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

이 세상을 한 판의 거대한 서커스장이라고 하자. 이 서커스장에는 스타들도 있고 광대들도 있다. 이 서커스 판에서 중심은 당연히 명연기로 박수갈채를 받아내는 스타들임이 틀림없다. 반면에 광대들은 무대의 중심에 있지는 않다. 그들은 스타들 사이에 막간을 통해 등장하고 실수와 떠듬거리는 말 짓, 몸짓으로 우리를 몇 번이고 웃게 만들어 준다. 그렇게 광대들은 스타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연기 때문에

홀로 꾸는 꿈은 많은 경우에 꿈 그대로 남거나 허상, 망상, 상상, 공상, 환상으로 남는다. 그러나 누군가와 그 꿈을 나누면 많은 경우에 그 꿈은 현실이 된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도 꿈을 나누면서 실제로 꿈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고,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며 친구인 돈 보스코 역시 수많은 아이와 꿈을 나누면서 오늘날의 살레시오회가 있게 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산상설교(5-7장)에서 예수님께서

무엇인가를 보고 알았으며 지켜낸 사람들

그 어느 순교자들이나 성인의 이야기를 읽고 듣더라도 숙연해진다. 그들의 영웅적인 삶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이나 성령으로만 가능한 하느님의 손길이고, 하느님의 역사라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은총을 떠나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그들을 보자면, 그들은 무엇인가를 보고 알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보고 알았던 것을 자기 몸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당위를, 올곧음과 꼿꼿함으로 끝까지 지켜낸 사람들이었다. 과연 내가

우울증을 극복하는 법

많은 그리스도인이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체득한 우울증 극복 방법이 있다. 자신을 버리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진심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처지고 우울해질 때, 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타인을 적극적으로 돕는 것이라는 뜻이다. 타인을 도우면 도움이 필요한 그 사람은 도움을 받고, 돕는 이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깊은 성취감이라는 축복을 얻어 우울증이 치료된다. 재키 왈드만Jackie Waldman 등이 쓴 <내어줄 용기가

어느 쪽 형제요 자매?

성경에는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형제와 자매들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카인과 아벨의 형제, 야곱과 에사우,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인 요셉의 열두 형제, 모세와 아론…신약에 와서는 대표적인 예로서 예수님께서 비유 안에 등장시킨 큰아들과 작은아들, 그리고 마르타와 마리아, 라자로에게 이르는 3남매의 이야기들이 있다. 형제들도 그렇고 자매들도 그렇고, 심지어 남매들까지도 각기 그 개인적 개성이 강하다. 실제 우리들의 형제간이나 자매간, 그리고

사랑은

사랑은 지적질이 아니다. 사랑은 고발이 아니다. 사랑은 계도와 훈육, 계몽이 아니다. 사랑은 내가 아는 만큼 상대방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여럿이 함께 모여 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시기와 질투에 뿌리를 두고 상대방을 위하는 척 가장하는 가면이 아니다. 사랑은 분리와 분열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느낌이나 감정의 상태가

가장 본질적인 물음들

요한복음을 시종일관始終一貫 관통하는 주제 하나가 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제자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돌아서시어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실 때, 제자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자(요한 1,38), “와서 보아라.”(요한 1,39) 하셨다. 이렇게 시작한 요한복음의 이야기는 맨 마지막 장면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에 경쟁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 도착한 무덤에 들어가 빈 무덤의 상황을 목격하고 “보고

봉인封印

‘봉인’(밀봉, 봉할 봉/인장, 도장 인)은 개봉하도록 지정된 자 외에는 누구도 개봉하거나, 접근할 수 없고, 되 물릴 수 없고, 변경할 수 없도록 객관적인 장치로 막아 놓은 상태를 말한다. 현대적인 용어로 이는 아이디와 암호가 설정되어있는 상태이다. 수도자들은 서원誓願으로 봉인되기를 자청했고, 하느님의 인장印章으로 봉인된 사람들이다. 이 봉인은 거룩한 봉인이어서 아무나 개봉할 수 있는 봉인이 아니다. 또한 물리거나 변경할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과 하느님 간의 이야기는 긴 세월에 걸친 극적인 드라마이다. 일흔다섯 나이에 고향, 친족, 아버지 집을 떠나 하느님께서 보여주실 땅으로 가라는 명령(창세 12,1)을 받은 아브라함은 자손과 약속의 땅, 축복을 위해 군소리 없이 길을 떠난다. 여든여섯에 얻은 이스마엘도 과분했는데, 아흔아홉에 이르러서는 이사악을 약속받고 비로소 정식으로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으로 아브람은 아브라함, 사라이는 사라가 된다. 마침내 백

불안과 우울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1.27) 하시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닥쳐올 미래를 두고 걱정하시며 특별한 당부를 하신다. 미래에 대한 염려를 불안이라 하고, 과거에 대한 집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