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4,1-15,47(주님 수난 성지 주일 ‘나’해)

“그렇다.”(마르 14,62) Photo by Daniel Schludi on Unsplash

성주간聖週間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 한 주간을 말한다. 과거에 성주간을 예수 그리스도 생애의 마지막에 일어난 사건을 기억하고 묵상하며 주님 부활을 맞이하도록 이끌어 준다는 식으로 이해해 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성주간 동안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특별한 전례가 없으므로 그렇게 이해하기보다는 성삼일구세사의 모든 역사와 주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의미로, 교회의 전례에서 성삼일이 전례의 정점을 이룬다는 식으로 이해해야 바람직하다.

오늘은 성지를 축복하고 행렬을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재현하고,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개선을 예고한다. 함께 거행하는 성지 축복과 행렬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종려나무나 올리브 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한 데서 비롯한다. 이 행사는 4세기 무렵부터 거행되어 10세기 이후 서방 교회에 널리 전파되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거행되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 예식에서 ‘따름노래 1’은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께서 들어가신다.”(시편 24,7)를 노래하는데, 옛 성지주일 전례에서는 이와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사제가 닫힌 성당 문 앞에서 십자가 지팡이로 문을 두드리고, 이에 따라 문이 열리는 과정이 있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하늘의 문을 두드리는 것을 상징하였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문, 하늘의 문을 여셨는데, 오늘날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세상의 문밖에 서서 세상의 문을 열라고 두드리신다. 또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열라 하시면서 사람들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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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가 기록한 예수님의 수난 과정을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 기간에 예루살렘에 입성(마르 11,1-10)하신 때로부터라고 생각한다면, 마르코복음의 수난기는 복음 전체의 5분의 1이나 되는 분량에 해당한다. 이는 복음의 내용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이야기라 할 수 있고, 예수님의 수난을 두고 이루어진 많은 증언, 무엇보다도 자주 언급되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증언이 담겼다. 그렇지만 그 제자들은 예수님의 체포 순간에 모두 하나같이 도망을 치고 만다.

마르코에 의한 예수님의 수난기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전반부는 예수님이 잡히실 때까지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함께 지내신 이야기(마르 14,1-42)이며, 후반부는 잡히신 예수님을 두고 진행된 사건들과 십자가형의 집행,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신 과정(마르 14,43-15,47)이다. 방대한 이 과정을 모두 해설하는 것에는 지면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므로 수난기에 담긴 복된 소식, 곧 복음을 강조하는 선에서 수난기의 강해를 제한한다.

1. 십자가의 길

예수님의 수난기는 예수님을 향한 우리 신앙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예수님의 수난기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1코린 1,23)일 수밖에 없는 십자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어찌 보면 실패로만 보이는 예수님의 삶을 직시하게 한다. 예수님의 수난기에서는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주신”(사도 10,38) 분,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을 베푸시며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마르 1,27) 하였던 분,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 1,37) 하며 사람들이 칭송하고, 말과 행동에서 능력 있는 예언자로 받아들여진 분, 당신께로 모든 이를 이끌어 “앞서가는 이들과 뒤따라가는 이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마르 11,9) 하고 외치던 분, 참 예언자요 메시아로서 당신 주위에 공동체를 이루신 분…, 바로 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생각할 수도 없는 처절한 실패자로 남는다. 이 모습에서 복음을 성실하게 읽는 모든 이, 예수님의 세례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따랐던 모든 이들은 깊이 흔들리며 당황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능력을 요구하였던 이들, 예수님의 능력이 낫게 하시고 살려주신 이들,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마르 15,31) 하며 비아냥거린 이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하셨던 그 나라가 바야흐로 바로 여기에 있는데, 그 예언을 들었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 하는 것처럼 왜 그분은 그렇게 잠잠히 계시는 것일까? 수도 없이 그분을 스승님이라 부르고 예언자라 칭송하며 메시아요 구원자라고 선언했던 이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추종자요 동조자였던 모든 이들이 사라졌고, 모든 이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은 예수님만이 자신을 방어할 길이 없는 무력한 모습으로 홀로 계신다.

한 가지 더, 또 다른 질문은 훨씬 더 근본적이라 하겠다.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 동안 항상 함께 계신 듯이 보였고,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아빠”라고 불렀던 하느님, 몸소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르 1,11)이라 하시고 예수님의 변모 때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신 하느님, 예수님께서 평생 의지하고 그분의 뜻만을 쫓으려 했던 하느님께서는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바오로 사도가 “나무에 매달린 자는 모두 저주받은 자다.”(갈라 3,13 신명 21,23) 한 것처럼 “우리를 율법의 저주(이스라엘의 법과 종교적인 권위)에서 속량해 주시기 위해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신”(갈라 3,13)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 주님께서는 인간 사회에 해악을 끼치므로 그 인간 사회에서 격리되어야 마땅한 이들이 받아야만 하는 극형을 우리를 위해 받아야만 하셨던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인간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모습으로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리신다.

어찌 보면 수수께끼 같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앞에서 이 모든 질문에 답하고 이를 이해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정확하게 ‘십자가의 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여정,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던”(히브 5,7) 예수님의 어두운 길은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하는 예수님의 기도로써만 풀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원치 않는 반대의 징표들이 나타나고 실제로는 실패라고만 보일지라도 결코 아버지께서 당신을 저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끝까지 당신과 함께 남으실 것이기에 아버지를 향한 온전한 신뢰를 절대 잃지 않으셨다는 사실 안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2. “메시아요?그렇다

마르코가 전하는 예수님의 수난기 안에서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 즉 온 이스라엘의 종교적 권위를 지녔다는 모든 이들이 “대사제”라는 이의 “저택”에 모여서 예수님을 두고 벌인 그 현장에서 예수님께서 몸소 밝혀주신 계시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못된 이들이 예수님의 혐의를 입증할만한 증인을 물색하지만 “찾아내지 못했으며”, 예수님을 두고 서로 “들어맞지 않고” 모순되는 “거짓 증언”들만 쌓인다. 그때 “대사제가 한가운데로 나서서”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 하고 묻는다.(마르 14,61) 대사제의 이 발언은 그리스도-메시아, “찬양받으실 분”(=하느님)의 아들임을 확인하고자 하는 결정적인 질문이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는 고백을 베드로에게서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마르 8,30) 그러나 여기서 대사제의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그렇다.”(마르 14,62) 하신다. “그렇다”라고 번역하지만, 원래는 “나는 있는 나다.(ἐγώ εἰμι, Egó eimi)”(창세 3,14) 하시며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밝혀주신 그대로이다. 예수님께서 완전하게 당신을 드러내시는 충만한 계시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처음부터 세대들을 불러일으킨 이, 나 주님…시작이고 마지막…내가 너의 하느님”(이사 41,4.10)이심을 밝히시는 대목이다. 예수님을 향한 교회의 믿음을 담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구절로 시작한 마르코복음이 이제 “그렇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완성된다.

몸소 당신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밝히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르 14,62 시편 110,1 다니 7,13) 하시면서 일찍이 다니엘 예언자가 보았던 환시(다니 7,13-14)와 예언을 이용하여 말씀을 이어가신다. 사람들에게 붙잡히시고 갇히셨으며 끔찍한 죽음을 선고받으신 분께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마르 13,26 다니 7,13) 하시면서 당신을 밝히시고 심판을 받으신 분이 마지막 날의 심판관이 되실 것을 언명하신다. 예수님의 이 자기 계시는 잠시 후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마르 15,39) 하는 대목에서 다시 한번 드러난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 예수님의 뜻에 의해 감춰졌고 공개적으로 선포되지 않았지만, 이 수난과 죽음의 순간을 통해 완전히 계시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신 분, 십자가 밑에 선 이방인이 고백한 분, 12세기의 한 수도자가 『그 어떤 화려함도 없이, 아름다움도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분진리로 흠숭을 받으신다.』라고 노래하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3. 성체성사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렇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이해하고, 당황함이 없이 그분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행하셨던 과정(참조 마르 14,17-25)을 한 번 더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이 다가올 당신의 죽음을 그저 우연한 사건이나 하느님께서 그렇게 원하시므로 어쩔 수 없이 맞아야 할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배려하시면서 그러한 과정을 밟으셨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당신 자유로 당신의 최후를 맞이하신다. 주님께서는 모든 일이 발생하기 전에 피하실 수도 있었고, 일이 진행되는 과정 안에서도 당신을 대하는 적대자들 앞에서 그들의 도발을 멈추게 하거나 십자가형을 면하실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하실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에 충실하셨으며, 설령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는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뜻이 정확하게 이루어지도록 하신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요한 13,1)하는 길이 바로 그 길임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한 자유로 모든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그렇게 당신의 삶과 존재를 마감하신다. 이 모든 것을 확실하고 분명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앞서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미리 알려주셨고, 이 모든 일을 알아들을 수 있는 본질적인 차원을 담아 최후의 만찬을 지내셨다. 당신의 생명이 부서지듯이 쪼개어지고 나누어지는 빵, 끔찍한 죽음으로 흘리게 될 당신의 피처럼 잔에 담긴 포도주를 나누어 주신 것이다.

만약 마르코 복음사가가 자기 복음을 제자들이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 1,18)라는 구절로 기록하기 시작했더라면,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마르 14,50)라는 구절이 수난기의 중심 문장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만하다. 십자가의 어리석음은 끔찍하고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분의 생명을 기억하는 성체성사의 은총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제자들을 다시 모이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의 공동체는 어둠과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역사를 넘어 목적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주님께서 이 모든 시련을 넘어 온전한 자유로 사랑을 살아내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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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성지 주일의 행렬 안에서 우리는 원래의 그 행렬이 지녔던 의미를 감소하거나 축소하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저 손에 올리브 가지나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몇 걸음을 걷는 것이 아니라, 진짜 뭔가 중요한 우리의 행보를 시작하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열심히 행진하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행렬에 이어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정점을 이루는 그 사건의 의미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바로 하나의 질문이자 도전이요 초대입니다. 즉, 당신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가 골고타 산에까지 이어지는 그 걸음걸음을 예수님과 함께 걸으려 하는가? 당신이 과연 당신의 하느님께서 어디에서 당신 걸음을 멈추실 것인지 보고 싶은 것인가? 당신이 과연 그분께서 계시고자 하시는 곳에 나도 함께하겠다고 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과 그에 따른 결정, 그리고 생각들만이 당신의 부활절 기쁨이요 파스카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성지 주일로 참으로 거룩하고 위대한 성주간에 들어섭니다. 이 주간은 참으로 ‘위대한주간입니다. 왜냐하면,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께서 『이 주간은 우리를 위하여 절대 없어지지 않을 진정한 선익이 구별되는 주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주간은 우리에게 죽음으로 물들었던 생모든 악을 씻어버리고, 모든 장벽을 허물어뜨리며, 죄의 종살이를 으깨어 기나긴 전쟁을 끝내는 주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주간은 평화의 하느님께서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모든 것을 평화로 이끄시는 주간이기 때문입니다.』하고 말씀하신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오늘 전례는 주님 파스카의 서곡입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순간인 동시에, 예수님의 온 생애가 향했던 바로 그 순간이며, 온 세상 역사의 중심이 되는 순간입니다.(까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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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7가지 상징

부활 대축일 전 마지막 준비 주간의 시작 날

다른 주일 미사와는 다른 특별한 내용들

주님의 수난을 더욱 깊이 묵상하고, 다가오는 파스카 신비의 아름다움을 더욱 깊이 새기기 위한 것

1. 행렬로 시작하는 미사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렬의 모방

교회 밖에서 안으로의 행렬(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교회가 칼바리 산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을 따라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기리며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에 동참하는 미사를 드리고자 하는 것)

2. 나뭇가지를 드는 행렬

“겉옷이나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마태 21,8)

예수님의 발 앞에 우리의 마음을 깔아 그분께서 우리 안에 깊이 들어오시도록 하고자 한다.

3. 사제의 붉은 색 제의

피의 색, 사랑, 불, 열정, 희생의 피를 상징

수난 주일, 성 금요일, 예수님의 수난과 관련된 날, 성령 강림절, 신앙을 위해 죽은 이들을 기념하는 색

4. 가려진 성상들

1년 중 가장 성스러운 시기에 교회의 아름다운 것, 심지어 십자가까지도 가린다. 오직 칼바리의 예수님 고통에 집중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감각을 절제하고 부활절을 향한 갈망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이다. 본당만이 아니라 가정 교회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유익한 활동이 될 수도 있다.

5. 긴 복음인 수난기

초대 교회에서는 매주 주일의 전례문들이나 독서들이 그렇게 길었다. 한 주에서 다음 주까지 계속되는 율법과 예언서로 나뉜 두 부분 성경 읽기가 포함되었었다.

6. 신자들과 함께 읽는 수난기

수난 주간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특별한 시기이다. 한 주간 내내 계속되는 주제는 예수님의 지상 여정 중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함께 하도록 하는 초대이다. 신자들 전체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우리 인간의 죄가 무엇이었는지를 상기하고, 그때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우리이지만 우리 죄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자 함이다.

7. 집에 가지고 돌아가는 성지 가지

대부분은 우리 구원의 표징이요 신앙의 표징인 십자가 곁에 소중히 간직하였다가 다음 해 사순시기를 시작할 때 다시 우리 머리와 이마에 얹는 재가 될 성지 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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