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시기를 지내는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서시어”(요한 20,19.26), 우리의 중심이 되어,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듣는다. 지난주 예수님께서 “나는 ~이다.”라는 식으로 당신을 선포하시는 대목 중 “나는 착한 목자다.” 하는 말씀을 들었던 교회는 오늘 부활 제5주일을 맞아 “나는 참포도나무”라고 하시는 이른바 예수님의 자기 선언에 관한 내용 하나를 더 듣는다. 당신을 “참포도나무”로 선언하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지”라며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어떠한 신분인지도 밝혀주신다.
결국, 오늘 복음의 주제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일치함이며, 중심 어휘들은 머무르기, 열매, 가지치기 등이다. 예수님 안에 머물러 그 일치를 살아가는 하느님 백성과 그 백성이 맺는 애덕의 열매에 관한 이야기이며, 예수님 안에 머무르고 살아야만 열매를 맺게 된다는 내용이다. 최후 만찬 뒤의 고별사(요한 13,31-16,33)를 담은 내용 중 한 대목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참포도나무”이신 당신과 가지에 해당하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지녀야 하는 이상적인 관계, 곧 당신을 따르는 공동체가 어떠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를 밝히신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 공동체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된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
요한복음 13장 31절부터 16장 33절에 이르는 부분을 통상 예수님의 ‘고별연설’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영광의 주님이시며 부활하시어 살아계시는 주님의 말씀이 담겼다. 그중 한 대목인 오늘 복음은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포도나무는 유다인들에게 올리브나 밀과 함께 이스라엘 땅에 잘 맞고 아주 친숙한 대표 작물이다. 특히 포도나무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을 얻게 하시는”(시편 104,15) 작물이다. 팔레스티나 땅에서 늘 재배되었던 포도나무는 유다인들의 좌식 생활과 문화, 그리고 풍요롭고 기쁜 삶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포도나무를 이스라엘 민족과 주님의 백성에 견주는 이미지로 자주 활용했다. “당신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하나를 뽑아 오시어 (약속의 땅에서)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습니다.”(시편 80,9)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이사 5,4) “나는 좋은 포도나무로, 옹골찬 씨앗으로 너를 심었는데 어찌하여 너는 낯선 들포도나무로 변해 버렸느냐?”(예레 2,21) 등과 같은 구절이 좋은 예이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심으신 이스라엘의 참포도나무이심을 선포하시고, 동시에 주님의 소유인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을 당신께서 대표하신다고 말씀하시면서 아버지를 그 포도나무를 재배하시는 “농부”라 지칭하신다. 예언자들은 이미 이러한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하느님께서 심으신 선택된 좋은 포도나무들, 곧 하느님의 백성이 못된 열매를 맺는다며 하느님께서 한탄하신다고 자주 지적하기도 하였다.(참조. 이사 5,1-7 예레 2,21;5,10;6,9;8,13) 농부이신 하느님께서는 한때 무성했으나 메마르고 황폐해진 포도나무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분이시고(참조. 호세 10,1 에제 15,1-8), 하느님의 백성들은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제발 당신 포도나무를 찾아오시어 굽어살펴 주시라고 기도한다.(시편 80,13-17)
이스라엘 백성의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그 자체로 실패와 좌절, 타락과 고통이라는 하느님 백성의 온 역사를 담은 포도밭이시다. 동시에 예수님은 스스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로 당신 백성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시는 신실한 사랑이 되시고, 좋은 나무, 십자 나무 위에 달리시어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으시는 포도나무이시다.
『주님께서 “나는 참포도나무요(요한 15,1)”라고 하셨을 때에 이는 의심할 바 없이 “나는 좋은 포도나무로, 옹골찬 씨앗으로 너를 심었는데 어찌하여 너는 낯선 들포도나무로 변해 버렸느냐?(예레 2,21)”라는 말씀에서와 마찬가지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내가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이사 5,4)”하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354~430년)』
2.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
예수님은 당신의 공동체인 교회, 바오로 사도가 설파한 대로 “한 몸 안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지만…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되는”(로마 12,4-5 참조. 1코린 12,12-27) 교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1코린 12,27)인 교회라는 포도밭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 하신 그대로이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하나의 나무이며 하나의 수액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그래서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요한 15,5-6) 하신다.
가끔 드센 바람이 부는 환절기에 바람은 부실한 가지와 쓸모없는 가지들을 떨군다. 이는 새로운 가지와 새싹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행여 나의 인생에 어느 가지가 떨어져 나감을 느낄 때 어쩌면 이것이 당신에게 붙어 있는 ‘나’라는 가지에 새 가지와 새싹을 준비하시기 위한 섭리일지 모른다.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풍성한 열매를 맺으라고 밭을 일구고, 모진 바람을 보내시어 나뭇가지들을 다듬어 죽은 가지들을 손질하고 잘라서 밖에 버리신다. 나무는 수액과 양분이 소모되지 않도록 열매가 무르익을 때까지 여러모로 손질해 주어야 하고, 가지치기해주어야만 탐스럽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농부가 가지치기를 할 때 가지가 잘린 곳에서 나무는 잘린 곳이 낫고 상처가 아물 때까지 눈물을 흘리며 운다. 나무에게 가지치기는 고통스러운 작업이고, 많은 가지는 잘려나가 밖에 버려지고 말라 결국 불쏘시개감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께서 그런 가지치기를 하셔야만 하고, 많은 가지가 당신에게서 잘려 나가는 아픔과 고통을 당신 몸으로 지셔야만 한다는 것을 밝히는 데에 주저하지 않으신다. 수난 전날 “밤”에 배반자 유다가 예수님께서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난 다음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요한 13,27-30) 하는 대로, 예수님의 공동체가 배반자 없이 깨끗하게 된 것은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 하는 대로, 결국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말씀은 공동체를 정화하는 심판이며 분리이고 가지치기이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가지는 나무이신 예수님께 머물러 붙어 있어야만 한다.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 머물러야 하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도록 해야 한다.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하고 말씀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셔야만 한다. 우리말의 오늘 복음에서 ‘머무르다(메노, μένω, méno, 머무르다, 붙어 있다, 남다, 지내다, 영어 : to remain, to abide, to stay)’라는 동사는 무려 여덟 번이나 반복된다. (*이 말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을 믿는 이들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말씀”이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인 ‘머무르다’는 5,3;6,56;8,31;14,10.17;15,4-10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찬미와 찬송을 통하여 하느님을 가꾸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가꾸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가꾼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더 나아지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하는 가꿈이라는 것은 그저 흠숭일 뿐 갈아엎는 경작이 아닙니다.…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가꾸시는 것은 우리를 더 낫게 하시는 것입니다.…그분께서 우리를 가꾸시고 갈아엎으시어 우리 마음으로부터 모든 사악함의 씨앗들을 제거하시고, 우리 마음을 갈아엎으신 그곳에 거룩한 열매들을 기다리면서 당신 말씀을 심으시고 당신 계명의 씨앗들을 심으시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354~430년)』
3.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을 말씀하신다. ‘머무르다’는 그저 함께 지내거나 함께 사는 것만을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예수님과 함께 끊임없이 소통하고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 계속 노력하는 과정을 아우른다. ‘머무르다’는 단순히 있는 그대로 어떤 수동적인 상태에서 한 부분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연결이 단단한 믿음으로 굳건한 것을 말하며, 그러한 믿음 안에서 그 사랑이 성장하고 발전해가도록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역동성이다. ‘머무르다’는 예수님 안에 머물러 그분의 생명을 누리고 함께 살려고 그분을 따라가는 것이며 이를 위해 부단히 그분의 말씀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바로 이를 위해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하느님이신 아버지와 통교하기 위한 필수적이고 절대적인 조건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5,19)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5,30)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예수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9) 하신 그대로이다.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가지는 그분 없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그분의 가지가 된 우리 모든 가지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 나무로부터 잘려나가 밖에 버려지고 말라 불에 던져질 가지들이다. 그분의 양분과 수액으로 그분께 붙어 머무르면 열매를 맺을 것이고 아버지의 가지치기를 통해 더욱 풍성하고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예수님 안에 머물고,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이야말로 기도의 온전한 의미이다. 사랑의 구세주이신 분의 현존을 떠나면 우리의 삶이란 열매 없는 무거운 짐이요, 헐떡이는 굶주림, 그저 말뿐인 정의, 이겨내야 할 폭력, 끝내야 할 전쟁, 제거되어야 할 외로움이 되고 만다.(헨리 나웬)』
예수님의 말씀에서 가지치기라는 것이 포도밭의 주인이시고 농부이신 하느님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임도 생각하게 된다. 분리하고 잘라내며 손질하는 가지치기는 교회의 일이 아니다. 더구나 가지들의 일은 더더욱 아니다. 오직 농부이신 하느님만이 하실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뭇잎이 울창하고 보기에 좋은 나무요 가지들이라고 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않은 채 계절이 바뀌어 단풍과 낙엽만을 만들 위험에 처한 나무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오직 하느님 말씀의 힘과 다스림이 믿는 이들 안에 이루어지도록 해야만 한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 하는 대로 “말씀”만이 교회와 공동체를 “깨끗하게” 정화하고,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로운”(히브 4,12) 칼이어서 마른 가지를 잘라내며, 말씀만이 나무를 자라게 하는 수액이어서 풍성하고 탐스러운 열매를 마련하신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가지치기를 본다. 나무에서 가지가 떨어져 나가고 나무에 붙어 있을 수 없으며, 결국 말라서 더는 가지로 남을 수 없어 열매를 맺기는커녕 포도밭 울타리 안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보곤 한다. 이러할 때는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접붙여져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로서, 더는 “하느님께서…베푸시는 사랑을” 알지 못하고 또 믿지 못하게 될 때이다.(참조. 1요한 4,16) 사랑 안에 살기보다는 미움 안에 살고,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믿고 살기로 선택할 때이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더는 그리스도의 지체에 속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때이다. 주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하셨으니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어 우리를 살게 하시고 우리 안에 당신의 생명이 있도록 하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성체성사의 은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때이다.
“나는 참포도나무”라고 선언하신 주님께서는 당신만을 믿고 당신 안에 살며 그 모든 것이 은총임을 강조하신 뒤, 오늘 복음의 말미에서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요한 15,8) 하신다. 그분 안에 머물러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은총이고, 성령이라는 수액,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살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양분의 덕이다. 그렇게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주님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우리 자신, 우리의 편안함, 우리의 편협하고 방어적인 공간에서 벗어나기 위한 용기를 찾기 위해, 다른 이들의 필요에 소중한 도움을 주기 위해,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 증거를 폭넓게 펼치기 위해, 주님과 함께 머무르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다른 이들의 필요에 투신하는 이러한 용기는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과 그분의 성령께서 우리의 역사와 함께해주신다는 확신에서 생깁니다. 사실 그리스도와의 친교에서 샘솟는 가장 성숙한 열매들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마지막까지 자기희생을 통해 형제들을 사랑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입니다. 믿는 이의 사랑의 역동성은 전략의 결과가 아니고, 외적인 압력, 사회적·이념적 요구에서 생기는 것도 아니며, 예수님과의 만남과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데서 나옵니다. 우리에게 그분은 우리가 수액을 흡수하는 포도나무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꼴찌가 첫째 되게(마태 20,16) 하며, 자신을 희생하고 살아가는, 전혀 다른 방식을 사회 안에 전하기 위한 “생명”이십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8년 4월 29일, 삼종기도)』 아멘!
잘려나가는 가지가 되지 않도록 말씀에 귀기울이고 말씀에 따라 갈 수 있는, 작은 열매라도 맺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