1)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 전반을 통하여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놀랄지 모르지만 “상賞”이라는 말입니다.(참조. 1.2.5.16절) 보통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신앙 여정에서 그 목표인 “상”보다도 그 여정에서 요구되는 (희생과) 헌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거듭 “상”이라는 단어로 돌아가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상”을 받자고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우리의 마음 안에, 우리 마음을 잡아끌어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도록 하는 “상”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영문 뒤에 교황님의 2025년 사순 시기 담화가 첨부되어 있음)
두 가지 “상賞”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지향할 수 있는 두 가지 종류의 상,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주실 상과 다른 한편으로 다른 이들이 주는 상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실 상은 영원하고 참되며 궁극적인 보상이자 우리 삶의 목적·목표입니다. 다른 이들이 주는 상은 일시적인 것으로 다른 이의 칭찬을 듣거나 세속적인 성공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면서 우리의 가장 큰 만족감이 될 때마다 우리가 받는 스포트라이트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보상은 단지 환상에 불과합니다. 이는 신기루와 같아서 일단 그곳에 도달한다고 해도 (결국)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매력을 주지만 실망하고 말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항상 불안과 불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보상을 바라는 이들은 결코 평화를 얻지 못하고 평화에 이바지하지도 못합니다. 그런 이들은 아버지와 형제자매들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하는 위험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조심하여라.”(마태 6,1)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는 영원한 보상,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는 보상을 즐길 기회가 있다. 그러니 겉모습에 현혹되어 얻자마자 실망하게 될 싸구려 보상에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상, 재(灰)를 얹는 의식
(오늘) 우리의 이마에 재를 얹는 의식은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받을 상보다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는 상에 빠지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 조건의 덧없음을 성찰하게 하는 “재(灰)”라는 이 진지한 표징은 맛은 쓰더라도 겉모습이라는 질병, 우리를 타인의 칭찬에 얽매이는 노예로 만들고 마는 영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 효과가 있는 약과도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에페 6,6 콜로 3,22)라 하신 것처럼 타인의 칭찬에 얽매이는 이는 정말 “노예”, 눈과 마음의 노예입니다. 그러한 노예의 삶은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타인의 찬사가 중요하므로 우리가 부질없는 영광을 위해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러한 보상으로 만족하려 들 때 우리는 잘살 수 없게 됩니다.
“겉모습”이라는 질병
문제는 이러한 “겉모습”이라는 질병(illness of appearances)이 가장 거룩한 영역까지 위협한다는 것입니다. 기도, 자선, 단식조차도 (자기 멋에 겨운) 자기만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아무리 고상한 행동일지라도 모든 행동에는 자기만족이라는 벌레(the worm of self-complacency)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벌레가 숨어들면) 우리 마음은 전혀 자유롭지 않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형제자매들의 사랑이 아니라 인간적인 인정이나 사람들의 박수, 그리고 우리 자신의 영광에 급급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 자신, 그리고 타인 앞에서 모든 것이 일종의 가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전례의 복음 말씀은 우리 내면을 살피고 우리 자신의 위선을 인식하라고 촉구합니다. 우리가 추구하려는 겉모습을 진단하고, 그들의 가면을 벗기도록 합시다. 그러면 좋을 것입니다.
사순절
“재(灰)”는 세속적인 보상에 열광하는 추구 뒤에 숨어 있는 공허함을 말해줍니다. “재”는 세속적인 것들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고 마는 먼지와 같은 것임을 상기하도록 합니다. 자매와 형제 여러분, 우리는 바람을 쫓아가자고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영원을 갈망합니다. 사순절은 주님께서 우리가 새로워지도록, 우리 내면의 삶에 자양분을 주도록, 부활절을 향하도록, 사라져버릴 것이 아닌 것들을 향하도록,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받게 될 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기입니다. 또한 사순절은 치유의 여정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을 새로운 정신으로, 다른 ‘스타일’로 살아야 합니다. 기도, 자선, 단식은 이를 위한 것입니다. 사순절의 “재”로 정화합시다. 겉모습의 위선을 정화합시다. 온 힘을 쏟아 하느님, 우리 형제자매들, 그리고 우리 자신과 살아있는 관계를 회복합시다.
기도
기도, 겸손한 기도,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우리 아버지께”(마태 6,6) 드리는 기도는 우리가 어느 곳에 있더라도 우리의 삶을 꽃피우게 하는 비결이 됩니다. 애정과 신뢰가 넘치는 따뜻한 대화가 기도입니다. 그러한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고 열어줍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합시다. 하느님의 감동적인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분의 상처 자국에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세상의 상처를 담읍시다. 항상 서두르지만 말고 그분 앞에 말없이 서 있는 시간을 마련해 봅시다. 주님과 나누는 다정한 대화의 풍성한 본질을 다시 발견합시다. 하느님께서는 겉모습에 관심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겉치레나 소란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사랑의 은밀함(the secrecy of love)” 안에서 은밀하게 발견되기를 즐기시는 분이십니다.
자선
기도가 진실하면 자선으로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선은 가장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라는 노예살이로부터 우리를 해방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받는) 재로 정화된 사순절의 자선은 우리를 나눔에서 발견할 수 있는 깊은 기쁨의 본질로 데려갑니다. 스포트라이트와 거리가 먼 자선이 평화와 희망으로 마음을 채웁니다. 이러한 자선은 주는 아름다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라는 말씀처럼 주는 것이 곧 받는 것이라는 귀한 비밀을 밝혀줍니다.
단식
마지막으로 단식입니다. 단식은 다이어트의 일종이 아닙니다. 단식은 육체적인 외모라는 강박이나 자기중심적인 모습-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단식은 우리가 사물의 진정한 가치에 감사하도록 합니다. 단식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이 지나가는 현 세상에 의존하는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단식은 음식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사순절에는 우리 안에 중독(의존)으로 (자리 잡을, 자리 잡는) 것들에 대해 단식해야만 합니다. 각자 실제 자기 생활에서 어떤 단식을 하면 좋을지 생각합시다.
기도·자선·단식의 효과
기도, 자선, 단식은 “은밀하게” 성장할 필요가 있지만, 그 효과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 자선, 단식은 우리 자신만을 위한 약藥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약으로서 역사를 바꿉니다. 그 효과를 경험한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그 효과를 전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기도, 자선, 단식이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과 세상에 개입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자선, 단식은 영靈의 무기들입니다. 이 무기들을 들고 우리는 오늘 ‘우크라이나를 위한 기도와 단식의 날’에 인간이 인간의 힘으로는 구축할 수 없는 평화를 하느님께 간청합니다.
오, 주님! 당신께서는 은밀하게 보시고, 저희의 모든 기대를 뛰어넘는 상으로 갚아주십니다. 당신만을 믿는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특별히 비천한 이들, 시험 중에 있는 이들, 무기들의 굉음 앞에서 고통받으며 도망치는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저희의 마음에 평화를 다시 내려 주소서. 저희의 날들에 당신의 평화를 다시 허락하소서. 아멘!(교황 프란치스코, 2022년 3월 2일 재의 수요일 강론, 이날 미사는 절대적인 안정과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교황님께서 집전하시지 않고, 교황청 국무원장인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이 집전하였으며 미리 준비된 교황님의 강론을 추기경이 대독하였음. 문단의 소제목은 임의로 추가한 내용이며, 영어와 맞지 않는 부분은 이탈리아어를 참조하였음 *사진-교황청 공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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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Y MASS, BLESSING AND IMPOSITION OF THE ASHES
HOMILY OF HIS HOLINESS POPE FRANCIS
Basilica of Santa Sabina
Ash Wednesday, 2 March 2022
Cardinal Parolin read the homily Pope Francis had prepared for the occasion
Today, as we embark on the Lenten season, the Lord says to us: “Beware of practicing your piety before others in order to be seen by them; for then you have no reward from your Father in heaven” (Mt 6:1). It may be surprising, but in today’s Gospel, the word we hear most frequently is reward (cf. vv 1.2.5.16). Usually, on Ash Wednesday, we think more of the commitment demanded by the journey of faith, rather than the prize that is its goal. Yet today Jesus keeps returning to that word, reward, which can appear to be the reason for our actions. Yet within our hearts, in fact, there is a thirst, a desire for a reward, which attracts and motivates us.
The Lord, however, speaks of two kinds of reward to which our lives can tend: a reward from the Father and, on the other hand, a reward from others. The first is eternal, the true and ultimate reward, the purpose of our lives. The second is ephemeral, a spotlight we seek whenever the admiration of others and worldly success become the most important thing for us, our greatest gratification. Yet the latter is merely an illusion. It is like a mirage that, once we get there, proves illusory; it leaves us unfulfilled. Restlessness and discontent are always around the corner for those who look to a worldliness that attracts but then disappoints. Those who seek worldly rewards never find peace or contribute to peace. They lose sight of the Father and their brothers and sisters. This is a risk we all face, and so Jesus tells us to “beware”. As if to say: “You have a chance to enjoy an infinite reward, an incomparable reward. Beware, then, and do not let yourself be dazzled by appearances, pursuing cheap rewards that disappoint as soon as you touch them”.
The rite of receiving ashesbon our heads is meant to protect us from the error of putting the reward received from others ahead of the reward we receive from the Father. This austere sign, which leads us to reflect on the transience of our human condition, is like a medicine that has a bitter taste and yet is effective for curing the illness of appearances, a spiritual illness that enslaves us and makes us dependent on the admiration of others. It is a true “slavery” of the eyes and the mind (cf. Eph 6:6, Col 3:22). A slavery that makes us live our lives for vainglory, where what counts is not our purity of heart but the admiration of others. Not how God sees us, but how others see us. We cannot live well if we are willing to be content with that reward.
The problem is that this “illness of appearances” threatens even the most sacred of precincts. That is what Jesus’ tells us today: that even prayer, charity and fasting can become self-referential. In every act, even the most noble, there can hide the worm of self-complacency. Then our heart is not completely free, for it seeks, not the love of the Father and of our brothers and sisters, but human approval, people’s applause, our own glory. Everything can then become a kind of pretense before God, before oneself and before others. That is why the word of God urges us to look within and to recognize our own hypocrisies. Let us make a diagnosis of the appearances that we seek, and let us try to unmask them. It will do us good.
The ashes bespeak the emptiness hiding behind the frenetic quest for worldly rewards. They remind us that worldliness is like the dust that is carried away by a slight gust of wind. Sisters and brothers, we are not in this world to chase the wind; our hearts thirst for eternity. Lent is the time granted us by the Lord to be renewed, to nurture our interior life and to journey towards Easter, towards the things that do not pass away, towards the reward we are to receive from the Father. Lent is also a journey of healing. Not to be changed overnight, but to live each day with a renewed spirit, a different “style”. Prayer, charity and fasting are aids to this. Purified by the Lenten ashes, purified of the hypocrisy of appearances, they become even more powerful and restore us to a living relationship with God, our brothers and sisters, and ourselves.
Prayer, humble prayer, prayer “in secret” (Mt 6:6), in the hiddenness of our rooms, becomes the secret to making our lives flourish everywhere else. Prayer is a dialogue, warm in affection and trust, which consoles and expands our hearts. During this Lenten season, let us pray above all by looking at the Crucified Lord. Let us open our hearts to the touching tenderness of God, and in his wounds place our own wounds and those of our world. Let us not be always in a rush, but find the time to stand in silence before him. Let us rediscover the fruitfulness and simplicity of a heartfelt dialogue with the Lord. For God is not interested in appearances. Instead, he loves to be found in secret, “the secrecy of love”, far from all ostentation and clamour.
If prayer is real, it necessarily bears fruit in charity. And charity sets us free from the worst form of enslavement, which is slavery to self. Lenten charity, purified by these ashes, brings us back to what is essential, to the deep joy to be found in giving. Almsgiving, practised far from the spotlights, fills the heart with peace and hope. It reveals to us the beauty of giving, which then becomes receiving, and thus enables us to discover a precious secret: our hearts rejoice more at giving than at receiving (cf. Acts 20:35).
Finally, fasting. Fasting is not a diet. Indeed, it sets us free from the self-centred and obsessive quest of physical fitness, in order to help us to keep in shape not only our bodies but our spirit as well. Fasting makes us appreciate things for their true worth. It reminds us in a concrete way that life must not be made dependent upon the fleeting landscape of the present world. Nor should fasting be restricted to food alone. Especially in Lent, we should fast from anything that can create in us any kind of addiction. This is something each of us should reflect on, so as to fast in a way that will have an effect on our actual lives.
Prayer, charity and fasting need to grow “in secret”, but that is not true of their effects. Prayer, charity and fasting are not medicines meant only for ourselves but for everyone: they can change history. First, because those who experience their effects almost unconsciously pass them on to others; but above all, because prayer, charity and fasting are the principal ways for God to intervene in our lives and in the world. They are weapons of the spirit and, with them, on this day of prayer and fasting for Ukraine, we implore from God that peace which men and women are incapable of building by themselves.
O Lord, you see in secret and you reward us beyond our every expectation. Hear the prayers of those who trust in you, especially the lowly, those sorely tried, and those who suffer and flee before the roar of weapons. Restore peace to our hearts; once again, grant your peace to our days.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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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5년 사순 시기 담화
희망 안에서 함께 길을 걸어갑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해마다 우리는 믿음과 희망 안에서 거룩한 사순 여정의 순례를 머리에 재를 얹는 참회 예식으로 시작합니다. 어머니요 스승인 교회는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에 마음을 열어 죄와 죽음을 이기신 주 그리스도의 파스카 승리를 더없이 기뻐하며 축하하도록 초대합니다. 바오로 성인은 이렇게 환호하였습니다.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1코린 15,54-55) 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믿음의 핵심이시고,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이미 성취된 성부의 위대한 약속인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 희망의 보증이십니다(요한 10,28; 17,3 참조).(프란치스코, 회칙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Dilexit Nos), 2024.10.24., 220항 참조)
희년의 은총을 함께 나누는 이번 사순 시기에, 저는 희망 안에서 함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하여, 그리고 하느님께서 개인이든 공동체든 우리 모두에게 자비로이 말씀하시는 회심으로의 부르심에 대한 몇 가지 성찰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희년의 표어인 ‘희망의 순례자’는, 탈출기에서 이야기하듯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나긴 여정을 떠올리게 합니다.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로 향하는 이 고된 길은 당신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언제나 성실하신 주님께서 뜻하시고 이끄신 길이었습니다. 성경의 이 탈출 이야기를 떠올릴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오늘날 고통과 폭력의 상황에서 벗어나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의 더 나은 삶을 찾아가는 우리 형제자매들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회심으로의 첫 번째 부르심은 우리 모두가 이 삶의 순례자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저마다 우리 삶이 이 사실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잠시 스스로 물어보도록 초대받습니다. 나는 참으로 길을 걸어가는 중인가? 아니면 두려움과 실의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거나 안락한 곳에서 나오기를 꺼리며 움직이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는가? 나는 죄의 유혹과 나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상황을 멀리할 방법을 찾고 있는가? 우리의 일상을 이주민이나 이방인의 일상과 바꾸어 생각해 보고 그들의 경험에 공감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요청하시는지 깨달아, 아버지의 집을 향한 여정에서 더욱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사순 시기의 좋은 수련이 될 것입니다. 이는 나그네인 우리 모두를 위한 훌륭한 ‘양심 성찰’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함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함께 걸어가도록, 시노드 교회가 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프란치스코, 복자 조반니 바티스타 스칼라브리니와 아르테미데 차티의 시성 미사 강론, 2022.10.9.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외로운 나그네로 걷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걸어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자신 안에 갇혀 있지 말고 자신에게서 벗어나 하느님과 우리 형제자매들을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말라고 재촉하십니다.(복자 조반니 바티스타 스칼라브리니와 아르테미데 차티의 시성 미사 강론 참조) 함께 길을 걸어가는 것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공통된 품위에 기반하는 그 일치를 굳게 다진다는 뜻입니다(갈라 3,26-28 참조). 이는 다른 이들을 밀치거나 밟아 서지 않고, 시기하거나 위선을 떨지 않으며, 한 사람도 뒤처지게 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함께 나란히 걸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 사랑과 인내로 서로 배려하면서 같은 목표를 향하여, 같은 방향으로 걸어갑시다.
이번 사순 시기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생활 속에서, 우리 가정에서, 우리가 일하고 시간을 보내는 곳에서, 본당이나 수도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일 수 있는지, 그리고 자신 안에만 갇혀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만 생각하려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지 성찰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주교, 신부, 축성 생활자, 평신도로서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봉사하는 우리는 다른 이들과 협력하고 있는가?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모든 이에게 구체적인 몸짓으로 환대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다른 이들에게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느낌이 들게 하는가, 아니면 다른 이들과 계속 거리를 두는가?(복자 조반니 바티스타 스칼라브리니와 아르테미데 차티의 시성 미사 강론 참조) 이것이 회심으로의 두 번째 부르심, 곧 시노달리타스로의 부르심입니다.
세 번째로, 희망 안에서 함께 길을 걸어갑시다. 우리에게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참조)라는 희년의 중심 말씀이(프란치스코, 칙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Spes Non Confundit), 1항 참조) 부활의 승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우리 사순 여정의 초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에서 가르쳐 주셨듯이, “인간에게는 조건 없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인간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베네딕토 16세,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 2007.11.3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8(제1판), 26항) 나의 희망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주님 부활 대축일 부속가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살아 계시며 영광 안에서 다스리십니다. 죽음은 승리로 바뀌었고, 바로 여기, 그리스도의 부활에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큰 희망을 둡니다!
따라서 회심으로의 세 번째 부르심은 희망으로의 부르심, 하느님을 신뢰하고 영원한 생명의 그 크신 약속을 믿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내 죄에 대한 주님의 용서를 확신하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가? 구원을 애타게 바라며 구원받기 위하여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가? 역사적 사건들을 이해하게 해 주고, 정의와 형제애에 헌신하며 우리 공동의 집을 돌보고 그 누구도 소외감을 느끼지 않게 북돋워 주는 희망을 나는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있는가?
자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 덕분에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희망 안에서 보호받고 있습니다(로마 5,5 참조). 희망은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 1997,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8(제2판), 1820항)합니다. 희망은 교회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도록”(1티모 2,4) 기도하면서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천상 영광 안에서 하나가 될 날을 고대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희망하라. 희망하라. 너는 그 날과 그 시간을 알지 못한다. 조심스럽게 깨어 있어라. 비록 너의 초조함이 확실한 것을 의심스럽게 만들고, 아주 짧은 시간을 길게 여기게 하더라도 모든 것은 빠르게 지나간다”(「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외침」, 15,3).(『가톨릭 교회 교리서』, 1821항)
희망의 어머니이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고 저희의 이 사순 여정에 함께해 주소서.(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2025년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프란치스코 *번역문 출처-CBCK)
내일 새로 만날 꼬맹이들의
입학식을 준비하며
전
지금 이 말씀들이 가슴에 와 닿아
저절로 눈물이 납니다.
누가 내가 열심히 한 걸 알아주길
바라는 하찮은 생각들이 오고갔음을
고백하며 이번 사순절은 좀 더
의미있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희망하라. 희망하라. 조심스럽게 깨어있으라.
1년을 함께 할 나의 어린 친구들에게
사랑과 기쁨이 충만하길 소망해보는
아침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