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다리를 부러트리는 목자?

사제를 목자라고 부르면서 “잃은 양”(마태 18,12-14 루카 15,3-7)을 들먹이며 자신은 길을 잃은 불쌍한 양이니 사제인 당신은 끝까지 나를 찾고 붙들어줘야 할 것인데도 왜 울타리 안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에만 정신이 팔려있느냐고 ‘들이대는’ 신자들을 지금까지 여럿 만났다. 그런 이들 앞에 서면 할 말이 없어져 괜히 고개가 숙어진다. 혹 어떤 신자가 결국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것이면서도 마을의 공동우물처럼 사제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어야 한다는 명분을 씌워 침 뱉는 우물로 삼아 신부 때문에 성당에 나오기 어렵다는 얘기라도 하는 것을 전해 듣게 되면 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을지라도 무척 당황스럽고 죄책감과 자책감으로 한동안 괴로워진다.

양 우리에는 많은 양이 있다. 애초에 양들은 『온순한 성질, 뛰어난 고기 맛, 유용한 털 때문에,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단순한 가축을 넘어서 상서祥瑞로움과 선善과 미美와 정의正義의 표상이며 신께 바치는 대표적 희생犧牲이고, 숭배崇拜의 대상으로까지 나아간다.(하영삼, 한자 뿌리 읽기)』 한다. 열거한 모든 글자에 양羊이라는 글자가 들어있음만 확인해도 금방 이해가 갈 일이다. 아흔아홉의 양은 목자의 소리를 알아듣고 목자와 친하며 동고동락을 같이한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양과 목자가 같이 먹고 마시며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로 양과 목자 사이에서 ‘밥그릇의 근접성, 혹은 부엌의 근접성’, 나아가 목자에게서 ‘양 냄새’가 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야 한다고 설파한다.

그런데, 모든 만물이 그렇듯 기질상 태어날 때부터 천방지축이고 자꾸만 길을 이탈하는 양도 있게 마련이어서 그런 양들은 다리를 부러트려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이런 양을 만나게 될 때, 그런 양의 다리를 기술적으로 부러트리고 다리가 나을 때까지 양이 목자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슴에 안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내 양이 길이 들고 목자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되어 마침내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아듣는 양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설령 좋은 의도로 만들어낸 비유라 하더라도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서 한없는 사랑으로 목숨을 바쳐 무조건적으로 “끝까지”(요한 13,1) 사람을 사랑하시는 “착한 목자”(요한 10,11.14)이신 예수님을 자칫 잘못 알아 모시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 양들의 다리를 기술적으로 부러트린다는 목자 이야기는 아마도 미국의 유명한 목사였던 윌리암 마리온 브랜햄William Marrion Branham(1909~1965년)이라는 분이 1957년 3월 8일 금요일에 행한 ‘양들의 착한 목자(The Good Shepherd Of The Sheep)’라는 설교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내용은 안 좋은 일을 당한 신앙인들에게 하느님께서 어떤 경우에 곤경을 허락하시기도 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사목자들에게 고전적인 강론의 소재가 되어 왔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다르다. 기억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양들은 습성상 주인 목자가 실제로 다리를 부러트릴 때, 그 아픈 기억 때문에 그 목자를 영영 두려워하게 되고 외톨이가 될 수도 있다. 목자들이 양들을 길들이기 위해 다리를 부러트리기도 한다는 사실은 성경 그 어디에도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양들에게 몹시 잔인한 행위이다. 자꾸 길을 잃는 양들을 두고 목자들이 양의 다리를 부러트리는 대신 다리에 약간 부담스러운 무게를 달아주면서 양이 멀리 떨어지거나 헤매는 것을 방지하는 기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렇게 다리의 무게를 느끼며 멀리 가지 못하고 목자 주위에 남게 된 그 양은 자연스레 목자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고, 그러면 목자는 그의 다리에 묶어준 무게를 제거해준다.

양우리에서는 밀밭의 가라지처럼(참조. 마태 13,24-30) 양이 아닌 못된 것들이 양을 해칠 욕심으로 양들 사이에 숨어 있는 소위 ‘양의 탈을 쓴 이리’와도 같은 녀석을 발견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아흔아홉을 아끼는 목자는 이런 경우에 교묘하게 숨어 있는 이상한 녀석들을 잘 식별해내야 한다. 인간적인 마음에서 재빨리 격리하고 싶은 생각이 자꾸 들더라도 참고 또 참으면서 추수 때를 기다리는 기다림 속에서 그들이 양들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주의를 기울이며 슬기롭게 처신한다.

목자의 근본은 양들을 아끼고 잃은 양을 찾으려는 마음이다. 목이 말라 물을 좀 더 마시려다 어느새 뒤처졌거나 감당하기 어려운 가시덤불을 피하느라 발을 헛디뎠거나 아니면 친구들을 보지 않고 잠시 들에 피어난 꽃을 바라보느라 한눈을 팔았거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주인은 양을 찾으려 애를 쓸 것이다. “잃었던” 양을 찾아 온갖 고생을 하며 헤맨 목자는 우물가에서 울고 있는 그를 발견할 때 “나는 네가 목이 말라 물을 더 마시고 싶어 하는 줄을 몰랐다. 미안하다. 고생했구나!” 할 것이며, 발을 헛디뎌 벼랑 끝에 매달려있는 그를 발견하면 “큰일 날 뻔했구나. 나는 네가 발목이 삐끗하여 미끄러진 줄을 미처 몰랐구나!” 할 것이고, 꽃밭에 혼자 남은 그를 발견할 때는 “쯧쯧쯧! 그래, 이 꽃들이 그렇게 고와 보였구나. 이젠 집으로 가자!” 하며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잃은 것에는 더욱 마음이 쓰이고 소중함이 느껴지는 법이다.

그런데 과연 누가 누구를 찾는 것일까? 양이 주인을 찾는 것일까? 주인이 양을 찾는 것일까? 서로 찾는 것일까? 우리 주님께서는 오히려 “길 잃은 양처럼 헤매니 당신의 종을 찾으소서.”(시편 119,176) 하시며 당신께서 몸소 “길 잃은 양”이 되고 종이 되어 온갖 곳을 헤매며 ‘제발 나를 찾아야 한다!’ 하며 울고 계실지도 모른다.(20190702 *이미지-구글)

2 thoughts on “양의 다리를 부러트리는 목자?

  1. 큰 위로가 됩니다. 신부님.

    그 아이 속에
    제 모습이 있다는 걸

    놓쳤습니다.

    좀 더 지혜롭게
    해결할 방법.

    계속 연구해 보고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 “~했구나! (그랬구나)” 위로 받는 이 따듯한 말 한마디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그랬구나” 공감하며 위로해주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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