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순교

황제의 숭배를 강요했던 고대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공개적인 처형이나 화형, 맹수의 밥으로 던지는 등의 잔혹함 자체였다. 형세가 역전되던 중세 유럽에서는 이단을 척결한다는 소위 종교 재판이 국가의 정치적 목적과 결탁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종교적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20세기가 되면서는 “종교가 아편”이라고 규정한 공산주의를 비롯하여 이상한 이데올로기들이 등장하면서 종교 활동이 제한되거나 파괴되었고, 종교인들이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지거나 쥐도

성낼 분憤‧忿

‘분노’라는 말을 한자어로 찾으면 ‘성낼 분憤’을 써서 ‘분노憤怒’라고 하거나 같은 뜻을 가진 ‘분忿’이라는 글자를 써서 ‘분노忿怒’라고 쓴다. ‘분憤’이나 ‘분忿’은 전혀 다른 글자이지만, 뜻이 같으므로 서로 통용이 되는 ‘통자通字’이다. 우리말 사전에서도 ‘분노’를 검색하면 憤怒·忿怒라는 한자어를 나란히 기록해준다. ‘분노’는 속에서 화증火症이 치밀어오르는 것이고, 심하면 머리끝까지 끓어오르므로 비틀려 질질 나오듯 어느 순간 자아낼 수밖에 없고, 참다못해 버럭 성을

교육에 관하여(로마노 과르디니)

*로마노 과르디니Romano Guardini(1885~1968년)는 이탈리아 태생의 가톨릭 사제, 대학교수, 신학자, 종교철학자, 교육자, 청년운동 지도자, 전례 개혁자로 알려진다. 그의 저서 중에서는 「거룩한 표징」(장익 역, 분도출판사), 「미사, 제대로 드리기」(김영국 역, 가톨릭대학교출판부), 「삶과 나이 – 완성된 삶을 위하여」(김태완 옮김, 문학과지성사), 「주님의 기도」(가톨릭 출판사, 안소근 역),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요한복음의 고별 담화와 요한 1서의 묵상과 사색」(성서와함께, 김형수 역), 「코모 호숫가에서 보낸

신애론(12)

제17장 우리는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자연 본성상으로는 지니고 있지 않다 독수리란 놈은 심장이 매우 크고 힘이 세어서 높이 나른다. 그러나 높이 나르는 것보다도 비할 데 없이 뛰어난 시력을 지니고 있어서 날개깃보다 훨씬 더 민첩하고 요원하게 시야를 넓힌다. 이와같이 하느님께 대한 자연 본성적이며 거룩한 경향에 자극되어 생기를 얻은 우리 영혼은 하느님의 신성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요한 3,13-17)

거룩한 십자가의 승리(축일의 공식적인 영어 이름: The Exaltation of the Holy Cross)를 기념하는 날이다. 이 축일은 전승에 따라 4세기경부터 예루살렘에서부터 전해져왔다는 오래된 축일로 알려진다. 이 축일은 전승에 따를 때 세 가지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326년경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께서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를 발견한 사건, 335년 예수님의 무덤 위에 부활 기념 성당을 지어 봉헌한

십자가

그리스도교를 그저 바라만 보거나 그리스도교에 관하여 탁상공론이나 벌이려고 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언제나 불편한 스캔들이요 “걸림돌이며 어리석음”(참조. 1코린 1,23)이고, 십자가를 둘러싼 비유와 표징들 역시 그러하다. 그리스도인에게조차 바오로가 코린토 1서 1장 17절에서 고발한 것처럼 “십자가를 헛되게 하려는” 유혹은 되풀이된다. 비그리스도인에게는 십자가와 십자가를 둘러싼 논리가 비인간적이거나, 고통을 그릇되게 해석하려는 잘못된 시도로 비칠 뿐이다. 언제나 그래왔다. 더구나

그레고리안 성가

그레고리오 1세 교황님(Gregory I, 590~604년 재위)의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안 성가라고 불리는 ‘Gregorian Chant(영어)’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전례 음악이며, 주로 라틴어(때로는 희랍어)로 불린다. 원래 단선율 음악으로서 자유로운 리듬과 곡조 아래 말의 억양을 따라 물이 흐르듯 말씀을 노래하고, 경건하고 명상적인 분위기 안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목소리만으로도 기도를 노래하면서 전례에 참석하는 이들의 영적 성장을 돕는다. 많은 이가 그레고리오 교황님께서

복음 선포가 이루어진 세 가지 길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는 “그 일은 말과 행동으로, 표징과 이적의 힘으로, 하느님 영의 힘으로 이루어졌습니다.”(로마 15,18ㄴ-19ㄱ)라고 말하면서 이방인을 복음의 길에 들어서도록 인도하는 일, 곧 복음 선포가 이루어진 세 가지 길을 밝힌다. 해당 구절은 신약성경의 언어로 “λόγῳ καὶ ἔργῳ, ἐν δυνάμει σημείων καὶ τεράτων, ἐν δυνάμει Πνεύματος Ἁγίου·(logo kai ergo, en dunamei semeion kai teraton, en dunamei

성모자상聖母子像

교회의 역사 안에 성모님과 아기 예수를 묘사한 헤아릴 수 없는 형태의 성모자상聖母子像이 존재한다. 교회의 유구한 역사와 신앙 안에서 성모자상이 그토록 사랑받아 온 이유에는 여러 가지 신학적, 영적, 인간적 이유가 겹쳐 있다. 1. 성모자상은 인류의 역사 안에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강생(Incarnation)의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시적인 상징이다. 성모자상은 곧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라는 신비의

연중 제23주일 ‘다’해(루카 14,25-33)

지난주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드신 후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여정에 다시 나서시고,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 함께 길을 간다.”(루카 14,25) 예수님의 설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그에 따라 예수님과 함께 길을 나서서 예수님과 동행하려던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이르셨다.”(루카 14,2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본성적인 감정이나 우리 자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