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무덤 안장까지의 여정을 따라왔다. 이제 우리는 오늘 밤 인간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불가능하며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 앞에 서게 된다. 이 거룩한 파스카 성야의 이러한 사건 앞에서 우리 각자는 우리가 들은 이야기를 두고 신앙과 불신의 갈등 속에서 의심스러운 심장의 박동을 체험한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을 무덤에 모시고 난 사흘 뒤 제자들이 느꼈던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죽음은 결국 죽음일 뿐이고, 구체적인 생명과 모든 관계, 그리고 겉으로 비치는 모습과 사랑의 끝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죽으면 그 죽음과 함께 모든 것도 따라 죽고 만다.
1. “안식일이 지나자”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죽음은 다른 복음과 달리 예수님의 죽음이 그저 실패의 결과일 뿐이고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보인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설파하신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왔다는 말이냐고 되묻는 듯하다. 예수님께서 낫게 해 주시고, 갇힌 것에서 풀어주시며, 더러운 영에서 해방하여주신 이들이 많았지만 이제 예수님의 죽음으로 예전으로 돌아가 병든 이, 갇힌 이, 불행한 이들이 여전한 듯한 현실을 보는 것만 같다. 많은 이들을 사랑하셨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셨음에도 이제 그 모든 이들마저 도망가고, 간신히 지었던 공동체라는 오두막이 산산이 부서지고 무너진 것만 같다.
이 거룩한 밤의 복음은 “안식일이 지나자”(마르 16,1)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남녀 제자들은 그동안의 삶이 허망했고 그 어떤 구석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제자 중 몇몇, 예를 들어 맏이로 사랑받았던 베드로나 마리아 막달레나 같은 이에게는 애틋하게 살았던 그동안의 모든 것이 끝나버렸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 거룩한 “안식일”은 악과 악마의 힘이 여전히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느끼는 날이었으며, 나아가 모든 희망의 불꽃이 꺼졌다고 느낄 만한 날이었다. 극단적인 침묵의 안식일이었다. 복음사가 마르코는 더 전할 말도, 이야기도 없다는 듯이 담담하게 자기 복음의 마지막 장을 그렇게 시작한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무덤에 안장하는 것으로 과연 모든 것이 끝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이 실패와 모순, 이율배반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동고동락의 삶은 그 자체로 예수님과 함께 생명을 공유하고 나누는 삶이었다. 그 자체로 의미가 가득하며 결코 꺼질 수 없는 사랑의 삶이었다.
2. “웬 젊은이”
“안식일이 지나고, (해가 지고 나서 몇 시간 동안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그리고 몇몇 여제자들)는 무덤에 가서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마르 16,1)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한 여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그분을 어디에 모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마르 15,47)는 이들이다. 그들은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마르 16,2) “해가 떠오를 무렵”이라 한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루카 1,78) 태양,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니 너희는 외양간의 송아지들처럼 나와서 뛰놀리라.”(말라 3,20) 하신 의로움의 태양이시다. 무덤으로 가는 여성들은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줄까요?”(마르 16,3) 하며 무덤을 보호하고자 입구를 막은 돌에 생각이 미친다. 그러나 무덤 가까이에 이르러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 돌은 매우 큰 돌이었다.”(마르 16,4) 누구에 의해서인지, 또 어떻게 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무덤이 열리고 개방되어 있었다. 그래서 여인들이 “무덤에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하얗고 긴 겉옷을 입고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깜짝 놀랐다.”(마르 16,5)
시체를 볼 것으로 기대했던 여인들이 어떤 “젊은이”를 본다. 시신을 감싼 천을 볼 것이라 생각했던 여인들이 어떤 젊은이가 입은 “하얗고 긴 겉옷을” 본다. 무덤 바닥에 눕혀져 있을 주검을 볼 것이라 여겼던 여인들이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본다. 누구의 오른쪽일까?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시편 110,1) 하는 시편 말씀처럼 누군가가 그 젊은이를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다.
3. “깜짝 놀랐다”
여인들은 “깜짝 놀랐다.”(ἐξεθαμβήθησαν, exethambéthesan) 마르코는 자기 복음에서 놀라는 상황을 묘사하면서 적어도 4가지 단어를 사용한다. 여기에서 놀라움은 공포로 인한 놀라움을 가리킨다. 이에 그 “젊은이”는 같은 동사를 사용하여 여인들에게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마르 16,6)라고 말한다. 상황을 설명하는 소리, 하느님 사자使者의 음성, 표현할 길이 없는 여인들의 목격을 소리 내어 읽어내는 목소리이다. 이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음성이고,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신 주님의 음성이며, 하느님의 손으로 하늘에 오르시면서 이제와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의 음성이다.
그 음성은 무엇보다도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초대의 음성이다. 우리는 두려움이 많은 존재이고 두려움의 유혹을 받는 존재이다. 사실 두려움은 대부분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고 우리 스스로 키워가는 상상력에서 태어난다. 성경에서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창세 3,9-10) 하며 들려주는 바에 따를 때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설 때의 첫 느낌이 ‘두려움’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우리 교회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아니 사실 아직도 그런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한번 깊이 생각해볼 만하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갖는다. 가깝게는 우리의 일상과 가족 안에서부터 시작한 갖은 두려움이 태어나고 자라며 끝도 없이 계속된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추기고 우리 자신의 비겁함과 무능력을 정당화하거나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두려움을 스스로 만들었다. 두려움은 항상 책임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며, 내적인 양심 성찰의 회피에서 발생하기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생명과 미래, 그리고 땅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히브 2,15)이 생겨나고 악과 죄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은 그저 숨기려고만 드는 오만함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여인들이 무덤에서 만난 “젊은이”는 여인들이 무덤에서 만난 상황을 해석하여 주면서 “놀라지 마라”, “두려워하지 마라” 한다. 이것이 살기 위한, 다른 이들과 함께 살기 위한 조건이다. 함께 살면서 믿게 되고, 믿으면서 함께 희망하게 된다.
말로 표현이 안 되는 것을 믿는 것은 수치와 모욕의 십자가가 아버지의 오른쪽에 있음을 믿는 것이고, 십자가의 주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되살아나셨음을 믿는 것이다. 금요일 저녁나절에 마리아 막달레나와 여인들이 “그분을 어디에 모시는지 지켜보았던” 그 장소는 이제 그 장소가 아니다. 비어 있는 곳이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마르 2,20)이라 하신 그때가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께서 아버지의 권능으로 무덤에서 다시 일으켜지시어 부활하신 분으로서 아버지와 함께 사시는 때이다. “제자들과 베드로에게…‘예수님께서는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 16,7) 하고 알려야 할 때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하신 분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따랐다.”(마르 1,18) 하는 대로 모두가 단순하게 예수님을 따라야만 한다. 이때의 ‘따르다’, ‘ὀπίσω μου, opíso mou’(참조. 마르 1,17.18;2,14-15;8,33.34)는 주님께서 우리를 앞서가시며 우리의 길을 열어주심을 믿는 조건 없는 따름이다.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의 오른쪽에 있기까지 그분 뒤에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젊은이는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서 뵙게 될 것입니다.”(마르16,7) 한다.
4.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
갈릴래아에서 예수님을 “뵙게 될 것”이라는 7절로 이 거룩한 밤의 복음이 끝나지만, 이어지는 구절을 놓치면 안 된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젊은이가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렇게 일러라”(마르 16,7) 하고 당부하였는데도 그 말을 따르지 않고,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마르 16,8)라는 구절을 추가한다. 어쩌면 이 구절이 마르코 복음사가의 복음 본래의 마지막 절이다. 학자들은 이렇게 복음을 마무리했다고 보이는 마르코 복음사가의 결론이 너무나 비극적이고 소극적이며 실망스러운 결론이라고 생각하여 후대 사람들이 적어도 3가지의 다른 결론(참조. 마르 16,9-20)을 추가했다고 본다. “달아나고…덜덜 떨고…겁에 질리고…두렵고…말도 못하고…”라는 것이 원래의 마지막 구절로 보는 것이 과연 그렇게까지 어려운 것일까?
이 구절은 비단 당시의 여성 제자들을 기록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구절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두려워한다. 주님의 부활 앞에서 과연 우리는 제대로 놀라고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가? 우리가 이러한 두려움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외치면서도 우리의 믿음이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며 교만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을 생각하고 우리 교회를 생각한다. 두려움에 함몰되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조차도 말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 자기가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 믿음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고 “놀라지 마라…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께서는 되살아나셨다.”를 외쳐야 한다. 아멘!
기쁜날
제
안에
두려움이 걷힌 날.
되살릴 수 있는 그 분은
어떤 모습으로 제게 다가오실까요?
귀한 복음 말씀
감사합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낸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사랑의 부활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