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28,1-10(파스카 성야 ‘가’해)

“안식일이 지나고…”(마태 28,1)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과 함께 시작한 이 거룩한 파스카 성야 복음의 시작입니다. 성금요일의 십자가로부터 부활대축일의 알렐루야로 넘어가는 성삼일의 과정에서 우리가 그냥 무심코 지나가면서 소홀히 하기 쉬운 날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올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하게 성 토요일의 거대한 침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상을 통해 무덤으로 간 그

요한 18,1-19,42(주님 수난 성금요일 ‘가’해)

이미 기원전 몇백 년 전에 예언자 즈카르야는 “그들은 나를, 곧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며, 외아들을 잃고 곡하듯이 그를 위하여 곡하고, 맏아들을 잃고 슬피 울듯이 그를 위하여 슬피 울 것이다.”(즈카 12,10)라면서 유다의 구원을 예고한다. 오늘 우리들의 묵상과 관상은 즈카르야의 예언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심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과 영광을 드러내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요한 13,1-15(주님 만찬 성 목요일 ‘가’해)

성체성사, 섬김, 기름부음을 받음 성체성사는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전례의 실재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체성사 안에서 우리와 함께 머무르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주님을 모셔가는 주님의 감실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몸소 우리가 당신 몸을 먹지 않고 당신 피를 마시지 않으면 우리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빵과 포도주,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우리 속에 계시는 주님의

남자 아이들

사제이며 교육자인 돈 보스코는 특별히 남자아이들을 잘 이해했으며 그들을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시켰던 스승이었고 친구였으며 아버지였다. ​요즘은 아이가 하나여서 외롭고 귀한 아들로만 크게 될 때 애가 제발 무엇이라도 좀 먹었으면 좋겠다는 부모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형제들이 있는 가정에서 성장 발육기에 있는 남자아이들은 어떨 때 무지막지하게 먹어댄다. 그런 아이들은 집을 부숴버릴 기세로 엄청난 양의 칼로리를 소모하는 일과를 보낸다.

수도자들이 짓기 쉬운 죄 세 가지

봉헌생활을 하다 보면 흔히 짓게 되는 죄 세 가지가 있다. 게으름, 험담, 그릇된 집착이 바로 그것이다. 게으름은 봉헌생활이 식솔들 먹여 살릴 걱정 없이 살아도 되고 내 입과 생존을 위해 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며 평생을 보장받는 철밥통인 까닭에서 비롯된다. 또 무슨 일을 하건 말건 데드 라인이라는 것이 없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 앞에서 ‘훗날’ 셈해야 한다는 그럴듯한

타조 올리버

타조 계의 점잖으신 스타가 계셨다. 그 원로께서는 이제 생의 마감 길에서 후학들에게 삶의 지혜를 전수하는 데에 온 정열을 쏟고 계셨다.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매일같이 신문의 기고를 위하여, 그리고 TV와 같은 대중매체의 인터뷰를 위하여 눈코 뜰 새 없는 일정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트위터의 팔로우만도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타조가 있어서, 입에서 입으로, 말에서 말로, 그리고 손가락에서 손가락으로

소통

하느님께서 ‘말씀’이 되셨다고 성경은 전한다. 하느님께서 수천 년을 두고 예언자들이나 역사적 표징들을 통하여 인간에게 수도 없이 이야기를 하셨는데도 인간이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므로 급기야 스스로 ‘말씀’이 되셔야만 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애초에 한 가지 말을 사용하던 인간들이 함께 힘을 합치면 못할 것이 없다 생각할 만큼 교만해졌으므로 인간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흩어 버리셨는데, 그

수난 묵상

피터 존 카메론Fr. Peter John Cameron, op이라는 도미니코회 소속 사제(우리나라의 ‘매일미사’와도 같은, 그러나 훨씬 다양하고 많은 기도나 자료 등이 담긴 미주 지역에서 유행하는 ‘마니피캇Magnificat’이라는 월간지의 전前 편집장이었던 분)께서 가톨릭 웹사이트 ‘알레테이아Aleteia’에 2023년 4월 1일 자로 기고한 글(https://aleteia.org/2023/04/01/heres-a-7-step-pattern-for-growing-in-holiness/)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제목부터 달리하고 첨가하여 윤색하고 정리한 내용임을 밝힙니다. 이미지 역시 로렌스(Fr. Lawrence, op)라는 도미니코회 사제의 것으로서 Aleteia의

생명의 달, 4월에

이런 생명의 달인 4월을 두고 ‘잔인한 달’이라 하는 유래를 학생들에게 물었더니 아무도 모른다. 신에게 영원히 죽지 않을 축복을 청하여 그 축복은 얻었으나, 싱싱한 젊음을 유지하는 축복은 얻지 못하여, 죽지는 않되 한없이 늙어가는 처지가 되었음을 슬퍼하면서 봄날의 약동하는 생명 앞에서 제발 죽게 해 달라고 빌었다는 내력을 아는 아이들이 요새는 없다. 그저 중간고사가 있는 달이라 잔인하고 미팅에서

냉소적인 사람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한다. 인생은 생명과 죽음,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열정과 절망, 결국 춤과 곡哭이다. 두 극極 사이의 어디쯤엔가에 지금의 내가 있다. 이도 저도 아닌 “미지근”(참조. 묵시 3,16)은 무기력이거나 부정적인 극으로 기울어진 냉소이다. 냉소는 게으름에 닿는다. 기쁨의 반대말은 슬픔이나 비애가 아니다. 기쁨의 반대말은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