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 제1주일, 그리스도인들에게 재계齋戒의 시기이자 유혹과 맞서 이겨내는 “은혜로운 때”(2코린 6,2)의 첫 주일이다. 교회는 이날에 항상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한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유혹은 예수님의 공생활 내내 계속되고, 십자가 위에서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루카 23,35-39 참조)이라고 말씀하시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집회 2,1) 하는 집회서의 말씀을 익히 알고 계셨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스승이었을 세례자 요한에게 나아가시고 요르단 강물에 잠겨 세례를 받으신 다음 물에서 올라오셔서 기도하셨는데, 그때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내리시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참조. 루카 3,21-22)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순간 예수님의 삶이 바뀌었고 다른 삶이 시작한다. 더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은 분으로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서만 사는 삶이 아니었다. 이제 성령으로 가득 차신 분, 예언자로서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의 삶이 시작된다. 그때부터 세례자 요한과 요한을 따르던 공동체 구성원들이나 제자들은 요르단 강을 떠나 유다의 광야로 넘어간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루카 4,1)
예수님께 내리신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의 고독과 특별히 당신 앞에 기다리고 있는 사명에 대해 차분히 기도하시도록 예수님을 광야로 내몬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다른 삶을 시작하실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예수님께서는 복음의 선포자요 예언자로서 당신의 소명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를 ‘식별’하신다. 특별히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 하신 하느님을 어떻게 하면 계속 들을 것인가 하고 깊이 기도하시며, 당신께서 앞으로 살아내야 할 하느님의 뜻을 현실로 마주하시고, 그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들을 어떻게 물리쳐야 할 것인지 숙고하신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 4,1ㄴ-2ㄱ)
예수님의 광야 피정避靜은 꼭 필요했다. 40일의 긴 피정이었지만, 그래도 예수님께서 져야 하는 십자가의 무게에 비하면 짧은 기간이었다. 예수님의 광야 피정은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온갖 것을 벗는 기간이었다. 광야의 고독은 다른 이들 앞에 선 내가 누구인가를 철저히 잊어야 하는 과정이었다. 예수님께도 시험과 유혹은 당연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과정을 통해 완전한 벌거벗음으로 당신 자신과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시고, 오로지 인간과 세상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이 되신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루카 4,2ㄴ) 예수님께서는 충분한 음식의 부족으로 인간적 한계와 약함, 곧 죽어야만 하는 인간을 확인하신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철저히 벗어버린 상황에서만 자기 존재와 세상의 근본이나 기원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시장하셨다”라는 이 구절은 단순하지만, 인간의 현실과 조건에 예수님의 선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십일 동안”이라는 예수님의 광야 40일은 일찍이 모세가 살았고(탈출 24,18;34,28 신명 9,9-11.18.25) 엘리야가 살았던(1열왕 19,8) 40일이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빠져나와 홍해를 건너고 숱한 고난과 배반, 그리고 선택을 살아야만 했던 40년 광야 생활(민수 14,33-34;32,13 신명 2,7;8,2-4;29,4)과도 같은 것이었다. 루카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맞은 유혹을 지혜로운 인간학적 서술로 종합하여 ‘먹기(to eat), 가지기·소유하기(to have), 그리고 지배하기(to dominate)’라는 3가지로 단순하게 기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계속되는 유혹의 과정이었고, 예수님께는 수많은 유혹이 있었을 것이다. 악마의 유혹은 한 마디로 이사야서가 말하는 고난 받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살아 구세주가 되어야 하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즉 악마가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구하는 구세주가 되어보라는 요청이었음을 보여준다.
1.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루카복음에 따라서 시장하신 예수님께 악마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루카 4,3) 하며 첫 번째로 유혹한다. 인간적 조건을 탈피하고 기적에 의존하라고 하는 유혹은 인간의 현실을 회피하라는 유혹이다. 눈앞에 다가온 현실, 배로 느끼고 현기증을 유발하며 몸으로 느껴야만 하는 허기짐은 필요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인 취약점이다. 처절한 배고픔은 인간이 무엇이든, 심지어 살인까지도 할 수 있게 하는 강한 유혹이고 모든 것을 잊게 하는 현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억지로 배고픔을 참아야만 한다는 훈련을 하신 것이 아니다. 시장하신 예수님께 다가온 유혹은 배고픈 인간에게 다가온 여느 유혹과 같은 유혹이었고, 이제 막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신 분이 살아내야만 하는 소명을 대비하여 보여준다. 어찌 하느님의 능력이 광야에 널린 돌멩이 하나를 빵으로 만들지 못하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이시지만, 인간 중의 인간, 사람과 똑같은 인간이 되시고자 하셨다. 바오로 사도가 적절하게 기록해 준 대로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하는 말씀 그대로이다. 예수님께 다가온 첫 번째 유혹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벗어버리고, 하느님의 능력을 사용하여 배고픔을 채우며 인간이 도무지 상상할 수 없고 표현할 길이 없는 극단적인 비우심을 채우라는 유혹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신명 8,3ㄱ 루카 4,4)는 성경의 말씀으로 악마를 물리치신다. 사람은 빵만으로 굶주리지 않는다.
2.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첫 번째 유혹에서 실패한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주며,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요.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루카 4,6-7) 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영광”(δόξα, dóxa)과 “권세”, “세계 모든 나라”의 재물과 교만을 보신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지닐 수 있는 조건 하나로서 악마는 세속적 부富와 권세라는 우상에 절하라는 “경배”를 요구한다. 예수님께서 “경배”만 하신다면 이 모든 세속적 수단들이 예수님 손에 있을 것이며 당신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효율적인 방편이요 담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예수님이 성공할 것이고, “네가 잘한다고 사람들이 널 칭찬”(시편 49,19) 할 것이라 한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루카 4,8) 하시며, 신명기 6,13을 인용하여 악마에게 대답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이 정복이나 당신이 다스리실 많은 무리의 집결로 생각하지 않으신다.
한편 여기서 악마는 세속적 권세와 영광을 “내가 받은 것”이라 하면서 그에 “경배”하고 그를 받아들이며 그에 봉사하는 자들에게 줄 수 있다고 밝힌다. 그런 면에서 세속적 권세와 영광을 가진 자들은 본인이 이를 알든 모르든 악마의 하수인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3. “예루살렘…성전 꼭대기…밑으로 몸을 던져”
세 번째이자 마지막 유혹, 가장 큰 유혹이자 말로는 충분히 다 설명할 수 없는 유혹이 이어진다. “악마는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예수님을)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잖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루카 4,9-11) 한다. 이는 단순한 유혹을 넘어 하느님을 억지로라도 시험하려는 유혹이며 다른 말로 ‘무無(nothingness)’에 관한 유혹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도읍 예루살렘, 그것도 “성전 꼭대기”라는 종교적 상징의 정점에서 아무것도 없는, 심지어 하느님마저 없는 곳, 저 밑, 공허한 심연을 보신다. 그러한 공허 앞에서 인간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자신의 존재마저 잃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끝없는 블랙홀 앞에서 어떻게 하셔야만 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아들이라 선언하신 하느님께서 악마가 인용한 시편 91,11-12처럼 당신 손을 펼치시고 천사를 보내시어 보호해 주시고 받쳐 주시며 구해주시라고 몸을 던져야 하시는 것일까, 아니면 실패와 공허로만 남은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이를 받아들이며, “그분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신명 6,16) 하는 말씀처럼 한없는 신뢰로 하느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남아야 할 것인가? 세 번째 유혹은 어쩌면 유혹 중의 유혹이고, 광야의 고통과 시련 앞에서 하느님의 약속을 망각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탈출 17,7) 하면서 이미 경험했던 유혹이다. 언젠가 우리의 삶 전체를 돌아보면서 모든 것이 부질없고 허망한 것이며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물음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하느님은 애초에 계시지도 않았고,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시지도 않았으며, 설령 계셨다 하더라도 나를 버리신 것’이라는 생각에 허망해진다. 세 번째 유혹은 하느님을 믿는 믿음을 부정하고 그 믿음에서 돌아서라는 유혹이다. 하느님께 욕설을 내뱉지 않고 그분께 대든 적이 없더라고 단순히 그분을 부정하고 나의 인생과 삶에서 그분을 제외하고자 하는 유혹이다.
예수님께서는 참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이러한 유혹을 맞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고자 어떤 가상적인 예시나 상황을 맞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8) 하는 말씀대로 진정으로 실제 이러한 심연을 맞닥뜨리셨고 고난을 겪으셨으며 순종을 배우셨다. 이러한 유혹들 이후에 이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지셨으며, 당신의 사명과 소명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신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을 뿐이며 악마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가 아니었다. 악마는 “때가 되어”(참조. 마태 26,18.45 루카 9,51 요한 2,4;5,25;12,32;13,1;17,1) 다시 예수님께 찾아와 예수님을 유혹하며 아버지의 뜻과 세상을 갈라놓으려고 시도할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말씀을 이루시며 모든 유혹을 이겨내실 것이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히브 4,15 참조. 히브 2,17)이신 우리의 주님께서 인간의 죽음을 물리치시고 부활하시어 세상의 참된 주님으로서 영원히 사실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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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1주일인 오늘 전례의 복음은 우리를 광야로 데려갑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40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곳입니다(루카 4,1-13 참조). 예수님께서도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유혹을 받을 때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광야는 참된 자유를 택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악의 유혹에 맞서는 싸움을 상징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적 사명을 시작하시기 직전에 광야를 체험하십니다. 바로 이러한 영적 투쟁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떤 메시아가 되고자 하시는지 확고하게 밝히십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러저러한 메시아가 아닙니다.……
악마는 두 차례에 걸쳐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루카 4,3; 4,9). 다시 말해 그는 예수님께 당신의 지위를 이용하라고 제안합니다. 먼저 시장기를 느끼고 계시는 물질적인 욕구를 – 곧, 굶주림을 – 충족하라는 유혹입니다. 그런 다음 그분의 권력을 강화하라는 유혹입니다(6-7절 참조). 마지막으로 하느님에게서 기적의 표징을 얻으라는 유혹입니다(9-11절 참조). 세 가지 유혹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그런 것들을 좀 활용해 보세요!”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요! “당신이 그러한 지위에 있다면, 그걸 활용해 보세요! 기회를, 찬스를 놓치지 말고요.” 다시 말해 “‘당신의’ 이익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매혹적인 제안이지만, 그것이 여러분을 마음의 노예로 이끕니다. 가지려는 열망에 집착하게 만들고, 모든 것을 사물, 권력, 명예의 소유로 축소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유혹의 핵심입니다. 곧, 악이 뿌리내리는 “욕망의 독”입니다.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유혹은 항상 이런 패턴, 항상 이런 식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이기는 방식으로 대항하십니다. 어떻게 하시나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에 대응하십니다. 하느님, 다른 사람들, 사물을 이용하여 이익을 얻지 말고, 지위를 남용하여 특권을 얻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에 대응하십니다. 참된 자유와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나눔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것에, 권력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섬김의 기쁨에 참된 자유와 행복이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러한 유혹들은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도 우리와 동행합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종종 선한 외양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활한 악마는 항상 속임수를 씁니다. 악마가 예수님께 원했던 것은 이렇습니다. 곧, 정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있어 그의 제안이 유용하다고 예수님께서 생각하시길 원한 것입니다.
강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마와 대화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도’ 악마와 대화하신 적이 없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이들을 치유하셨을 때 그를 쫓아내시거나 혹은 이번 경우처럼 악마에게 대응하셔야 할 때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대답하시지, 절대 당신의 말씀으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절대 악마와의 대화에 들어가지 마십시오. 악마는 우리보다 훨씬 더 영악합니다. 절대 그와 대화를 나누지 마십시오! 예수님처럼 하느님 말씀에 충실해야 하고, 굳이 말을 해야 한다면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이 길을 따르면 우리는 절대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순 시기가 우리에게도 ‘광야의 때’가 되길 바랍니다. 침묵과 기도의 시간을 마련합시다. 아주 조금이라도,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이러한 침묵과 기도의 공간에 머물며 무엇이 우리 마음을 휘젓고 있는지, 정당화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내면의 진실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교황 프란치스코, 2022년 3월 6일 삼종기도 훈화, *번역문 출처-바티칸 뉴스 한글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