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마지막 만찬 때의 ‘고별 연설’(요한 13,31-16,33)이라 알려지는 대목 중 한 부분으로서 지난주 복음인 ‘포도나무’에 관한 말씀에 바로 이어지는 부분이다.
1.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내가) 너희를”
우리 인간이 “사랑”이신 하느님의 심연을 도저히 헤아릴 길 없지만,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요한 1,18) 하신 말씀대로 인간은 오직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삶으로 당신의 사랑을 ‘알려주시고(알려주다, 설명하다 ἐξηγήσατο, exeghésato)’ 설명해주신 바를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읽어낼 수 있다. “끝까지” 사랑하신 당신 사랑의 권위로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이미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고 경험하시며, 알기 때문에, 그러한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였다고 하신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경계가 없는 사랑이요, 척도가 없는 사랑이며, 방해가 없는 사랑이다. “끝까지”(요한 13,1) 목숨을 바쳐 사랑한 그런 사랑이다. 우리는 우리가 죽일 놈이고 몹쓸 자식들이어서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다가설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도 큰 사랑이시므로 하느님을 찬양하다 보니 그 큰 사랑에 합당한 자 되고 싶고, 그 앞에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산다.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사랑을 깊이 믿고, 그분의 친구로 남고자 하며, 그분의 정신이 나를 지배하도록 기도한다.
아홉 절로 이루어진 오늘 복음에 “사랑”이라는 말은 9번 반복되고 “친구”라는 말은 3번 반복된다.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아드님을 통하여 드러난 이 “사랑”이 아드님의 제자들과 그분의 친구들에게서 드러나며, 아드님의 제자들과 그분의 친구들을 통해서 드러난 이 사랑이 다른 이들과 또 다른 친구들에게로 번져간다. 이 사랑은 모든 이에게 가 닿기 위해 구체화하고 확장되는 사랑이다. 인간이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다 알아듣고 따라가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 안의 사랑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 사랑이 은총으로 거저 주어져 응답해야 하는 제자들의 사랑이 되며, 이 사랑 안에 머물러 그 사랑의 뜻,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명하신 뜻을 실행해야만 한다는 내용은 새길 수 있다.
『사랑은 그대에게 영광의 관을 씌어주지만, 또한, 그대를 십자가에 못 박기도 하는 것. 사랑은 그대를 성장하게 하지만, 또한 그대를 꺾어 버리기도 하는 것.…사랑은 마치 곡식 단을 거두듯 그대를 자기에게로 거두어들인다. 사랑은 그대를 타작해 알몸으로 만들고, 사랑은 그대를 키질해 껍질을 털어버린다. 또한, 사랑은 그대를 갈아 흰 가루로 만들고, 부드러워질 때까지 그대를 반죽한다. 그런 다음 신의 성스러운 향연을 위해 신성한 빵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의 성스러운 불꽃 위에 그대를 올려놓는다. 사랑은 이 모든 일을 그대에게 행해 그대가 가슴의 비밀을 깨닫게 하며, 그 깨달음으로 그대는 큰 생명의 가슴의 한 부분이 되리라.…사랑은 그 자신밖에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그 자신밖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 사랑은 소유하지도, 누구의 소유가 되지도 않는 것. 사랑은 다만 사랑만으로 충분한 것.(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년, ‘예언자’. ‘사랑에 대하여’)』
『사랑은 끝도 가도 없는 하늘에서 퍼덕이는 작은 새의 날갯짓
사랑은 세상을 노래하는 바이올린의 노래
사랑은 인간의 길에 비추는 빛
사랑은 바다를 향해 흐르는 은빛 강
사랑은 물 위에 파장을 만드는 돛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날갯짓, 노래, 빛, 강, 돛
이 모두를 넘어가는 것.
사랑은 사랑을 넘어가는 것
사랑은 어딘가로부터 왔다가 어딘가를 향해 가는 무한의 숨결
사랑은 그 숨결을 알아 모시는 인간의 정신
사랑은 하느님께로 모든 것을 향하는 인간의 자유
사랑은 인간을 부르는 숨결에 대한 인간의 동조
사랑은 하느님을 맞이하고 내어드리기 위해 자신을 여는 인간의 마음
사랑은 하느님께서 거하시고,
다른 이를 위해 파고드시고,
다시 하느님을 향해 날아가게 하려고 순응하는 인간의 몸.
궁극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이 서로 만나고,
헤어진 것들이 다시 결합하고,
누군가에게서 새로운 생명이 솟아나기 위해 하나 되는 것.
(미쉘 꽈스트Michel Quoist, 1918~1997년, ‘사랑은 사랑을 넘어가는 것Amore supera l’amore’이라는 대목에서 시처럼 운율을 살리기 위해 첨삭·번역하였음)』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하신다.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그저 우리를 기쁘게 하시고자 하는 것 말고 또 다른 어떤 기쁨이란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우리를 충만하게 한다는 그 기쁨이라는 것이 그분과의 우정을 나누는 것 말고 또 어떤 기쁨이겠습니까?…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기쁨은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고, 그것이 또한 우리의 기쁨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 기쁨”, 예수님의 기쁨, 우리 안에 충만해지는 그 기쁨이 무엇인지 온전히 서술할 길이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 기쁨이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하신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기쁨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그 기쁨은 말씀 안에 머물러 느끼는 기쁨, 성사들 안에 잠겨 누리는 기쁨, 공동체 안에 어울려 체험하는 기쁨이며 은총이요 선물이다. 이는 감사의 기쁨이고 찬미의 기쁨이며 놀라움의 기쁨이다. 그 기쁨은 다른 이와 뭔가 차이나고 다르다는 사실, 경쟁에서 나의 우월을 인정받는 데서 오는 희열, 곧 차별화를 느끼는 데서 오는 기쁨이 아니다. 그런 기쁨은 달성된 기쁨이고 만들어진 기쁨이며 다른 이를 제치고 선발된 기쁨이다. 그것은 주님을 찬미한답시고 떠벌린 세리의 기쁨이다.(참조, 루카 18,11-12)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기쁨은 어쩌면 연대감, 일체감, 곧 다른 이와 나도 같으며 결국, 애초에 모두가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우치는 기쁨이요, 희열이다. 이런 기쁨은 모두가 형제요 자매임을 알아서 느끼는 기쁨이고, 나의 소망과 기도가 너의 소망과 기도가 되며, 너의 고통과 아픔이 나의 고통과 아픔이 되는 기쁨이다. 이런 기쁨은 묘사하기는 어려워도 발견하기는 쉬운 그런 기쁨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하신다.
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예수님의 사랑이요 그분의 계명은 “서로 사랑”으로, 모든 타인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당신 은총인 사랑의 뜻으로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라고 사랑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시지는 않는다. 당신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당신께서 다른 이들을 사랑하시듯이, 그렇게 다른 이들을 사랑하라 하신다. ‘너의 사랑에 나의 사랑’으로 응답하는 인간적인 사랑의 법칙을 ‘나의 사랑에 다른 이 사랑’이라는 패턴으로 바꾸신다. 이러한 형제적 사랑이 하느님의 뜻을 이룬다.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을 그렇게 받고 싶어 하신다. 그것이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참된 방식이 된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에 우리를 사랑하는 것으로 응답하셨으니,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에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으로 응답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우리와 당신과의 관계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제시하신다. 이는 다름 아닌 이웃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능동적인 우리의 사랑이다. 타인을 섬기고, 타인에게 선을 행하며, 타인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소진하는 것만이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시듯이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식별할 수 있는 기준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사랑이 없으면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나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모두 허상이다. 단지 어떤 종교적인 환상이거나 우리 멋대로 지어낸 그릇되고 가상적인 우상에 우리가 머리를 조아리며 마음을 쏟고 있을 뿐이다.
『…당신의 종들을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끼리, 설령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하더라도, 어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처럼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그러면, 주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우리끼리 우리는 서로를 위해 살기도 원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들의 주님이요 하느님인 내가 너희를 위해 죽는데, 도대체 너희는 서로를 위해 죽을 수가 없다는 말이냐?’ 하십니다.(시리아의 성 에프렘, 306~373년)』
3.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3-15)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 이전에 오랜 세월 동안 성경이 추구하였던 하느님과 당신 백성과의 관계를 송두리째 재해석하시고자 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마땅히 하느님께 속하여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이른바 “종”과 같은 신분으로 견주어 생각되곤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를 더 이상 “종”이 아닌 “친구들(필로이, φίλοι, phíloi)”이라고 부른다고 하신다.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아브라함(참조. 야고 2,23)보다도, 또 하느님의 친구이듯이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한 모세(탈출 33,11)보다도 더한 “친구”, 생명과 사랑의 친교를 이루는 “친구”라 하신다.
누군가 훌륭한 이가 나와 친구를 맺고 평생 곁에 있으면 큰 축복이다. 나와 친구를 맺기에는 과분한 신분과 지위를 갖춘 이가 나더러 친구를 맺자고 하면 영예이다. 그런데 조물주이신 분이 하찮은 피조물의 하나인 나를 친구라 부르고 나더러 친구를 맺자고 하면 이는 신비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반한 배반자 유다에게마저도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마태 26,50) 하셨다.
예수님께서 나를 친구라 부르시고 나더러 친구를 맺자 하신다. 예수님의 제자, 그분의 사랑을 체험한 이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친구가 된다. 단지 지시받은 행동과 임무를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종”이 아니라 주님과 진실한 관계를 맺는 친구가 된다. 주님을 친구로 모시어 친구가 된 이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능동적인 사랑 안에서 주님의 계시이며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말씀에 참여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에 의해 선택되었고, 그리스도께서 기다리시는 이웃 사랑이라는 열매의 수혜자가 된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는 말씀에 따라 세상이 알아볼 수 있도록 이웃 사랑이라는 유일한 표지를 지닌 이들이다. 그 나머지 어떤 것들이라도 그것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을 가려 그들을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게 만드는 것들일 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1요한 4,16) 하는 말씀대로, 그 사랑을 ‘알고 믿으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요한 4,19) 하는 말씀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기대나 욕망을 키우는 것 정도로 충분하다는 유혹에 단호하게 맞서야만 한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그대로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을 현실화하고 살아내면서 우리는 사랑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하고 예수님께서 “새로운 계명”으로 주신 이 “명령”은 예수님의 공동체인 교회의 헌장이다. 교회는 친구들의 우정이 만드는 집, 우정을 체험하는 집이어야만 한다. 주님의 계명이요 명령은 우리에게 주어진 법이 아니라 하느님 자신의 생명에 참여하라는 은총이다. 바로 이것이 결코 받을 수 없어 그저 놀라움과 감사로만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랑, 위대한 그리스도교의 신비이다. 일과를 마칠 때마다, 아니 매 순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 너의 형제를 보았는가? 너, 너의 하느님을 보았는가? 찬미하였는가?』 하는 물음이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너, 너의 형제를 사랑하였는가? 너,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였는가?』 하는 물음도 중요하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