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교서: 요셉 성인의 보편 교회의 수호자 선포 150주년 기념(2020년 12월 8일)
「아버지의 마음으로」(Patris Corde)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는 네 가지 복음서 모두에서 “요셉의 아들”(루카 4,22, 요한 6,42: 마태 13,55 마르 6,3 참조)이라고 불리는 예수님을 요셉이 얼마나 사랑하였는지를 보여 줍니다.
요셉을 강조하는 두 복음사가, 마태오와 루카는 우리에게 요셉에 대하여 그다지 많은 것을 알려 주지 않지만, 그것으로 요셉이 어떤 아버지였고, 하느님의 섭리로 요셉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이해하는 데에는 충분합니다.
우리는 요셉이 보잘것없는 목수였고(마태 13,55 참조) 마리아와 약혼하였다는(마태 1,18; 루카 1,27 참조)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고, 율법으로(루카 2,22.27.39 참조) 그리고 네 가지 꿈으로(마태 1,20; 2,13.19.22 참조) 그에게 계시 된 하느님의 뜻을 언제든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나자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고 힘든 여정 뒤에 요셉은 메시아가 외양간에서 태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머물 다른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루카 2,7 참조). 요셉은 목자들과(루카 2,8-20 참조)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마태 2,1-12 참조) 목격하였습니다. 이들은 각각 이스라엘과 이교도를 대표합니다.
요셉은 용기 내어 예수님의 법률적 아버지가 되고, 천사가 그에게 알려 준 대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창세기에 나온 이야기에서 아담이 그러하였던 것처럼(2,19-20 참조) 고대 사람들은 사람이나 물건에 이름을 붙여 주면서 관계를 맺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고 사십 일이 지나, 요셉과 마리아는 성전에서 주님께 그 아기를 봉헌하였고,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에 관한 시메온의 예언을 듣고 놀랐습니다(루카 2,22-35 참조). 요셉은 헤로데에게서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이집트에서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마태 2,13-18 참조). 본국으로 돌아온 다음 갈릴래아의 작고 알려지지 않은 고을인 나자렛에서 숨어 생활하였습니다. 나자렛은 요셉의 본향인 베들레헴에서, 그리고 예루살렘과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자렛에 관하여 “예언자가 나오지 않았고”(요한 7,52 참조), 실제로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요한 1,46 참조)라고 말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순례를 하는 길에 요셉과 마리아는 열두 살 된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애타게 찾아다니다가,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예수님을 찾아내었습니다(루카 2,41-50 참조).
교황 문헌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 못지않게 마리아의 배필인 요셉만큼 자주 언급된 성인은 없습니다. 저의 선임자들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전해진 많지 않은 정보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심화시켜 구원 역사에서 요셉의 핵심 역할을 더욱 온전히 이해하고자 하셨습니다. 복자 비오 9세 교황께서는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하셨고, 가경자 비오 12세 교황께서는 “노동자들의 수호자”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구세주의 보호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앞둔 이의 수호자”인 요셉 성인에게 간구합니다.
복자 비오 9세 교황께서 1870년 12월 8일, 요셉을 보편 교회의 수호자로 선포하시고, 저는 150년이 지난 지금, 저마다의 인간적 상황과 매우 밀접한 이 특별한 인물에 대하여 여러분과 저의 개인적인 묵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마태 12,3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의 열망은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이 이어지고 있는 지난 몇 달 동안에 더욱 커졌습니다. 우리를 강타한 이 위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 삶은 다른 평범한 이들, 우리가 이따금 잊고 지내는 이들과 함께 엮여 있고 그들에게 도움받는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신문이나 잡지의 주요 소식들 또는 텔레비전 최신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이들은 아니지만, 오늘날 이들이 우리 역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써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의사, 간호사, 상점 주인, 종업원, 환경미화원, 간병인, 운수 종사자, 치안 유지에 종사하는 이들, 자원봉사자, 사제, 남녀 수도자 그리고 다른 많은 이가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그 누구도 혼자서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날마다 많은 이가 인내심을 발휘하여 희망을 전하고 극심한 공포가 확산되지 않도록 애쓰며 함께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많은 아버지, 어머니, 조부모, 교사 들은 자녀들에게 일상의 사소한 방법으로 이 위기를 받아들이고 대처하며, 이 위기에 우리의 일상생활을 적응시키며 앞을 바라보고 기도하도록 힘을 실어 줍니다.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하여 많은 이가 기도하고 희생하며 간청합니다.” 주목받지 않고 날마다 신중하게 자신의 존재를 숨기며 살아가는 요셉 안에서, 우리는 저마다 곤경에 놓일 때의 중재자, 지원자, 안내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은 숨겨져 있거나 그늘진 곳에 있는 이들이 구원 역사에서 비할 데 없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그들의 공로에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1. 사랑받는 아버지
요셉 성인의 위대함은 그가 마리아의 배필이었고 예수님의 아버지였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로써 요셉은,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이 “구원의 모든 계획을 위하여”라고 말한 것처럼 자신을 내어 맡기었습니다.
성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요셉이 “강생의 신비와 구속의 사명을 위하여 자기 삶을 희생하면서” 부성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었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요셉은 성가정에 대한 자기의 법적 권한을 활용하며, 삶과 노동으로써 가족들을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였습니다. 요셉은 가정을 사랑하라는 인간적 성소가 자기 자신, 자신의 마음과 모든 능력을 봉헌하는 초인간적 봉헌, 곧 그의 가정에서 성장하는 메시아를 위하여 기꺼이 내어주는 사랑이 되게 하였습니다.”
요셉 성인은 구원 역사 안에서 자신의 역할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사랑받는 아버지입니다. 이는 요셉 성인에게 봉헌되는 전 세계의 많은 교회, 그의 영성에 영감받아 그의 이름을 따서 설립된 수많은 수도회, 단체와 교회 공동체, 그리고 그를 기리고자 하는 많은 전통적 표현들로 분명히 드러납니다. 수없이 많은 성인과 성녀가 요셉 성인에게 깊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요셉 성인을 변호인이자 중재자로 선택하였고, 그에게 늘 의탁하며 청한 모든 은총을 받았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의 경험에 힘입어 다른 이들에게 요셉 성인에 대한 신심을 굳건히 하라고 권유하였습니다.
모든 기도서에서는 요셉 성인에게 바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매주 수요일과, 전통적으로 요셉 성인을 기리는 3월에는 특별히 요셉 성인에게 기도를 바칩니다.
요셉 성인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는 “요셉에게 가시오.”(Ite ad Ioseph.)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이는 이집트에 기근이 들자 이집트인들이 파라오에게 빵을 달라고 할 때 나온 말입니다. 파라오는 백성들의 요청에 이렇게 답합니다. “요셉에게 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창세 41,55). 파라오가 말한 요셉은, 형들의 질투심때문에 노예로 팔려 갔고(창세 37,11-28 참조), 성경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나중에 이집트의 재상이 된(창세 41,41-44 참조) 바로 야곱의 아들인 요셉입니다.
요셉은,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약속된 대로(2사무 7장 참조) 그 후손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나신 다윗의 후손(마태 1,16-20 참조)이며 마리아의 배필로서, 신약과 구약을 하나로 이어주는 연결 고리입니다.
2. 온유하고 다정한 아버지
요셉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가는”(루카 2,52) 예수님의 모습을 날마다 지켜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하신 것처럼 요셉은 예수님께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팔로 안아 주었습니다. 그는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는 아버지였습니다(호세 11,3-4 참조).
예수님께서는 요셉에게서 하느님의 온유한 사랑을 보셨습니다. “아버지가 자식들을 가엾이 여기듯, 주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을 가엾이 여기십니다”(시편 103[102],13).
요셉이 시편 기도를 바치는 동안,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온유한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는 말이 회당에 울려 퍼지는 것을 분명히 들으셨을 것입니다. 온유한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 자비 당신의 모든 조물 위에 미칩니다.”(시편 145[144],9 참조)
구원 역사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우리의 나약함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께서 우리의 훌륭하고 우수한 부분으로 일하신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 계획의 대부분이 우리의 결점에도 그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나는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주십사고 주님께 세 번이나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2코린 12,7-9).
이것이 구원 경륜의 관점이기에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온유함으로 우리의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악마는 우리의 나약함을 부정적으로 보게 하지만, 성령께서는 온유함으로 우리의 나약함을 드러나게 해 주십니다. 온유함은 우리 안의 나약함을 어루만져 주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다른 이를 지적하고 판단하는 것은 때때로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약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표징입니다. 온유함만이 우리가 고발하는 자의 덫(묵시 12,10 참조)을 피할 수 있게 해 줄 것입니다. 그렇기에 특히 화해의 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화해의 성사는 하느님의 진리와 온유함을 경험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악마도 우리에게 진리를 말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마가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를 단죄하고자 함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우리를 단죄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환대하고 감싸 안아 주며 격려하고 용서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우리에게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루카 15,11-32 참조).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루카 15,24)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말처럼, 그 진리는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만나고 우리의 존엄성을 찾아 주며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우리를 위한 잔치를 마련해 줍니다.
하느님의 뜻, 그분의 역사와 계획은 요셉의 두려움 안에서도 작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두려움, 약점, 나약함 안에서도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또한 요셉은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느님께 우리의 길을 이끄시도록 맡겨 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때때로 우리는 완전한 통제를 바라지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더 큰 그림을 보고 계십니다.
3. 순종하는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당신 구원 계획을 마리아에게 보여 주실 때 하셨던 것처럼, 요셉에게도 당신의 계획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이용하여 그렇게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그리고 모든 고대인 사이에서 꿈은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는 길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신비한 잉태로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이러한 경우, 심지어 돌을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신명 22,20-21 참조)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
첫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는 요셉이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줍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0-21). 요셉은 바로 응답하였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24). 요셉은 순종함으로써 자신이 놓인 극적인 상황을 헤치고 마리아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 요셉은 자기가 직면하게 될 어려움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은 채 주저하지 않고 천사의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마태 2,14-15).
이집트에서 요셉은 집으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천사의 말이 있을 때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세 번째 꿈에 나타난 천사는 그 아기를 죽이려는 자들이 죽었으니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가도 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마태 2,19-20 참조). 요셉은 이번에도 바로 순종하였습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마태 2,21).
돌아가는 길에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마태 2,22-23). 이것이 네 번째 꿈이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이야기로는, 요셉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호적 등록 칙령에 따라 본향에 호적 등록을 하러 나자렛에서 베들레헴까지 길고 험난한 여정을 떠났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고(루카 2,1-7 참조), 예수님께서도 모든 다른 아기처럼 황제의 등록소에 등록되었습니다. 루카 성인은 특히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의 모든 규정, 곧 예수님의 할례, 해산 뒤 마리아의 정결례, 하느님께 바치는 첫 아들 봉헌을(루카 2,21-24 참조) 지켰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레위 12,1-18; 탈출 13,2 참조)
요셉은 모든 상황에서, 주님 탄생 예고 때의 마리아와 겟세마니 동산의 예수님처럼 “그대로 이루어지소서.”(fiat)라고 말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역할인 가장으로서 예수님께 하느님의 계명에 따라(탈출 20,12 참조) 부모에게 순종하도록(루카 2,51 참조) 가르쳤습니다.
나자렛에서 지낸 감추어진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법을 요셉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분의 뜻은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요한 4,34 참조). 겟세마니에서 가장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조차 예수님께서는 당신 뜻보다는 아버지 뜻을 따르기로 하시며,(마태 26,39; 마르 14,36; 루카 22,42 참조)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 그래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을 쓴 저자는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히브 5,8)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성 요셉은 직접 자기 부성의 실행을 통하여 예수의 인격과 사명에 봉사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라는 것과, 이렇게 하여 “충만한 때에 위대한 구원 신비에 협력하였다.”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4. 수용하는 아버지
요셉은 아무런 조건 없이 마리아를 받아들였습니다. 요셉은 천사가 전해 주는 말을 믿었습니다. “요셉은 마음이 고귀해서 자신이 율법에서 배운 것보다 사랑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여성에 대한 정신적, 언어적, 신체적 폭력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오늘날, 요셉은 존경스럽고 섬세한 남성상으로 제시됩니다. 비록 요셉은 모든 내용을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마리아의 명예, 존엄성, 삶을 보호하기로 합니다. 요셉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의 판단에 빛을 비추시어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벌어지는 일들의 의미를 때때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첫 반응은 흔히 낙담과 저항입니다. 요셉은 순리에 따라 일이 이루어지도록 자기 생각은 제쳐 두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책임지며 자기 역사의 일부로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역사와 화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우리의 기대와 그에 따르는 실망감의 인질로 남아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우리를 위하여 걸어간 영적 길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용하고 화해할 때만 우리는 더 큰 역사와 더 깊은 의미를 엿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힘겹게 견디고 있는 악에 저항하라는 아내의 권유에 대한 욥의 간절한 응답이 울려 퍼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 2,10)
요셉은 분명 수동적으로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용기 있게 굳건한 의지로 상황을 주도하는 사람입니다. 수용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불굴의 용기로 우리 삶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삶에 모순과 좌절과 낙담이 존재할지라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에 필요한 힘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서, 우리 저마다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요셉에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아라.”(마태 1,20)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요셉이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든 분노와 낙담을 떨쳐 버리고,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냥 단념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더 깊은 의미에 열리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에 따라 살아갈 용기를 찾으면, 우리는 기적적으로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못된 것 같거나 되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도 상관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위틈에서도 꽃을 피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를 단죄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3,20).
여기에서 우리는 존재하는 것은 무엇도 버리지 않는 그리스도교 현실주의로 다시 돌아갑니다. 신비하고 되돌이킬 수 없으며 복잡한 현실은, 모든 빛과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 실존적 의미를 지닙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심지어 악이라고 불리는 것도”(etiam illud quod malum dicitur)라고 덧붙이십니다. 이러한 전체적인 관점에서 신앙은 기쁜 일과 슬픈 일 모두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믿음이 손쉽고 편안한 해결책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신앙은 요셉 성인에게서 우리가 본 것입니다. 요셉 성인은 손쉬운 방법을 찾지 않았으며, 열린 눈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그 현실에 대한 책임을 직접 짊어졌습니다.
요셉의 수용하는 태도는, 우리에게 예외 없이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환대하며, 약한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라고 권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약한 것을 선택하셨고(1코린 1,27 참조),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보호자”(시편 68[67],6)이시며, 우리 가운데 있는 이방인을 사랑하라고 요청하셨기 때문입니다.(신명 10,19; 탈출 22,20-22; 루카 10,29-37 참조) 저는, 예수님께서 되찾은 아들과 자비로운 아버지 비유에(루카 15,11-32 참조) 관한 영감을 요셉 성인에게서 받았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5. 창의적 용기를 지닌 아버지
모든 참된 내적 치유의 첫 번째 단계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인정하고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것조차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다른 중요한 요소, 곧 창의적 용기를 더해야 합니다. 창의적 용기는, 특히 우리가 어려움에 직면할 때 나타납니다. 어려움 앞에서, 우리는 포기하고 도망칠 수도 있고, 아니면 어떻게든 맞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못하였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자주 하느님께서는 왜 더 직접적이고 분명한 방식으로 활동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해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건과 사람을 통해서 활동하십니다. 요셉은 하느님께 선택되어 구원 역사의 시작을 이끕니다. 요셉은 참으로 신비한 사람으로, 하느님께서는 그 아기와 어머니를 구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요셉의 창의적 용기를 믿으시고 활동하셨습니다. 요셉은 베들레헴에 도착해서 마리아가 해산할 만한 장소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외양간을 준비하고, 최선을 다하여 그곳을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따뜻하게 맞이할 장소로 바꾸었습니다(루카 2,6-7 참조). 헤로데가 그 아기를 죽이려 하는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요셉은 꿈에서 아기를 보호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밤중에 일어나 이집트로 떠날 채비를 하였습니다(마태 2,13-14 참조).
이 이야기들을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세상이 힘세고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휘둘린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기쁜 소식은, 하느님께서는 세속 권력의 모든 오만과 횡포에도 언제나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행하시는 길을 찾으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삶이 때때로 권력자들에게 휘둘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복음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이는,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어려움을 기회로 바꾸었던 나자렛의 목수와 같은 창의적 용기를 보여 준다면, 하느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분명 우리가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창의적으로 생각하여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창의적 용기를, 지붕에서 중풍 병자를 내려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은 중풍 병자의 친구들이 보여 줍니다(루카 5,17-26 참조). 어려움은 담대하고 끈질긴 친구들 앞을 가로막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를 낫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19-20). 예수님께서는 아픈 친구를 당신 앞에 데려다 놓으려는 이들의 창의적인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복음에는 마리아와 요셉과 그 아기가 이집트에 머물렀던 동안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먹을 것, 머무를 곳, 일자리가 필요하였을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 복음이 언급하고 있지 않은 부분을 채워 넣는 데에는 큰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성가정은, 모든 다른 가정처럼, 역경과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우리의 형제자매인 많은 이민처럼, 현실적인 문제들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저는, 요셉 성인이 전쟁, 증오, 박해, 빈곤 때문에 본국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많은 이들을 위한 특별한 수호자라고 믿습니다.
요셉이 나오는 모든 이야기의 끝에, 복음은 그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한다고 말합니다(마태 1,24; 2,14.21 참조). 사실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우리 신앙의 가장 소중한 보배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서 성자를 그의 어머니, 곧 마리아와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신앙의 나그넷길을 걸으셨고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아드님과 당신의 결합을 충실히 견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온 힘을 다하여 언제나 예수님과 마리아를 보호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의 책임과 보살핌과 보호에 신비롭게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분의 아드님께서는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께는 당신을 지켜 주고 보호하며 돌보아 주고 키워 줄 요셉이 필요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자기 삶만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과 아기를 부양할 수 있는 존재를 요셉 안에서 발견하였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도 요셉을 신뢰하셨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셉 성인은 교회의 수호자입니다. 마리아의 모성이 교회의 모성에 반영된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연장선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끊임없이 교회를 보호하면서, 그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를 사랑하면서 그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끊임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 아기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말씀하시게 될 분이십니다. 따라서 모든 가난한 이, 도움이 필요한 이, 고통받는 이, 죽어가는 이, 이방인, 수감자, 아픈 이가 바로 요셉이 끊임없이 보호해야 하는 아이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요셉 성인은 불행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 추방당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 죽어가는 이들의 수호자로 불립니다. 그러하기에 교회는 우리의 형제자매인 가장 작은 이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보여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보이셨고,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우리는 요셉 성인에게서 그와 같은 보호와 책임감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성사와 애덕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교회와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실재들 하나하나가 언제나 그 아기와 그의 어머니입니다.
6. 노동하는 아버지
첫 사회 회칙인 레오 13세 교황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때부터 강조되었던 요셉 성인의 특징은 노동과의 관련성입니다. 요셉 성인은 목수로 정직하게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노동의 결실로서 양식을 얻는다는 것의 가치, 고귀함, 기쁨을 요셉에게서 배우셨습니다.
취업이 다시 한번 시급한 사회 문제가 되고, 수십 년 동안 번영을 누렸던 국가에서조차 실업이 최고 수준에 이르고 있는 이 시대에 고귀한 노동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요셉 성인은 노동의 모범적 수호자입니다.
노동은 구원 활동에 참여하는 수단이며,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앞당기고, 우리의 잠재력과 능력을 발전시키며, 사회와 형제적 친교를 위하여 그 잠재력과 능력을 발휘할 기회입니다.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의 가장 기초 단위인 가정이 목적을 달성할 기회입니다. 노동하지 않는 가정은, 특히 어려움, 갈등, 별거, 심지어는 가정 해체에 특히 취약합니다. 모두가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하게 만드는 노동을 하지 않고,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노동하는 이들은 하느님과 협력하고, 어떤 면에서는 우리 주변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영적 위기는,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새로운 일상을 만들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노동의 가치와 중요성과 필요성을 재발견하라는 요청일 수 있습니다. 요셉 성인의 노동은, 몸소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노동을 업신여기지 않으셨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의 많은 형제자매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로 늘어난 실직은 우리가 우선시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살펴보라는 요청입니다. 노동자이신 요셉 성인께, 그 어떤 젊은이도,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가정도 노동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우리의 확고한 신념을 표현할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간청합시다!
7. 그림자 속에 있는 아버지
폴란드 작가 얀 도브라친스키(Jan Dobraczyński)는 저서 『아버지의 그림자』(The Shadow of the Father, Cień Ojca, Warsaw, 1977)를 통하여 소설 형태로 요셉 성인의 삶을 전하였습니다. 저자는 그림자의 좋은 이미지를 이용하여 요셉을 정의하였습니다. 요셉과 예수님의 관계에서 요셉은 하느님 아버지의 지상의 그림자였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지켜보고 보호하며 예수님께서 혼자 길을 가시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한 말을 떠올려 봅시다. “너희는 마치 사람이 제 아들을 업고 다니듯,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이곳에 다다를 때까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줄곧 너희를 업고 다니시는 것을 광야에서 보았다”(신명 1,31). 이와 비슷하게 요셉은 살아가면서 부성을 보여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저절로 되기보다 만들어집니다. 단순히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를 돌보겠다는 책임감을 느껴야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린이들은 아버지가 없는 고아들처럼 보입니다. 교회도 아버지들이 필요합니다. 바오로 성인이 코린토 신자들에게 한 말은 여전히 시의적절합니다. “여러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끌어 주는 인도자가 수없이 많다 하여도 아버지는 많지 않습니다”(1코린 4,15). 모든 주교와 신부는 바오로 사도처럼 이렇게 덧붙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내가 복음을 통하여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1코린 4,15).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 나는 다시 산고를 겪고 있습니다”(갈라 4,19).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자녀들에게 삶의 경험과 현실을 접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제지하거나 지나치게 보호하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녀들이 스스로 결정하고 자유를 누리며 새로운 기회들을 찾아 나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마도 요셉을 전통적으로 가장 순수한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는 그저 사랑의 표징이 아니라 소유와는 반대되는 것을 표현하는 모습의 종합입니다. 순수함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소유로부터 자유로운 것입니다. 사랑은 순수할 때만 참사랑입니다. 소유욕이 강한 사랑은 결국 언제나 위험합니다. 그러한 사랑은 구속하고 옥죄며 불행하게 만듭니다. 하느님께서는 순수한 사랑으로 인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자유로이 두시어 우리가 방황하도록 심지어 그분께 맞서도록 두셨습니다. 사랑의 논리는 언제나 자유의 논리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특별한 자유로써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결코 자기중심적이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고, 오히려 마리아와 예수님을 자기 삶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요셉은 자기희생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기꺼이 내어 줌으로써 행복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요셉에게서 좌절이 아니라 오직 믿음만을 봅니다. 요셉의 오랜 침묵은 불평이 아니라 믿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서막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고 다른 이들에게 위세를 부리는 독재자는 필요 없습니다. 권위와 권위주의를, 봉사와 복종을, 논의와 억압을, 애덕과 복지주의를, 권력과 파괴를 혼동하는 이들을 거부합니다. 모든 참성소는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는 것, 곧 성숙한 희생의 결과로 생겨납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성숙은 사제직과 축성 생활에서도 필요합니다. 우리의 성소가 혼인이든 독신이든 동정이든 상관없이 희생으로 그친다면,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는 것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그런 경우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 주는 것은 사랑의 아름다움과 기쁨의 표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슬픔과 좌절을 드러내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아버지들이 자녀들의 삶을 자신들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유혹을 뿌리칠 때 예상 밖의 새로운 앞날이 열립니다. 모든 자녀는, 자녀의 자유를 존중하는 아버지의 도움을 받을 때만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신비를 지닌 존재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쓸모없어졌을 때 비로소 아버지와 교육자의 역할을 다하였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자녀가 자립하여 자기 삶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 그리고 자녀가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자신의 보호에 잠깐 맡겨져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던 요셉의 입장이 되었을 때입니다. 결국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이해시키려고 하셨던 부분입니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마태 23,9).
부성을 보여 주어야 할 때, 소유가 아니라 더 큰 부성을 보여 주는 표징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분명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요셉과 같습니다. 요셉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마태 5,45)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그림자며, 성자를 따라가는 그림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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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가라.”(마태 2,13)라고 하느님께서는 요셉 성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교황 교서의 목적은, 이 위대한 성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키우고 그분의 전구를 청하며 그분의 덕행과 열정을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인들의 고유한 사명은 기적과 은총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창세 18,23-32 참조)과 모세(탈출 17,8-13; 32,30-35 참조)처럼, 그리고 “중개자”(1티모 2,5)이시고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1요한 2,1)이시며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시는”(히브 7,25; 참조: 로마 8,34) 분이신 예수님처럼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모든 신자가 “성덕과 자기 신분의 완성을 추구하도록” 도와줍니다. 성인들의 삶은 복음을 실천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인들의 삶도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입니다. 바오로 성인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코린 4,16)라고 분명하게 권고합니다.
많은 거룩한 이들의 모범 앞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자문합니다. “그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우리가 왜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을 너무 늦게 사랑하였습니다, 예전에도 지금도 아름다우신 분이여!”라고 환호하면서 결정적 회개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요셉 성인에게 은총들 가운데 은총, 곧 우리의 회개를 위하여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요셉 성인에게 이렇게 기도합시다.
구세주의 보호자시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시여,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외아드님을 맡기셨고
마리아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보호 속에서 성장하셨나이다.
복되신 요셉이시여,
저희에게도 아버지가 되시어
삶의 여정에서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저희를 위하여 은총과 자비와 용기를 얻어 주시고
모든 악에서 저희를 지켜 주소서.
아멘.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교황 재위 제8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2020년 12월 8일, 프란치스코 *출처-CBCK, 성경의 각주를 제외하고 다른 각주는 읽기 편의를 위하여 생략하였음)
신부님의 글을 읽고 성요셉을 묵상하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고맙습니다.
성인의 축일을 맞아 다시 한번 읽으며 마음에 담습니다. 감사합니다.